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8)화 (138/220)

137화

철컹, 마지막까지 서 있던 감시자가 결국 검을 떨어트리곤 무릎을 굽혔다.

천천히 쓰러지는 그를 보며 단제는 묵묵히 서 있었다. 어느새 와 에스토 곁에 선 다나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나한과 다른 기사들 또한 전투가 벌어지던 중간에 도착했지만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괜히 움직여 봤자 단제의 방해만 되기에 테라스와 문 앞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버지….”

에스토는 자신이 언제부터 검을 잡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검에서 흐르는 피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다.

검을 떨어뜨려 빈손이 된 채로 에스토는 난장판이 된 방을 걸었다.

가구 하나 멀쩡한 것 없이 피가 낭자한 방 안에 제일 먼저 쓰러져 있던 남자만 눈에 들어왔다. 가슴과 등을 관통한 커다란 자상 외에도 확인 사살처럼 목의 상처가 보였다.

피가 흐르다 못해 굳어 버린 시체에는 아주 미약한 온기만 남아있었다.

“아버지, 왜… 왜 반항조차 하지 않으셨어요….”

남자의 주변엔 방어흔도, 검도 없었다. 오랜 기사 생활로 침대 머리맡에조차 검이 있거늘 그는 검조차 들지 않은 것이다.

“감시자들은 아마 후작을 협박했을 거다. 처음 들어왔을 때 부상을 입은 자나 싸운 흔적이 없었으니… 후작은 스스로 죽는 것을 선택했겠지.”

단제의 말처럼 정말로 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한 거다. 많은 이들의 스승이었던 후작은 절대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에스토의 목을 졸랐다. 단제의 말이 이명처럼 울렸다.

후작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쥐고 압박을 한 그의 약점이자 협박의 근거.

“저였겠군요. 아버지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 거예요.”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게 원래 감시자의 방식이야.”

감시자의 방식? 아니, 황제의 방식이다.

에스토를 협박해 첩자를 시키려 했으나 거절한 보복으로 하나 있는 핏줄을 죽인다. 시론 후작은 쉬운 자가 아니니 피해 없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에스토로 협박을 한다.

다른 이였다면 에스토로 협박받은들 후작이 죽음을 선택했을 리가 없다. 황제의 감시자들이기에 에스토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다.

“하…!”

눈동자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미 식어 버린 후작의 몸에 손을 올렸지만,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다.

“아윽…. 아버지….”

가슴부터 목까지 콱 막힌 듯 돌이 올려진 것 같았다.

자신의 잘못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거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아…. 아….”

터질 듯이 심장이 뛰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에 피가 몰리며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에스토.”

다나한이 에스토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붙잡았다.

“아버지….”

고장 난 인형을 보는 기분이었다. 에스토에게서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려왔다. 무슨 말을 뱉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후작의 몸에는 오랜 시간 검을 잡은 사람다운 흔적이 가득했다.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몸은 노년의 나이에도 강건했다.

그런 이가 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목숨을 내놓다니.

‘다음번엔 무엇을 잃을지 기대하고 있으라.’

감시자가 했던 황제의 전언이 스쳐 지나갔다.

“하…. 하하….”

제 어깨에 닿은 다나한의 손길을 느낀 순간 에스토는 깨달았다. 제 곁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또다시 아버지처럼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역겨웠고, 미칠 것 같았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데 볼을 타고 무언가 떨어졌다. 눈앞이 벌겠다.

*

장례식에는 왜 검은색 옷만 입을까.

시론 후작 부인이 병으로 죽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었다. 에스토도 그 이유에 대해 함께 고민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검은색에는 여러 뜻이 있었다. 흔히 아는 죽음, 절망이 있었고 다른 뜻을 보자마자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죽음과 절망, 그리고 영원과 신비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화인가.

어린 나이에는 이해할 수 없어 묻어 뒀던 기억이지만 오늘 에스토는 알 것 같았다.

마음에 영원히 있는 것, 그런 뜻도 담겨 있지 않을까. 그대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이다.

에스토는 검은색 장례복을 입은 채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장례식은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도에 있던 공작이 복귀했고, 마호세르디의 수많은 가신들이 참석했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기사들까지 자리를 채웠다.

많은 사람이 모여 웅성이는 가운데, 에스토가 있는 공간만 고요했다.

“에스토.”

아버지의 친우, 마호세르디 공작이 앉아 있던 그를 내려다보았다.

“단제는 황도로 올라갔네.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책임지기로 했어.”

얼핏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단제가 벌인 짓이며, 감시자들은 그의 도주를 돕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것으로 하겠다고.

더불어 에스토는 흉수의 정체를 모르며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고 놓쳐 버린 것으로 황제에게 보고될 예정이었다.

“단제 경께서 배신한 것이 알려지면 마호세르디 전체가 위험해지니까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네.”

공작의 눈동자가 단호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호탕하게 웃으며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매번 웃고 있었다.

“단제가 배신한 것이 알려지면 그대가 위험해질 걸세. 약점이 될 테니.”

왜 매번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공작은 공작부인을 잃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첫째인 단제가 황제의 사람이 되었을 땐 어떤 심정이었나.

“공작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터져서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분노가 가득한데 풀어낼 방법이 없어 괴롭습니다.

“솔직한 바람으로는 지금처럼 다나한의 보좌관이자 검은 방패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있었으면 하네. 그게 자네가 가장 안전한 길일세.”

안전, 그 단어야말로 우스운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안전이라니!

단제조차 저만 아니었으면 시론 후작가에 올 필요도, 누명을 자진해서 뒤집어쓸 필요도 없었다.

“제가 있으면 마호세르디에 압박이 들어올 겁니다.”

“지키라고 있는 것이 주군 아닌가. 그대의 아버지는 지키지 못했으니 그대라도 어떻게든 지켜 내야지.”

그래, 마호세르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기사에게 보호받는 것이 아닌, 주인이 제 사람들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자신도 그런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아들이 되지는 말아야지.

“황제에게 가겠습니다.”

공작의 무거운 얼굴 위로 침통함이 번졌다.

어쩌면 공작은 제 선택을 예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저 보좌관으로, 부단장으로 마호세르디에 남아 달라 한 게 아닐까.

“황제의 사람이 될 겁니다.”

“위험한 길일세.”

“황제의 사람이 되어 사람들을 지키고 복수할 기회를 엿볼 겁니다.”

“나를 보게. 그 길이 어디 쉬운 길인지 아는가.”

오래전 공작이 했던 선택을 이제는 자신이 하게 되었다.

그래도 견딜 것이다. 자신에겐 아직 소중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마호세르디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만들어 주십시오.”

“황제는 의심을 멈추지 않을 걸세. 자네를 계속 의심하고 시험할 거야.”

“공작님께서도, 단제 경, 다나한 단장님 모두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대까지 그 위에 서 있을 필요는 없네.”

에스토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공작은 다나한을 불렀다.

“네가 좀 말려 보아라.”

사태를 짐작한 다나한이 에스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곧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에스토의 선택을 되돌릴 수 없음을.

“아….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에스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엘라에겐 비밀로 해 주십시오. 나엘라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당장 황제를 죽이겠다고 날뛸지 모릅니다.”

에스토의 고개가 점점 아래를 향했다. 반년 전만 해도 웃고 떠들며 평생 이어지리라 믿었었는데. 지금 이 상황이 꿈만 같았다.

두 번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순 없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더 열심히 할 것을.

“제가…. 복수를 하고 정보를 빼내겠습니다. 단제 경께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복수도 위험한 일도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애도는 공작님께서 해 주십시오.”

에스토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이유를 그제야 깨달은 공작은 가라앉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버티던 에스토가 허물어졌다.

*

안절부절못한 채로 에스토의 곁을 맴돌던 시론가의 집사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직 몸도 회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제발 며칠만 더 쉬시고 황도로 올라가십시오.”

집사의 애원에도 에스토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거울에서 멀어졌을 때였다. 뒤에서 그의 옷을 부여잡는 집사의 손길이 느껴졌다.

“왜 두 번 다시 돌아오시지 않을 것처럼 이리 구십니까. 늙은 집사가 정녕 쓰러지는 꼴을 보셔야겠습니까.”

안위를 건 집사의 애원에 결국 에스토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바논.”

아주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옆을 지켰던 집사 바논, 그의 눈에는 에스토가 아직 어리게만 보일 것이다.

“시론가를 부탁하네.”

자신이 없는 동안 늘 지금처럼 잘 관리해 줄 것이라 믿었다. 다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복수를 끝낸 뒤에도 살아 있다면 돌아오리라.

에스토가 인사를 끝낸 후 걸음을 옮기려는데 하녀 하나가 노헤스카에서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노헤스카?”

나엘라인가? 의문을 갖자마자 하녀의 뒤를 따라온 낯선 기사복을 입은 자가 자신은 노헤스카의 기사라고 알리며 기다란 상자를 건넸다.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상자를 받아 든 집사가 허락을 구하곤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투박한 상자 안에는 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고통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어머니를 잃었던 친우가 아버지를 잃은 에스토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에스토의 가장 행복했던 때를 함께한 친우, 그리고 같은 스승 아래 배운 동기.

나엘라에게 이 검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를 리 없다.

다시 살겠다고 결심한 마음 그 자체이자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각오. 더불어 친우의 마음을 보듬는 위로.

“나엘라 너였다면….”

그랬다면 더 좋은 선택과 방법이 있었을까.

“으윽….”

가슴을 움켜쥔 에스토는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두 번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검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버지…! 아아…!”

왜 우리는 잃어야만 하는가.

참아 왔던 오열과 절규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이 터져 버릴 것처럼 용솟음쳤다.

“아악, 황, 제…!”

누구보다 다정했던 아버지이자 스승님을 잃고 자신은 또 일어서야 했다.

그 전에 잠깐은 무너져도 괜찮으리라.

이게 정말 마지막일 테니까.

에스토의 울음소리가 저택을 메아리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