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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3)화 (133/220)

Chapter 14. 원죄 속에 개화하는 악

132화

하일모라는 은근슬쩍 지엘라에게 몸을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왠지 저 둘의 분위기가 좀….”

“좀…?”

모르겠냐는 듯 고갯짓을 하며 억울한 티를 내자 지엘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죠? 저만 느끼는 거 아니죠?”

그들이 얘기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나엘라와 체드란이었다. 이들은 황실만 이용한다는 지름길로 황도를 향하고 있었는데 어째 대공 부부의 행실이 조금 수상했다.

바로 지금처럼.

“포도 말고 좋아하는 과일은?”

“대체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딱히 찾아 먹진 않아요.”

“고기는 무슨 고기를 가장 좋아하지?”

“딱히 향신료만 강하지 않으면 다 좋아하죠.”

“향신료는 별로 안 좋아하나?”

“싫어하게 된 계기가 있죠. 열여섯 살 때였나? 제가 동계 훈련을 나갔을 때 말이에요.”

서로를 바라보며 재잘대는 모습이 퍽 다정했다. 바람을 쐰다며 오는 내내 마차도 타지 않고 말로만 이동했던 나엘라 옆에 체드란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말을 타고 저리 가까이 붙어 이동해도 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엘라는 옅게 웃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부부로서 손색이 없네요.”

“잘 어울리긴 하죠.”

보통 여자들보다 키가 큰 나엘라와 확연히 남다른 체구의 체드란. 거기다 나엘라는 차가운 분위기, 체드란은 무감정한 분위기를 늘 풍기고 다니니 기묘할 만큼 잘 어울렸다. 

더군다나 외모로도 선남선녀이니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오밤중에 나간 두 사람이 뭘 하고 왔길래 저리 다정해지느냔 말이다.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하일모라는 나엘라와 눈이 마주치자 못내 웃어 버렸다.

“둘이 신혼을 뽐내며 알콩달콩할 것도 얼마 안 남았네요.”

그 말에 동의하던 지엘라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는 듯 물었다.

“둘이 부부 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하일모라와 지엘라는 동시에 눈을 깜박였다.

부부 싸움? 그것도 나엘라와 체드란이?

“잘은 몰라도 남아나는 게 없지 않을까요?”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데 진짜 칼이 등장할지도 모르겠어요.”

“물 대신 사람을 베려 하겠군요.”

먼 미래에 부부 싸움을 떠올려보던 둘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생각만으로 살 떨려요.”

“저도요.”

아직 한참 뒤의 얘기지만 부부 싸움은 없길 바랐다.

*

“체드란.”

말고삐를 쥔 채 앞을 보던 체드란은 금세 얼굴을 돌렸다.

“체드란은 뭘 좋아해요?”

“딱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네.”

“그래요?”

“갑자기 왜?”

뭐라고 해야 할까, 파르로시를 겪으며 나엘라 본인도 모르는 새 의외로 많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죄책감, 그의 유년 시절,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얼마 후면 체드란은 대공령으로 가야 한다. 두칸과의 전쟁을 위해서.

지금이야 론체나 다른 이들이 버틸 만한 수준이겠으나 정말로 발발한다면 결국 체드란이 필요했다.

“지엘라 부인이 그러더라고요.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군.”

“체드란도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있지. 그대는 39명 정도 있지 않나?”

나엘라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때 했던 말을 아직도 속에 담아 두고 있었나.

“사실 거짓말이에요.”

“그렇겠지. 좋아하는 사람이 39명이면 그대야말로 세기의 난봉꾼이겠지.”

“그런 의미의 좋아하다가 아니거든요?”

38위에 아버지가 있었는데 난봉꾼이 웬 말인가. 체드란과 대화하다 보면 꼭 지기 싫은 말장난으로 흘러간다.

나엘라가 미간을 꿈틀거리는 사이 체드란이 먼저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 얼마큼 알았나?”

“뭔 소리예요?”

“좋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진다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말한 것이 아닌가?”

나엘라는 체드란이 살아온 삶이 궁금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았는지가 궁금했던 건데 나엘라의 질문을 체드란은 오해한 듯싶었다.

말을 정정하려던 찰나, 나엘라는 말을 바꾸었다.

“유리를 못 만져요.”

체드란이 놀란 듯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어렸을 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데요.”

“그렇군….”

“그 사람과 저는 스타일이 매우 달라요. 그래도 제게 맞춰 주는 사람이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타인처럼 얘기한다는 건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직접 말할 용기는 없는데 표현하고 싶었다.

자신이 체드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느낌인지.

“돌아보면 항상 그 사람이 있죠. 어느 순간 당연하게 여겨졌어요. 제 삶에 저도 모르게 들어왔나 봐요. 그래서 그런가, 안심돼요. 무슨 일이든 잘 풀릴 것 같아요.”

여전히 잃는 일을 반복하고 있어도 얻은 것 또한 있었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비교하고 싶지 않지만,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무엇보다 제게 있어 체드란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랑 같기는 하다. 그 어느 누구도 나엘라에게 체드란 같은 감정을 주지는 못하니까.

“나는 사랑일세.”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나엘라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점점 쌓이는 감정만이 가득했다.

그의 고백을 듣고 나니 나엘라도 알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을 들게 하니 말이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체드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아직 상대해야 하는 적들, 가장 중요한 황제, 지켜야 하는 수많은 이들.

그들을 모두 지키고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다짐 같은 말을 뱉었다.

“내가 꼭 지켜 줄게요.”

이제야 알았는데 놓칠 수는 없으니까.

햇살이 반짝이며 체드란의 금발과 눈동자를 수놓았다. 언제부터 그의 표정은 이리도 다정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게.”

자신이 무서워하고 있었나? 

무엇을 또 잃을까, 겁을 내고 있던 모양이다.

“그대답지 않아.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그대로서 존재하도록 해 주겠다고.”

이상하게도 체드란이 전해 주었던 카드 속의 대사가 떠올랐다.

‘그대가 있다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그 뜻을 이제야 이해할 것만 같아 나엘라는 웃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너무 험하여, 그 길을 함께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못내 사무쳐서 그냥 웃었다.

조금 더 좋은 상황에서, 평범하게 만났으면 좋았을걸.

“항상 내 뒤에 있어 줘요.”

“언제든지.”

“험한 건 내가 다 할게요.”

“그건 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해요.”

“그건 노예 계약 같은데….”

“아, 정말…!”

분위기 좀 맞춰 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엘라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눌러 내었다. 좋았던 감정이 다 날아갔다. 이게 모두 체드란 때문이었다.

“뒤에 있겠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한다고는 하지 않았네.”

“됐어요. 말 걸지 말아요.”

“나는 지킬 필요 없다는 말일세. 내가 그대보다 더 강하다는 걸 잊었나?”

“말 걸지 말라고요.”

“그대의 짐이 되고자 뒤에 있겠다는 게 아니야. 그대가 뒤를 걱정하지 않도록 나아가게끔 지키겠다는 거지.”

“…….”

“그대가 모두를 지키려면 그대를 지킬 사람 한 명은 있어야지.”

“…….”

“나를 믿게. 나는 그대의 남편이니까.”

후끈거리며 올라온 열이 얼굴에 가득 몰렸다. 어쩜 저렇게 부끄러운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능글맞은 사람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오히려 과소평가였나 보다.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으면 얼굴이 터졌겠군.”

“체드란 진짜 얄미워요.”

언제부터 상황이 뒤바뀌었을까.

분명 말싸움으론 져 본 적이 없던 나엘라였는데 이제는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지고도 기분이 나쁘지 않아, 되레 낯설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는 체드란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

에스토는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까지는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시론 경께서는 회복에 전념해 주십시오.”

아침부터 황후의 사람들이 쳐들어와 아이안 소공작의 심기도 좋지 않았다. 조사를 받아야 하는 데다 다른 일도 틀어진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소속만 감췄다 뿐이지 대놓고 황후 사람임을 티를 내는 자들이 방문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이안 소공작님께 인사를 하고 오지.”

클루아조는 나엘라가 저택을 습격한 바로 다음 날 돌아왔다. 무슨 일인지 그가 계속 바쁜 데다 그의 저조한 기분도 나아지지 않아 따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시론 경께서 굳이 인사할 필요 없습니다. 소공작은 저희가 따로 언질 주었습니다.”

“하.”

에스토는 방만한 그들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시론 후작가의 가주가 되었으나 다른 이들이 ‘시론 경’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에 불쾌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개 황후의 사람일 뿐인 자들이 꼬박꼬박 ‘경’이라는 기사 호칭을 쓰는 데다, 클루아조에게도 제대로 된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만큼 황후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도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랫사람을 보면 주인을 안다고 에스토는 절로 비웃음이 흘렀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 에스토의 표정에 기분이 나빠진 걸까. 앞에 있는 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는 것이 도리 아닌가.”

“아직도 예의를 차리시는지 몰랐습니다.”

챙─ 단숨에 뽑혀 나온 검이 남자의 목에 겨눠졌다. 비록 한쪽 어깨를 다쳤을지언정 검은 쓸 수 있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 이러시면 앞으로의 동행에 좋지 않습니다.”

치욕으로 얼굴이 벌게졌어도 남자는 끝까지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다.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본인은 알지 못할 터였다.

“황후 마마께서 날 그리 대하라 하시던가? 그럼 황후 마마와의 사이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

그제야 입을 다물고 수그리는 척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이를 꽉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이쯤에서 유념하기로 했다. 남자의 말대로 동행하는 내내 얼굴을 붉힌 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있을 때, 에스토 방의 문이 열렸다. 누가 노크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지 고개를 돌리자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나가.”

한쪽 볼에는 거즈를 붙이고, 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는 파르로시는 환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눈빛이었다. 하나, 그런 파르로시의 말에도 남자들은 인상만 쓸 뿐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라고.”

떠나는 마당에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이 없다 판단한 에스토가 남자들에게 나가 있으라 턱짓했다.

“빠르게 이동해야 하니 짧게 대화하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불손한 태도를 버리지 못한 채로 남자들이 문을 닫고 나갔다. 에스토는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파에 앉기도 전에 파르로시는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나는 황후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어.”

그녀의 말에도 에스토는 소파에 마저 앉으며 평온을 가장했다.

“왜 소공작이 그대와 자주 대화했는지 알고 있다고.”

에스토의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니 내 부탁을 들어줘.”

파르로시가 무슨 부탁을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에스토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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