128화
파르로시와 하일모라가 뒤엉켰다. 파르로시는 손에 잡히는 대로 붙잡고 하일모라를 때렸다.
“네가 뭘 알아! 나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 겪어 본 적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일모라!”
나엘라가 철창을 쾅쾅 치며 그녀를 부르는데도 하일모라는 다른 것에 급급했다. 파르로시는 눈이 뒤집힌 것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옷을 붙잡고 머리채를 휘감았다.
“한 번도 나처럼 살아 본 적 없잖아!”
기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바라만 보았다. 황실 기사들이었으면 진작에 파르로시를 떼어 냈을 텐데 차마 황녀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당황한 게 느껴졌다.
파르로시가 내키는 대로 마구 휘두른 손찌검에 하일모라의 입술이 찢어졌다. 거침없이 손을 내리치고 있었다.
나엘라가 자물쇠를 부수려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 어머니랑 똑같이 취급하지 마!”
순식간이었다. 하일모라가 단숨에 파르로시를 밀치고 엎어진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악─!”
이때까지와 다르게 파르로시의 비명이 감옥 안에 퍼졌다.
모두 숨이 멎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일모라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내… 내 얼굴…!”
파르로시의 하얗던 뺨에 긴 칼자국이 그어지고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떨어지던 핏방울은 점점 분수가 되어 그녀의 목을 타고 옷깃을 적셨다.
“아아악─!”
하일모라는 스스로 한 짓이 믿기지 않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기사들이 달려들어 발광하는 파르로시를 일으켜 세웠다.
“저택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죽여 버릴 거야! 놔! 이거 놓으라고!”
“뭐해, 먼저 가서 의원을 부르지 않고!”
하일모라를 죽이겠다며 발광하는 파르로시를 기사들이 막았다. 혹시 보이는 것보다 상처가 깊어 출혈이 더 많아지면 큰일이었다. 그 전에 당장 지혈해야 했다.
“아악─! 악─!!”
온몸을 제압당한 파르로시가 감옥에서 내보내지는 그 순간까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남은 기사들은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들어 올리고는 하일모라를 향해 다가갔다. 피가 묻은 손으로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던 하일모라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쯧. 들어가라.”
감옥 문이 열리고, 기사들의 손에 의해 하일모라는 철창 안에 갇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은 기사들은 서로 작게 중얼거리고는 감옥을 빠져나가 모두 사라졌다.
“하일모라…! 괜찮은 거야?”
다급히 철창에 달라붙은 나엘라가 하일모라를 살폈다.
“미안해. 열 받아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러더니 열쇠도 지금 생각났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맞은 곳은 어때?”
상태를 정확히 살펴보고 싶어도 망할 철창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반대편에 있는 지엘라도 연신 걱정의 말을 이었다.
“세레노피 부인, 정말 괜찮은 거예요? 얼굴 봐 봐요.”
다행히도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파르로시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거나 몸을 써 본 적이 없다는 것이 티가 났다.
대신 파르로시가 달려들었을 때 잘못 맞았던 입술이 터져 있었다.
“아, 따가워라.”
“빨리 치료해야 흉지지 않을 텐데 큰일이에요.”
입술을 몇 번 톡톡 건드려 보던 하일모라는 나엘라가 있는 쪽 철창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철창을 붙잡고 있는 나엘라의 손을 감쌌다.
“괜히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같이 오겠다고 고집부린 거야.”
입을 꾹 다문 나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시가 잔뜩 돋아난 생각이 그녀의 속을 온통 생채기 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하일모라가 함께 오겠다는 선택을 했을 리가 없다.
“전혀 안 듣고 있네. 그런데 나도 정말 화가 났었어.”
하일모라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다가 입술이 따가운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서 나엘라가 했던 말까지 다 잊어버릴 만큼 화가 났는지 금방 풀어냈다.
“어렸을 때부터 학대당했다고? 본인도 누군가에겐 가해자였잖아. 모두가 아픔을 겪었다고 그런 짓을 하진 않아.”
“하일모라….”
“강제 결혼? 사실 그렇게 따지면 지엘라 부인은! 아, 지엘라 부인을 언급해서 죄송해요.”
지엘라가 저편에서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파르로시가 누렸던 모든 것은 결국 황후의 죄로 얻었던 거야. 그녀가 정말 피해자라 주장하려면 황후에게 받는 것들부터 내려놨어야지. 파르로시가 북부에서 편안히 있을 수 있는 이유조차 황후 덕이잖아.”
나엘라는 제 손 위로 겹쳐져 있던 하일모라의 손을 감싸 안았다. 화도 많이 났겠지만 아마 많이 무서웠을 거다. 누군가에게 이리 맞은 것도,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것도 전부 처음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지엘라가 걸리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사들이 마지막에 한 말은 별 뜻 없겠죠?”
분노에 차 있던 하일모라도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 지엘라 부인은 모르시겠구나.”
“뭐가요?”
마지막 말의 대답은 하일모라 대신 나엘라가 설명했다.
“신호입니다. 저들끼리 ‘이런 일은 서튼이 더 잘했을 텐데 말이야’라고 했죠. 서튼은 제 사람입니다.”
“그럼…!”
“네. 교체된 기사들은 저희 사람들이에요.”
톨레로 상단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말을 전했다는 건 신호와 다름없었다.
가장 중요한 서튼의 이름도.
“아무래도 체드란에게 모두 들킨 모양이에요.”
“이런…. 오라버니가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
그래도 더 이상 지엘라와 하일모라가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나엘라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
클루아조는 소란스러운 저택에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냐?”
옆에 서서 대기 중이던 소코웨가 사태를 알아보겠다며 고개를 숙인 후 나갔다.
얼마 후 돌아온 그가 난처한 얼굴로 보고했다.
“감옥에서 일이 있었답니다. 소공작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파르로시 황녀님이 세레노피 부인을 채찍질하다 단검에 베이셨답니다. 얼굴 오른쪽을 길게 베이셔서 급히 치료에 들어가셨다고.”
“뭐?”
클루아조는 어이가 없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기껏 조언까지 해 줬는데 당하고 돌아왔다고?”
“죄송합니다. 몸수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간이 크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는 클루아조는 정작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확실히 평범한 귀부인은 아닌가 보네.”
아랫입술을 문지르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궁금한데 한번 가 보지, 뭐.”
그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
파르로시를 다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점심밥은 나왔다. 심지어 기사들이 톨레로 사람이라선지 지금까지의 식사보다 훨씬 음식다웠다.
“우와…. 이건 차별 아니야?”
하일모라가 이렇게 얘기하는 이유는 음식의 종류 때문이었다.
해산물이 가득 들어간 스튜, 바게트 위에 올라간 고기볶음, 해산물과 치즈를 섞어 오븐에 구운 요리까지.
감옥이라기엔 호사스러운 느낌마저 들었지만, 완벽히 나엘라를 위한 식단이었다.
“나는 해산물 그렇게 안 좋아하는데….”
식판 아래로 전달받은 상처 연고와 소독약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다음에 체드란을 만나는 날 하일모라가 잔뜩 따졌을 판이다.
그녀의 식판 아래에 약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곤 나엘라도 제 식판 아래를 손으로 훑었다. 역시나 쪽지가 하나 붙어 있었다.
다급히 쪽지를 열어 본 나엘라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뭐야 왜 그래?”
하일모라가 얼굴을 바짝 붙인 채 궁금증을 드러냈다. 지엘라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철창에 다가왔다.
“지안이 쪽지를 보냈어.”
“뭐라고?”
나엘라는 지엘라와 함께 읽으라며 하일모라에게 쪽지를 전해 줬다.
안에는 두 문장밖에 없었다.
『대공 전하께 들켜 쫓겨났습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자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으니 잘 쉬다 나오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