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해가 지기 전까지 나엘라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 밥다운 밥도 먹고 몸도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
하일모라는 제대로 씻는 건 고사하고 화장실도 불편해 진짜 죽을 뻔했다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지엘라도 고단하긴 했는지 씻자마자 침대에 누워 그대로 잠들었다.
두 사람 모두 나엘라만 믿고 버틴 셈이라 말은 안 해도 힘들었으리라.
나엘라도 간만에 침대 위에서 낮잠을 한숨 자고는 일어났다.
“소공작의 편지는 전했어요?”
감옥에 있는 소공작을 시켜 저택으로 보낼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저가 이것까지 해야 하냐며 불평했지만, 밥을 안 준다는 이야기에 군말 않고 손을 놀렸다. 소공작에게도 밥은 중요한 모양이었다.
어째 기사들은 이리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움직이죠.”
소공작의 편지에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내용도 남기고, 저택 호위 인원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기도 했으니 움직일 차례다.
나엘라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는 가벼운 경갑만 착용한 채 말에 올랐다.
“체드란, 빨리 움직여요. 소공작이 말한 곳에 증거가 없으면 저택을 죄다 뒤져 봐야 한다고요.”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던 체드란도 결국 말에 올랐다.
“난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네만.”
저택 잠입까지 하게 생겨 불만이었던 걸까.
나엘라는 흘끗 그를 보고는 가볍게 말의 배를 찼다. 그 뒤를 따라 다른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뭐 하러 왔는데요?”
“그대를 데려가려고 왔지.”
“이걸 도와주면 더 빨리 데려갈 수 있을 텐데요.”
“우리 며칠 만에 조우했네. 아직 반갑다는 인사도 못 나눴다는 걸 알긴 하나?”
그건 체드란의 탓이 아닌가? 근육이 빠졌으니 앞으로는 더 못 이길 거라며 만나자마자 사람 속을 긁은 인간이 누구데!
하지만 그의 투덜거림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그노멘에서부터 북부까지 걸린 기간만 해도 일주일, 감옥에 갇혀 있던 하루를 합하면 벌써 2주나 못 봤으니까.
“보고 싶었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기르던 강아지도 매일 붙어있다가 떨어지면 보고 싶은 법이니 체드란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은 찾기도 어렵다.
“그대가 날 보고 싶어 한 것보다 더 그리웠네.”
문득 체드란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떠올렸다. 어떤 대답이든 해야 할까 싶던 마음도 찰나에 사라졌다. 하일모라의 말이 스친 것이다.
‘너는 먼저 네 감정부터 알아야 해.’
지금은 체드란의 말에 제대로 답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명확히 제 감정을 말할 날이 오지 않을까.
“고마워요.”
그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엘라는 꿋꿋이 앞만 보았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색하고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다고, 저를 기다려 주는 그 배려에 감사하다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일 도와줘서 고맙다고요! 당신은 진짜 최고의 일꾼이에요!”
어쩌다 보니 소리 지른 셈이 됐지만, 체드란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직접 보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뒷말은 안 하는 게 나았네.”
나엘라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더 빨리 몰았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었다.
*
나엘라는 클루아조가 그려 준 약도를 펼쳤다.
클루아조가 억울해할 법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경우는 방심해 당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법이다.
마지막에 그가 ‘이 정도 했으면 인간적으로 데이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쓸데없는 말을 붙였지만 한 귀로 흘렸다. 적인 그를 써먹는데 거리낌이 생길 리가 없었다.
“이쪽이에요.”
나엘라가 먼저 계단을 오르고, 체드란과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 시간에는 사용인들도 지나다니지 않는다고 했어요.”
“소공작이 그런 것도 알려 줬나?”
체드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실제로 언질해 준 건 맞았다.
나엘라는 감옥에서 약도를 보던 당시 클로아조와 한 대화를 떠올렸다.
‘목표가 뭡니까?’
‘무슨 목표?’
‘이제는 말도 짧네요? 가장 마지막에 하고 싶은 목표가 뭐냐고요.’
‘첩자에게 그걸 어떻게 알려 줘?’
‘저는 약도까지 그려 줬는데요?’
‘복수. 그리고 내 사람들 지키는 것.’
‘황제가 목표라는 얘기네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엘라는 깨달았다. 소공작도 황제에게 어떤 약점을 잡힌 채라는 것을. 아니라면 단숨에 황제를 떠올릴 리가 없었다.
소공작 역시 황제의 비열함을 안다는 의미였으나 관심 없는 일이라 더 대화를 이어 가진 않았다.
“반했나 보죠.”
체드란이 작게 침음성을 내었다.
“역시 죽일 걸 그랬어.”
“제가 잡았는데 왜 체드란이 처분을 결정해요?”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나엘라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침실 문고리를 돌렸다. 안은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고 사람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숨어 있는 이가 있는지 살폈으나 이상은 없었다.
“들어와요.”
모든 이가 각자 맡기로 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 서재, 집무실 셋으로 나눠 수색하기로 했으니 지금쯤 다른 이들도 증거를 찾고 있을 것이다.
황후의 내통 증거 말고도 다른 정보가 존재할 수도 있으니 꼼꼼히 수색하라 일렀다.
“찾았습니다.”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을 확인하던 한 기사가 목소리를 내었다. 나엘라는 재빨리 몸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드레스룸 벽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손을 넣어 살짝 잡아당기자 틈이 생기며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를 돌려 번호를 맞추는 형식이었는데 나엘라는 재빨리 순서대로 숫자를 맞추었다.
‘0824.’
다행히 소공작의 말은 사실이었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금고 안에는 온갖 서류와 여러 서신이 들어 있었다.
체드란에게 반쯤 넘기고, 각자 확인에 들어갔다.
“황후의 서신이 맞군.”
“요반나와 거래 내역도 있습니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었는지 금액도 오간 내역이 꽤 보였다. 시간상 자세히 확인할 순 없으나 얼추 맞다는 걸 눈대중으로 맞추고는 품에 넣었다.
“더 없나 확인하죠.”
아무리 그래도 북부 해상 제독인데 정보가 더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이중장부 같은 비리 증거나 황제와 오간 연락의 흔적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나엘라의 진두지휘로 다들 흩어져 방 안을 뒤지는데 아쉽게도 더 나온 것은 없었다.
서재와 집무실로 간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특히 집무실 쪽으로 간 이들 중에는 서튼과 지안이 있으니 결과를 기대해 봐도 괜찮을 거다.
특히 서튼은 은근히 운이 좋은 편이라 그런 것들을 잘 찾아내니까.
“시간 다 됐네.”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은 30분이었다. 저택에는 클루아조의 사람뿐만 아니라 아이안 공작의 사람, 둘째 공자와 손님들도 있으니 빨리 벗어나야 했다.
“가죠.”
아쉽지만 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에 흔적들을 지우고 한 명씩 빠져나갔다. 순조롭게 저택 밖으로 움직이던 나엘라가 어느 한 곳의 테라스를 보곤 발을 멈췄다.
“나엘라?”
체드란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올려다본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자리했다. 어깨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에스토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엘라가 한숨을 푸욱 내셨다.
“먼저 가 있어요. 10분 정도 걸릴 겁니다.”
“에스토 시론을 보고 올 생각인가?”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위층이요.”
“위층?”
체드란이 더 고개를 들어 본 그곳에는 하얀 커튼만이 나풀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가요. 조금 이따 약속 장소에서 만나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엘라는 저택 안으로 되돌아 달렸다.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체드란은 한숨만 푸욱 내쉬었다.
*
단숨에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나엘라는 자신이 결심해 놓고 왜 오르는지 의문을 가졌다.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이다. 눈으로 보았던 방 위치를 셈하던 나엘라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하얀 잠옷을 입고 볼에 거즈를 붙인 파르로시가 서 있었다. 푸른 눈은 핏발이 서서 붉게 보였고 머리는 흐트러져 산발이었다.
나엘라가 굳이 올라온 이유는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친 그녀가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입 모양만으로 올라오라고 요구한 그녀는 곧 커튼을 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솔직히 웃기는 일이잖아. 네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협박을 해.”
파르로시의 목에는 여전히 칼날이 닿아 있었다. 살짝 댄 듯했음에도 단도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살짝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만 보니 하일모라가 놓친 단도였다. 찾아도 안 보이더니 파르로시가 갖고 간 모양이었다. 그 단도로 하일모라를 찌르려 했던가.
“그런데 올라왔잖아.”
“마지막이니까 올라온 거야.”
“마지막?”
“혹시 개과천선해서 황후에 대해 증언해 줄 생각 있는지 물어보려고.”
황녀의 증언만큼 효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오직 그뿐이었다. 나엘라는 그렇게 자신에게 다독였다.
“내가 널 부른 이유가 뭘 것 같아?”
파르로시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죽으려고.”
나엘라의 답이 맞았을까,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맞아. 내가 지금 죽으면 넌 나를 죽인 살인자가 되는 거야.”
“증거도 없고 아무도 믿지 않을걸.”
나엘라가 오늘 여기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그녀가 이곳에서 죽어 발견된다면 의심은 소공작에게 쏠릴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은 네가 죽였다고 생각하겠지.”
“체드란?”
“그래.”
이쯤 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이 여기 온 것을 클루아조와 파르로시가 알고, 심지어 에스토까지 알게 됐다.
과연 이게 잠입인가?
차라리 낮에 당당히 올 것을 그랬다.
“적어도 오라버니에게 오래 기억되겠지. 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니까.”
파르로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살기 위해 그녀를 이용했음을, 그래서 체드란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야?”
나엘라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체드란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그 감정에 목숨을 버리려 하는지.
“세상은 나에게 한 번도 호의적인 적 없었어.”
파르로시가 살아온 삶의 형태를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자랐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받으면서 자란 너는 절대 이해 못 해.”
하지만 파르로시 역시 나엘라의 삶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녀가 억울해하는 악다구니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비어 있었으나 나엘라는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가만히 속엣것을 토해 내는 파르로시를 응시했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한 번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줘도 괜찮지 않을까.
“벗어나고 싶어도 도와줄 사람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옳은 건지 어떤 게 사랑받는 방법인지 몰라. 그저 어머니가 내게 했던 방법대로 해 온 거야. 내가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이니까.”
사랑받아 본 자만이 사랑을 줄 줄도 안다는 말, 나엘라도 그 말을 믿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이런 방법밖에 모르는 게 내 죄야? 그럼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는 건 누구의 죄야? 학대받는 날 보듬어 준 사람 역시 없었어. 그건 누구의 죄인데? 나만, 왜 나만……! 왜 세상은 나에게만 이렇게 잔인한데?”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졌다.
“살려 달라고 빌었어. 사랑을 달라고 빌었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놓고 왜 내게 손가락질만 해.”
터지는 울분만큼 쥔 손아귀 힘에 단도가 점점 그녀의 목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