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저녁이었다. 조금 다른 점을 찾자면 요즘 들어 늘어난 다나한과 에스토의 다툼이었다.
“그냥 하겠다고 하게.”
서늘한 다나한의 음성에도 에스토는 완강하기만 했다.
“싫습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확인하라고 하신 경계 구역 말입니다.”
에스토가 서류를 들고 다가가는 와중에도 차가운 얼굴은 여전했다. 벌써 며칠 동안 이런 말다툼을 한 것인지, 에스토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안 할 겁니다.”
“분명 보복이 올 걸세.”
“흔들릴 리가 없잖습니까.”
“그건 자네가 황제를 몰라서 하는 말이지!”
쾅─, 책상을 내리친 주먹이 다나한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에스토도 물러서지 않았다.
“첩자를 하라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것도 황제의 첩자로서 마호세르디를 감시하라니요.”
죽어도 못 할 짓이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첩자를 할 것을 권유했지만 에스토는 단번에 거절했다.
황제가 어떤 자인지는 항상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걸 바친 마호세르디의 정보를 훔치라니.
장차 마호세르디 공작이 될 다나한을 감시하려면 부단장인 자신을 회유하는 게 적절한 방법이라는 걸 알지만 황제의 뜻대로 놀아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음 대의 마호세르디조차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주무르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이지 않나.
“단제 경도 황제의 사람이 되었고, 공작님도 황제의 사람인데 거기다 저까지요? 됐습니다. 나엘라가 알면 제 목을 따러 올 겁니다.”
“적당한 정보만 내어 주면 되네. 그게 뭐 어려운가?”
“황제가 어디 적당한 정보만 달라고 하겠습니까? 시작이 어려운 겁니다.”
“황제의 보복이 무엇일 줄 알고?”
에스토는 제 생각이 짧았나, 고민했다. 은밀하게 전해 받은 황제의 서신을 다나한에게 공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찝찝하다는 생각에 보고했더니 머리가 다 아프다. 이리 말도 안 되게 물고 늘어질 줄이야.
“죄송하지만 이미 거절했습니다.”
에스토는 아무렇지 않게 탁,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인데 이런 쓸모없는 입씨름으로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다고 말하게.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야.”
“단장님….”
에스토는 절로 피곤해지는 미간을 문질렀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내일 있을 가신 회의나 신경 쓰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다나한의 주장만큼 에스토의 고집도 장난이 아닌지라 서로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고분고분 따랐을지도 모르지만 에스토는 한 번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닌 자였다.
그때 누군가 급히 단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에스토…!”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에 다나한조차 입을 벌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정이 다 된 시간인데 마호세르디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형님?”
“당장 시론 후작가로 가야 한다!”
얼마나 급하게 온 것인지 옷조차 모두 흐트러진 단제가 다급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 손에 꼽기에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에스토가 진정시키려 했으나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당장 검과 말을 챙겨 시론 후작가로 향해야 한다. 시론 후작님이 위험해!”
순간적으로 다나한과 에스토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더 말하지 않아도 깨달은 것이다. 에스토의 거절을 빌미로 황제의 보복이 시론 후작에게로 향했다고.
“잠깐, 에스토!”
에스토는 다나한의 부름을 뒤로하고 단장실을 뛰쳐나갔다. 검은 애초에 떨어트려 놓은 적 없으니 마구간으로 가 군마 한 마리만 확보하면 되었다.
마호세르디에서 시론 후작가까지의 가장 빠른 길을 떠올리던 에스토는 강한 힘에 의해 멈춰 세워졌다.
“에스토! 적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다나한 또한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얼굴이었다.
시론 후작 또한 기사였기에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후작을 노리는 적 역시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에스토에겐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일인데 어떻게 이성을 차릴 수 있겠는가.
“가야 합니다.”
“하…. 그럼 일단 먼저 출발하게. 내가 기사단 일부를 데리고 바로 뒤따라 갈 테니.”
말릴 수 없다는 건 다나한도 알고 있었다. 다만 에스토를 혼자 보내면 그도 위험해질지 모른다.
“내가 함께 가겠다.”
어느새 따라온 단제가 옆에 있던 군마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럼 두 사람은 먼저 가세요. 제가 바로 뒤쫓아 가겠습니다.”
다나한이 에스토를 놓아주자 지체는 없었다. 에스토도 군마 위로 뛰어오르며 말을 박찼다.
*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네.”
에스토의 옆에서 달리던 단제가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내게 시론 후작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감시자들 또한 20명 정도가 따라붙었고. 그들은 모두 숙련된 암살자들이네.”
단제가 마호세르디 공작령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것이 다행이었다. 지름길이라며 깊은 산 속을 가로지르다가 실수인 척 그들과 다른 길로 움직였다. 할 수 있는 한에서 시간을 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 길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마호세르디의 지도 정도는 머릿속에 있을 테니까.
“남은 시간이 얼마 정도인 것 같습니까?”
황제의 사람이니 감시자들의 실력 또한 단제가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러나 에스토의 물음에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답을 대신 전해 주었다.
말을 전속력으로 달리며 에스토는 날뛰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는 걸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정말 자신은 황제에 대해 조금도 몰랐던 것이다. 다나한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단제 경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단제는 시론 후작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그 황제가 몰랐을까. 저와 단제가 함께 나타나면 황제는 뭐라고 생각할까.
단제의 배신은 곧 마호세르디의 목줄을 틀어쥐는 것과 같다. 황제는 에스토의 거절이란 결과 하나로 보복과 약점을 쥐는 것까지, 두 가지를 이루려 한 셈이다.
그러니….
“저 혼자 저택에 방문했다가 아버지의 위험을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단제 경께서는 저택으로 들어오지 마시고 밖에 계세요.”
감시자 20명, 그래. 아버지와 함께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티면 다나한이 올 때까지 버텨 볼 수 있다.
단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다나한과 함께 있을 때다. 감시자 20명을 모두 죽인다면 어떻게든 정보를 막고 눈속임해 볼 수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 단제가 힘을 실어 줄 수 있으리라.
“나엘라와 친구 아니랄까 봐 뒷일까지 생각하는 건가.”
에스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이 팔불출들은 머리를 조금 쓰기만 하면 전부 나엘라부터 떠올린다.
“저 혼자서도 버틸 수 있습니다.”
“시론 후작을 죽게 하면 아버지나 나엘라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단제 경께서는 마호세르디를 생각하십시오.”
“시론 후작가도 마호세르디다. 정 안 되면 이참에 황제에게서 도망이라도 쳐 봐야겠군.”
망할 인간들. 이 집안의 사람 중엔 제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단제가 어디 도망갈 사람인가. 그 성격에, 차라리 황제의 앞에 무릎 꿇고 그냥 죽여 달라 할 사람이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강하게 맥박 치고 있었다. 초조함으로 등이 젖어 들었다.
저 멀리서 조금씩 시론 후작가의 저택이 보였다.
*
저택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중앙 현관에 내리자마자 아버지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뛰었다. 가는 길 내내, 이상하게도 적막하기만 했다. 벌써 죽음의 그림자가 내린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이 애석하다는 듯 두툼하게 깔린 양탄자가 발소리를 감춰 주었다.
복도를 돌아 후작의 침실 앞에 선 에스토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어깨를 한 번 누르고 가는 단제의 손이 느껴졌다.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따라왔단 말인가. 그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래도 단제가 있으면 아버지가 살 가능성은 커지기에 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들을 뒤로한 채 문을 열었다. 천천히 열린 문 안쪽을 본 에스토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에스토 시론, 황제 폐하의 전언이다.”
음산하게 깔리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하지만 그보다도 바닥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남자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둘러싼 검은 복면의 남자들과 함께.
“다음번엔 무엇을 잃을지 기대하고 있으라. 나의 서신은 제안이 아닌 명령이었으니.”
조용히 황제의 말을 전하는 감시자들에게는 눈조차 가지 않았다. 에스토는 오로지 바닥에 쓰러진 자만을 바라보았다.
단제가 아까처럼,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어깨를 붙잡았다.
“그대는 문만 막고 있게.”
단제의 허리춤에서 긴 검이 소리 없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감시자들은 그런 단제를 향해 눈을 빛냈다.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드는 것인가.”
“여기 있는 자들이 모두 죽으면 없던 일이 되지 않겠나.”
감시자들 또한 단제의 기세에 맞춰 검을 고쳐 쥐었다. 한 발 한 발 그들에게 다가가는 단제를 보던 에스토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대가 아무리 황실근위대 단장이라고 한들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있다고 보는가.”
단제가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대들은 황제 폐하께서 따로 키우는 자들이니 나와 검을 맞대 본 적이 없지.”
느릿한 걸음이 테라스 근처에서 교묘하게 멈추었다. 문을 에스토가 막고 있으니 단제가 또 다른 도주로를 차단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린 시절부터 검의 천재라 불린들, 그저 공작가의 아이로서 떠받들어진 것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단제가 들고 있던 검 끝이 감시자들 중 한 사람에게 향했다. 도주를 위해 테라스 쪽으로 몸을 틀었던 남자였다.
“나를 꺾으면 황제 폐하께도 인정을 받을 수 있겠군. 그대들이 근위대 단장이 될지도 모르고.”
음지에서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니 나쁜 기회는 아닐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검술의 천재라 불리는 단제를 꺾었다는 명예 또한 포기할 수 없을 터.
다른 곳엔 알리진 못해도 황제에겐 인정을 받을 것이다.
거기까지 계산을 끝낸 듯 감시자 한 명이 땅을 박차며 단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단제는 그를 무시하고 테라스 곁에 있던 자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모든 일엔 우선순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