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본궁 2층에 있는 대회의장, 그곳의 커다란 양쪽 문이 열리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있었다. 모든 귀족이 숨죽였고 그가 가져올 파란을 기다렸다.
“신, 체드란 노헤스카.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딱 벌어진 어깨와 커다란 체격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를 향해 고개 숙였다. 급히 왔을 텐데도 제대로 차려입은 정복과 망토가 그를 따라 바닥을 훑었다.
황제와 같이 금발의 벽안이나 내뿜는 기백은 완전히 달랐다.
“도착하자마자 온 모양이군.”
나엘라를 구출하고 아이안 공작령에서 바로 출발했다고 한들 황궁까지 오기엔 빡빡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귀족 회의까지 참석한 것이다.
“폐하께 꼭 보고드려야 할 내용이 있어 늦장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 급보를 보냈을 때 황후에 관한 증거를 찾았다 했지.”
“예. 다른 이의 손에 전할 수 없어 제가 직접 들고 와야 했습니다.”
체드란은 천천히 일어나 품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그 서류는 체드란의 손에서 시종의 손으로 옮겨지고 곧 황제의 앞에 놓였다.
“대공비를 구하러 갔을 때, 그곳을 지키던 이들은 아이안 소공작의 사주를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만으로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어 아이안 공작가의 저택에 잠입한 결과, 증거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황제 곁에 있던 단제가 다가와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독이 발라져 있지는 않은지, 살수를 숨긴 것은 아닌지 확인한 뒤에야 황제에게 건네었다.
서류 봉투 속에 있던 것은 황후가 보낸 서신들이었다.
“황후와 아이안 공작가의 반란 증거들이 담겨 있는 서신입니다. 황후는 요반나와 내통한 것이 맞으며 아이안 공작가가 그것을 도왔습니다.”
회의장이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정말이라면 시간을 끌 필요도 없는, 긴급 체포가 가능한 증거였다.
그러나 반란이라는 화두는 황후가 끌려가는 선에서 끝날 리 없는 사안이다. 황후에게 줄을 댄 귀족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목소리를 내었다.
“그, 그것은 조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황후 마마의 필체와 대조를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짜 황후 마마의 서신인지 조사를 해 봐야 합니다!”
“아이안 공작가에서 만든 함정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상대가 황제라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큰 목소리를 내었다. 평소였다면 제 명을 재촉하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라 지양해 왔으나 지금은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노여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눈치 빠른 데테로아가 의자 손잡이를 쾅, 내리쳤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까? 다들 정숙하십시오.”
이 말이 황제의 입에서 나왔다면 분위기는 더 살벌해졌을 게 뻔했다. 데테로아가 자신들의 목숨을 구제해 줬다는 걸 아는지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좌중을 둘러보며 체드란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황후가 보냈던 서신은 모두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종이입니다. 워낙 고가품이기도 하고 황실 외엔 납품받는 곳이 없으니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나중을 대비해 황후가 필체를 바꿔 서신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대조하는 것보단 조사를 해 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체드란의 말에는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미 증거도 제출되었으며 다른 핑계로 우겨 보기엔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반란은 즉각 처형과 같은 말이었다. 의심 많고 욕심 많은 황제가 지금껏 황후를 살려 둔 것만 해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단제 마호세르디 경.”
서신들을 살펴보던 황제의 부름에 단제는 즉각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를 지금 당장 황궁 감옥에 가두고 관련된 모든 자의 심문을 시작하라.”
“예. 받들겠나이다.”
단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근위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를 호위할 기사들이 자리를 채우고 나서야 단제는 회의장 문을 향해 걸었다.
체드란을 지나치는 그 순간, 황제가 단제를 멈춰 세웠다.
“단제 경.”
“예.”
“짐이 관련된 이들을 모두 심문하라고 명했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다들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데 하나둘 황제의 시선이 닿은 곳을 알아차렸다. 황제는 황후에게 줄을 댔던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 가는 귀족들을 향해 단제가 입을 열었다.
“근위대는 이들을 모두 포박하라.”
회의장 밖에서 대기하던 근위대들이 우르르 들어와 귀족들을 붙잡았다.
“폐, 폐하! 저희는 황후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그저 확인되지 않은 사안을 판단하기에 한쪽으로 치우쳐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목에 피가 터져라 소리 치는 귀족들과 그런 이들을 바라보는 다른 귀족들. 서로 다른 입장임에도 얼굴빛이 안 좋은 것은 같았다.
“지금부터….”
황제가 한쪽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황후가 반란에 가담한 일에 대해 증거를 내거나 증언을 하는 자는 죄를 감형해 주겠다.”
황제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고발하는 아수라장을 모두의 눈앞에서 연 것이다.
여러 입에서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제, 제나스 남작과 황후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의 대화 중 페렌츠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저자야말로 황후에게 좋은 것을 받았다며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근위대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바닥에 매달렸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지만 결국 모두 끌려갔다.
회의장에 적막만이 남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끝내도록 한다.”
황제가 일어서 발걸음을 떼자 모든 이들이 일어나 고개를 조아렸다. 회의장 곳곳에는 빈자리들이 즐비했다.
“아, 그래.”
회의장 앞에서 고개 숙이고 있던 체드란을 향해 황제가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들어 활약이 돋보이는구나. 심경의 변화가 있었느냐?”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진 후에야 체드란은 고개를 들었다.
남은 이들 사이로 묘한 기류가 흘렀다. 선뜻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마호세르디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귀족들은 하나둘씩 돌아갈 채비를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 딸아이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군요.”
공작이 다가와 말을 건네자 데테로아가 체드란의 어깨를 붙잡았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십시오. 형님, 아니 대공께서 오셨으니 지엘라 누님도 돌아오셨겠군요. 그간 이야기나 들을까 합니다.”
공작과 체드란, 데테로아는 몸을 돌려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뒤로 웅성대는 귀족들의 말이 따라붙었으나 세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황후가 가만히 물러나 준다면 참 좋겠습니다.”
데테로아의 바람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체드란과 공작 역시 그러길 바랐다.
*
“마마…!”
황궁에 체드란이 도착하기 전부터 몇몇 이들은 발 빠르게 준비 중이었다.
황후도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패물이나 금화를 챙겨 넣었다. 아이안 소공작이 급히 보낸 서신만 아니었더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동안 오고 간 서신들을 분명 불태우라 말했거늘 보관하고 있던 것도 어이가 없는데 거기다 체드란에게 빼앗기기까지 했다니…!
황후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고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당분간 몸을 숨기신 뒤 추이를 보고 계십시오. 정 안 되겠다 싶으시면 제가 제스라 왕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후일을 도모하자며 말하고는 있으나 시녀들도 가능성이 작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황후궁을 빠져나온 황후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마차에 올랐다. 뒤따라 시녀들이 올라타자 지체할 틈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바퀴 소리 뒤로 울렸다.
“바로 은신처로 향하겠습니다.”
파르로시와 에스토를 위해 마련해 둔 곳이지만 정작 황후 본인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젠장…!”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로 한 번도 쓴 적이 없던 저속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무엇 하나 그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창문 가림막 사이로 시녀 하나가 점점 멀어져 가는 궁을 바라보았다.
소란을 틈 타 나와서인지 그들을 막는 근위대가 없었다. 이상할 만큼 평온한 도주였으나 그것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려 은신처에 점차 가까워졌다.
*
황제는 자리에 앉아 잔을 기울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그의 앞에는 술병이 늘어져 있었다. 작은 핑거푸드들도 놓여 있었으나 손을 댄 흔적은 없었다.
“폐하.”
자리를 비웠던 단제가 돌아와 말을 걸었다.
“황후가 황궁을 빠져나갔습니다. 전에 마련해 두었던 은신처로 가는 것 같습니다.”
“준비해 뒀던 것은?”
“습격 또한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호위 기사 하나와 황후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모조리 처리할 예정입니다.”
“금품 하나 가져가지 못하도록 해라.”
황제가 따로 명한 것은 도주하는 황후를 습격하라는 것이었다. 손발이 될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황후가 고립되도록 만들라 주문했다. 금품 하나 챙기지 못한다면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한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파르로시 황녀와 에스토 시론이 그곳으로 움직이는 중인 것 같습니다.”
“황도로 불러들였군.”
“아이안 소공작이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처음엔 재판을 위해 불러들인 것이었다고 합니다. 소공작에게 증거들이 있다는 걸 몰랐을 테고, 그걸 체드란 대공이 가져올지도 몰랐을 테니까요.”
파르로시와 에스토가 있다고 한들 황후가 이길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다만 반란군 기지에 있었던 파르로시가 어떻게 증언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바뀔 수도 있으니 기대를 걸었던 듯했다. 황후의 생각이 손에 잡힐 듯 빤히 보였다.
“에스토 시론을 꽤 믿고 있는 모양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에스토가 황후에게 무엇을 보여 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점에 넘어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황후는 고통받는 이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런 행동들을 보다 보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바테니 살라만, 맞지 않는 너무 높은 자리에 올려서 그랬을까…. 주제를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살라만가의 사생아, 학대받고 자란 표독스러운 여자, 가리지 않고 남자를 만나 온갖 소문이 돌던 그런 여자.
황제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했다. 하찮은 이를 황후 자리에 앉혀 이런 귀찮은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이왕이면 황후가 늦게 잡혔으면 좋겠군. 이제야 본인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지 않은가.”
가진 것 하나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원래의 위치. 황제가 보기엔 그녀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단제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지켜보기만 하라고 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