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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2)화 (132/220)

131화

“지금 네가 여기서 죽어 봤자 변하는 것은 없어.”

“적어도 오라버니는 내 죽음을 기억할 거야.”

“정말 그거면 돼?”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 나엘라 또한 그런 경험이 있지만, 너무 어릴 때였고 그때는 누구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후유증인지 그때의 일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많이 울었다는 것, 제 오라버니들이 자신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

나엘라는 그것만 기억하면 된다고 여겼다.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복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삶은 이미 끝나 버렸는데.”

그녀를 붙잡아 볼까, 다독여 볼까.

나엘라는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털어 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택을 하며 산다. 이것이 파르로시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잔인할 순 있어도 파르로시는 나엘라의 사람이 아니었다. 타인에게, 심지어 적에게 내밀 수 있는 호의는 한계가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고 돌아설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엘라는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들을 연민하고 인류애적인 마음으로 한 사람을 더 살리기엔 나엘라의 삶 또한 녹록지 않았으니까.

다만─.

“죽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체드란이 네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두지도 않을 거야.”

파르로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발악하는 짐승처럼 구겨진 얼굴은 붉어지는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그리고 나 같으면 값어치도 없는 목숨으로 협박을 하기보단 어차피 죽을 거 날 이렇게 만든 사람들과 같이 죽기를 택하겠어.”

그렇게 상처받았고 사람이 밉다면 독해졌어야지. 남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삶이 되더라도 말이다.

손가락질 좀 받으면 어떤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뭐든 못 할까.

“내가 만약 복수하겠다 결심한다면 오라버니라고 무사할 것 같아? 오라버니 또한 나를 이용한 거잖아.”

절절하던 천년의 사랑도 벼랑 앞에선 버릴 수 있을까.

나엘라는 그저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악에 받쳐서 하는 말임을 알았다. 그래도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그녀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날 미워해. 체드란이 유일한 빛이었다면 그는 미워하지 마.”

소중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삶이야말로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주 작은 빛이라도 있어야 사람은 또 살아갈 힘이 생기는 법이다.

“난 사랑받으며 자란 주제에 너를 멋대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날 미워할 이유는 충분하잖아.”

“그러지 않아도 이미 네가 죽도록 미워. 너만 없었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어.”

나엘라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유 없는 악의라는 걸 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그녀의 상황을 재촉했을 수는 있었다.

“어쩌지, 그런 말을 들어도 난 괜찮은데. 잔뜩 사랑받아서 너의 미움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아.”

억울해도 괜찮고 미워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그런 독기가 생기면 또 살아갈 테니까.

체드란의 죄책감이라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아량이었다.

“네가… 네가 죽도록 미워….”

“그래.”

“너 따위는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래.”

“내 평생을 널 저주하며 보낼 거야.”

“그래….”

“나는… 나도 너처럼 사랑받고 싶었어….”

“….”

“왜 세상은 나만…. 왜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천천히 단도가 떨어지며 파르로시가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물방울이 떨어지며 자국이 번졌다.

본인도 이런 행동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를 바랐다.

거기까지 본 나엘라는 주저 없이 발을 돌렸다. 적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며 나엘라는 방을 나왔다.

고개를 돌렸을 때, 문 옆에 기대어 있던 체드란과 눈이 마주쳤다. 나엘라는 천천히 방문을 닫았다.

“왜 여기 있어요?”

“그대가 또 사고 칠지 모르니까?”

“감시하러 온 거예요?”

“또 엄한 놈이 꼬일지도 모르고.”

“감시 맞네.”

그를 가만히 보던 나엘라는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잡아 달라는 듯 내민 손이라 체드란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납치는 이제 지긋지긋하네요. 다음엔 제가 납치범이 될래요.”

“납치당하는 것보단 걱정이 덜되겠군. 증거는 남기지 않길 바라네.”

“집에 가요.”

“어디 집?”

“마음 같아서는 대공령으로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수도로 가야겠죠?”

체드란은 꼭 붙든 손을 바라보았다. 문밖에서 이야기를 모두 들었기에 그녀가 이리 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엘라는 잘하지 못하는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체드란은 그 손을 꽉 잡고는 나엘라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적진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안 공작가지만 두 사람에겐 여유가 넘쳤다.

“노헤스카가 그대의 집이 되어 다행이군.”

“결혼한 날부터 집이었어요.”

두 사람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도 파르로시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공유하는 감정들이 있었다. 죄책감이든 미안함이든 다 넣어 두고 우리의 집이 되어 버린 대공령을 떠올리며 이들은 또 발걸음을 내디뎠다.

“돌아가면 일주일 동안 고기만 먹을 거예요.”

“원래도 고기만 나왔네.”

“해산물 나오는 날엔 안 나왔잖아요.”

“평생 고기만 먹게 해 주겠네.”

저택을 빠져나오니 새벽달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해산물도요.”

“포도도 잔뜩 쌓아 주지.”

나엘라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것 또한 고백이라는 것을 어찌 모를까.

“나는 뭘 해 줘야 하나.”

“날 지켜야지.”

체드란도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었다.

*

황후의 기분이 서신 한 통에 매우 저조해졌다는 것이 황후궁 전체에 퍼졌다. 그녀의 기분에 따라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 파악은 필수였다.

“대체!”

황후가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제대로 일하는 놈들이 왜 하나도 없어!”

찻잔에 뒤이어 디저트가 담겨 있던 접시, 포크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 던졌다. 서 있는 사람 중 몇은 얼굴에 맞기까지 했으나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벌써 몇 번째야!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

오랜 시간 준비해 오던 반란군에 이어 파르로시를 이용해 요반나와 협력을 굳히려는 계획이 무너졌다. 더군다나 요반나 사람들이 잡히기까지 해 북부 해운 검열이 강해질 거라는 이야기도 돌았다.

그래도 아이안 공작가가 쉬이 무너지진 않을 테니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설상가상 나엘라의 납치까지 실패했단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아이안 공작가를 조사 들어간다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야!”

황실도 찾지 못했던 세 사람을 체드란이 찾았다. 납치된 이들은 아이안 공작령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에 용의자로 아이안 소공작이 단번에 떠올랐다.

북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먼저 발송한 체드란의 급보가 황도에 도착했다. 오늘 아침, 황제가 기어이 아이안 공작가의 조사를 명한 참이었다.

더불어 점심에 이루어질 귀족 회의에서 황후에 대한 전격 조사를 명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황제도 발을 빼고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이….”

한 기사가 용기 내 입을 열었지만, 다시 한번 물건이 날아왔다.

“닥쳐! 그걸 말이라고 해? 그깟 천한 것들이 뭐라 떠들든 무슨 상관이야!”

예상보다 빠르게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진원지도 찾지 못했다. 이야기의 방향 또한 황실에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서 더 문제였다.

한참이나 황후가 분노를 쏟아 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황후마마…!”

“뭐야?!”

“마,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에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전쟁? 무슨 전쟁?”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전시 체제에 들어간 것은 알고 있었다. 불안한 대내외적 상황이 겹쳐져 백성들이 더 불안에 떨었다. 그 탓에 황후의 평판이 더 떨어진 것이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내전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제스라와 두칸의 첩자를 발견하고 추격하는 와중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제스라와 두칸이 연합을 준비하는 것 같다며 그 전에 먼저 쳐야 한다고 두 가문에서….”

“뭐?”

황후는 인상을 쓰고는 잠시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들어 다른 이들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두 가문과 타국의 전쟁은 황후에게 호재였다. 나엘라를 납치한 이들에 대해 조사를 할 때에 두 가문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힘들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황후의 패들이 모두 날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생각들인 거야?”

황후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두 가문이 전쟁을 시작하면 가주들은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 체드란과 마호세르디 공작도 모두 영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엘라 납치 사건에 대해 발을 빼겠다는 의미일까?

“황후 마마….”

측근 중에서도 황후에게 조언을 가장 많이 하는 시녀장이 조심히 말을 얹었다.

“일단 귀족 회의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빼내실 방법을 확보해 놓겠습니다.”

은연중에 황후가 감옥에 갇힐 상황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다.

황후는 이를 갈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도망이라니, 절대 용납될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도망 따위나 다니려고 이때까지 버틴 게 아니다.”

황후는 시녀장을 노려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절대 죽을 생각도 없고 말이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감히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혹여 궁지에 몰리게 된다 해도 절대 혼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파르로시와 시론 경부터 아이안 공작가에서 대피시켜라.”

“어디로 모실까요?”

“황도로 데려와.”

언제든 써먹기 위해선 가까이 두는 것이 좋다. 아이안 소공작이야 알아서 잘 처신할 테니 크게 걱정이 없었으나, 문제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었다.

“반란군 중 잡힌 이들은 어디 있지?”

“황도 서쪽 감옥에 있습니다.”

서쪽 감옥이라 하면 다행히 수도 방위군이 감시하는 곳이었다. 제 사람들을 많이 심어 놓은 곳이라 일이 쉬웠다.

“모두 죽이라고 전해. 귀족들과 요반나 사람들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전부 처리해야 한다. 그들이 이제껏 무슨 증언을 했든 재판에 참석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다면 증인의 죽음을 빌미로 노헤스카에서 범인들을 협박해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죽여 버린 거라고 우겨볼 수라도 있다. 반박하다 보면 자연히 빠져나갈 구멍도 생긴다.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황후가 눈동자를 빛냈다.

“황실 지하 감옥에 있습니다.”

“하필….”

황실 지하 감옥은 황궁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했다. 황실근위대가 감시하기에 경비도 삼엄한 곳이었다.

“사람을 심어라. 그들을 빨리 처리해야 해.”

“네, 알겠습니다.”

황후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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