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6)화 (136/220)

135화

이야기를 끝내고 나오던 체드란은 1층에서 단제와 마주쳤다. 바로 옆에는 공작도 있어 인사를 안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폐하의 명을 수행하러 가는 길인가 보구나.”

어색한 체드란 대신 공작이 제 아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말씀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됐다. 듣고자 물은 것도 아니다.”

부자 사이에 간단한 인사가 오가는 사이 체드란은 단제를 훑어보았다. 늘 황제의 옆에 있기에 가끔 보는 얼굴이지만 신경이 온통 황제에게 집중되어 자세히 볼 기회는 없었다.

왕년의 공작을 떠올릴 만큼 차가운 눈매와 나엘라와 닮은 얼굴, 마호세르디 사람이라면 모두 갖고 있다는 보라색 눈동자와 검은 머리, 적당한 체구와 키까지.

검술의 천재라고 알려진 실력이 가장 궁금했지만 그가 황실근위대인 이상, 그리고 나엘라의 가족인 이상 겨뤄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여기는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전하시다.”

“이렇게 따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단제 마호세르디라고 합니다.”

체드란도 단제의 인사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군. 체드란 노헤스카네.”

간단히 악수하자 단단한 그의 손과 손바닥의 굳은살이 느껴졌다. 천재라고 불리는 것엔 노력도 함께 포함된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습니다.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근위단장이기에 단제는 유력 귀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곳은 황제의 눈, 귀가 사방에 널린 본궁이었다. 속속들이 황제에게 보고되고 있을 터다.

단제는 황제를 위해 권력도, 마호세르디 후계권도 포기한 채 결혼조차 작위가 낮은 여인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근위대의 모든 이들이 그러한 수순을 밟는다. 황제의 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었다.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을 생각 없네. 그만 가 보게나.”

고개를 숙여 공작에게 인사를 건넨 단제가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 뒤를 따라 걸음을 멈춰 섰던 두 사람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공작을 잠시 바라본 체드란은 지나가는 말로 툭 뱉었다.

“힘드시겠습니다. 자식과 오래 얘기할 수도 없으니.”

“전부 제 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힘든 것은 단제일 겁니다.”

마호세르디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제였다. 공작이 자식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허덕일 때 단제는 저 때문에 마호세르디가 아무것도 못 한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좋은 이야기만 하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바로 돌아가십니까?”

오늘은 드디어 나엘라와 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어서 체드란은 조금 기대가 되었다.

“꽃을 사 갈까 합니다.”

“꽃이요?”

“오늘은 고백다운 고백을 해 볼까 해서요.”

“이제는 진짜 사위가 되겠군요.”

공작이 조용하게 ‘이혼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네요…’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으나 체드란은 그저 웃고 말았다.

오늘은 어떤 꽃을 사 가야 할지 그 고민이 먼저였다.

*

나엘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민을 이어 나갔다.

“아무래도 너무 과하지 않게 송아지 요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대공 전하께서는 딱히 가리는 음식이 없으셨으니 괜찮으실 거예요.”

이들은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방장이 오늘 힘 좀 써 보겠다 했으니 메인 요리만 고르면 바로 조리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의미 있는 저녁이 됐으면 좋겠는데.”

오늘은 체드란과 깊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며칠 뒤 대공령에 내려가야 하는 체드란이기에 그동안 나엘라가 생각했던 것들, 황제를 상대할 방법들까지 속 시원하게 얘기해 볼 생각이다.

그래야 체드란도 너무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사피오와 같이 식사하실 건가요?”

사피오는 아까 잠깐 보고 왔다. 대공령 생활이 고됐는지 얼굴이 까칠해져 있었지만 총명해 보이는 눈빛은 여전했다.

“아니. 체드란이 내려가기 전에 한번 다 같이 식사는 해야겠지만 오늘은 둘이 먹을래.”

“알겠습니다.”

체드란이 황후를 끌어내릴 증거를 넘기고 올 테니 나름 뜻깊은 날이었다. 전쟁 시기로 따지면 마지막 적을 앞두고 전우들과 뜻을 모으는 셈이고, 연애로 따지자면….

“잠시 떨어져 있기 전 불타는 애정을 나누는 건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주변이 적막에 휩싸였다는 걸 깨달았다. 곁에 있던 이들은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척하느라 나엘라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엘라도 부끄러움이 밀려들었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어쨌든 오늘 메인은 송아지 고기로 하자. 주방장에게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솜씨 좋은 주방장이니 알아서 잘 요리해 내어 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뭘 준비해야 하지?”

이왕이면 자그마한 선물도 하나 준비하고 싶었다.

“꽃은 어떠세요?”

“꽃?”

“네. 저번에 대공 전하께서 꽃과 잘 어울린다고 하셨고, 나엘라 님도 꽃을 받았으니 그 화답으로요.”

“꽃이라….”

“아니면 검? 검 모양 장신구?”

“음….”

나엘라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저번에 체인 장식을 선물했을 때도 느꼈다. 주변 사람에게 추천받는 것이 나을 만큼 감각이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런데 검이나 장신구는 시간이 촉박하지 않아? 체드란이 언제 온다고 했지?”

아까 아버지와 데테로아, 셋이서 차를 한잔하고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늦더라도 저녁 식사 전에는 올 것이다. 당장 장신구 상인이나 대장장이를 불러 선물을 제작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어쩔 수 없이 꽃이나 준비해야겠네.”

“혹시 모르니 당장 들어올 수 있는 장신구 상인을 알아볼게요.”

“응. 체드란에게 선물할 만한 것들로 알아보라 해.”

일단 일차적으로 장신구 상인이 골라 올 테니 그의 안목을 기대해 봐야 할 듯싶었다. 저번처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한 있는 대로 준비하는 것이 좋았다.

곧이어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 식사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기 시작했다.

“체드란이 선물했던 목걸이를 갖다줘.”

의미가 있는 날이니 그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를 하고 싶었다. 앞으로 바쁘게 움직일 테니 오늘 이후 함께하는 시간이 언제 생길지 몰랐다.

게다가 어쨌든 체드란에게 고백받고 제대로 맞는 식사 시간이 아닌가. 감회가 남다른 것도 당연했다.

그때 장신구 상인을 찾아 나갔던 가린이 굳은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행동을 멈추었다.

나엘라가 시선을 보내자 가린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잠시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가 봐야 할 것 같다니? 누가 찾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프리야가 찾아왔습니다. 보통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설렘이 가득하던 공간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은 나엘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야.”

“기사단 숙소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나엘라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저택에 들어왔으나 제대로 방문한 것도 아니고 기사단 숙소에 몸을 숨기다니.

그녀의 정체가 알려져서도 안 되지만 접선했다는 티를 드러내서도 안 되는 일인 것 같았다.

나엘라는 단숨에 건물을 빠져나와 옆에 붙어있는 숙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몇 기사들이 알은체를 하며 인사를 건네오기에 나엘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벼운 답만 전했다.

숙소 앞에 있던 기사들은 별일 아닌 것처럼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나엘라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길을 비켰다.

그중엔 대공령에 있어야 하는 기사들도 보였다. 아무래도 프리야를 따라서 온 것이리라.

기사단 숙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익은 기사가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2층 다롱 부단장님의 집무실에 있습니다.”

1층은 식당과 휴게실, 2층은 무기고와 다롱이 지내고 그 위는 전부 기사들의 생활 공간이었다.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 기사가 안내하는 대로 집무실에 들어가니 로브를 깊숙이 눌러쓴 여인이 보였다.

집무실에는 그녀뿐이었다. 문이 닫히고서야 후드를 벗은 프리야는 미소 하나 없이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엘라님… 오랜만에 뵈어요….”

“프리야, 황도에는 대체 무슨 일이야.”

절대 올라오지 않을 것처럼 굴던 그녀가 아닌가.

이곳은 프리야에게 좋은 기억 하나 없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저택에서 한눈에 황궁이 보이기도 했다.

“꼭,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 있어서 급하게 올라왔어요.”

“다른 이를 시키면 되지.”

“다른 이들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예요.”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한 모양이었다.

일단은 프리야를 계속 세워 둘 수 없어 소파에 앉혔다. 주인 없는 집무실을 무단으로 차지한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롱이 체드란과 함께 돌아오면, 그때 설명해도 충분할 것이다.

“염색도 꼼꼼히 했고 안경도 색안경으로 바꿨네.”

대공령에 있을 때보다 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프리야는 변장을 한 채였다.

“황도니까요….”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곳까지 온 걸까.

“제가 대공령에 있는 동안 잠시 마호세르디에 다녀왔습니다.”

“마호세르디에?”

“네. 어차피 대공령에 있어 봤자 할 일도 없으니, 거기서 나엘라 님의 짐도 더 챙겨 올 겸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을 좀 만나려고요.”

“그래서…?”

“거기서 친했던 기사들을 만났는데….”

나엘라에게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으려고 움직였을 터다. 첩보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만나 봐야 아무런 이야기도 해 주지 않으니 기사들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다.

프리야는 일전에 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기사들과의 친분은 당연한 일이었고, 첩보 훈련을 받지 않은 기사들에게 쉽게 정보를 얻곤 했다.

함께한 세월이 워낙 길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론 후작님이 돌아가시던 날, 그곳에 있던 한 기사에게요.”

나엘라는 천천히 숨을 가라앉히곤 프리야를 바라보았다.

“시론 후작님은 황제의 명으로 죽었다고 해요.”

거기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전부 알려 주진 않았지만,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가린이나 다른 하녀들과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아 프리야 역시 수도의 사정을 전해 들었다.

“그런데… 에스토 님은 황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황제의 사람이에요.”

“무슨 소리야? 시론 후작님을 죽인 사람 밑에서 에스토가 어떻게 일을 해. 황제가 그걸 또 받아 줬다고?”

아니면 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황제의 밑에서 숨죽이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마호세르디에 복수하기 위해…?

“항상 사람을 쥐고 흔들던 황제의 방식, 그게 문제였어요.”

나엘라의 머릿속이 핑, 흔들리며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