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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39)화 (139/220)

138화

나엘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프리야의 이야기가, 아니 에스토의 길이 나엘라를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혔다.

“지옥을 걷고 있었구나, 에스토.”

조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왜 에스토가 황후에게 자신과 하일모라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는지, 나엘라에게 적의를 불태우지 않는지를.

황제의 숨겨진 패를 물었던 날, 단제 오라버니나 프리야의 어머니인지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 떠올랐다. 그때 아버지는 분명 스스로 원했다고 대답했을 뿐 두 사람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게 에스토였던 거다. 에스토가 황제의 숨겨진 패를 캐기 위해 황제의 말이 된 것이다.

“아이안 공작가에 있었던 이유도 같은 황제의 사람이라서 그랬나….”

황후의 명이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황제의 사람이니 부상을 회복하는데 전념할 수 있었을 터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단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엘라는 멈출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여기저기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왜 따져 보지 않았을까. 조금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을 했더라면….

“나엘라 님….”

주변에 있는 이들의 감정이 전해졌다.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다들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나엘라에게 깊이 상처를 줄 만큼의 이야기라는 걸 모두가 아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

주변 사람들이 어떻든, 나엘라는 핏발 선 눈으로 중얼거렸다.

“황제는 계속 마호세르디를 장악하려 했어. 그러니 에스토에게도 그런 제안을 했을 테고.”

자신의 힘과 마찬가지인 마호세르디조차 황제는 장악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단제를 쥐고 공작을 협박하고, 첩자를 심으려 에스토를 협박했다. 다나한은 후계자로 지정하여 어찌어찌 지켜 냈다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나를 건드리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가장 좋은 약점은 나엘라다. 공작이 가장 아끼는 자식이라 알려져 있고, 거기다 몸도 병약하다고 소문났으니 그보다 더 좋은 약점은 없다.

그런데 황제는 나엘라를 두고 다른 이들을 협박했을지언정 단 한 번도 나엘라를 직접 건든 적은 없었다.

체드란만 보아도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가 하는 일을 막은 적도 없다.

그가 체드란에게만 유하게 굴었다?

늘 사람을 의심하고 보는 황제가?

왜 나는 건들지 않은 거지?

“모르겠어….”

나엘라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생각까지 더듬어 볼 여력이 없었다. 몸속에서 날뛰는 감정을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에스토의 일로 황제에게 분노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가린이 프리야를 이끌었다. 다롱의 책상 아래에 프리야를 숨기고 문을 열자 집사 라르바가 보였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걸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아….”

오늘은 체드란과 저녁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고 했었다.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뭘 할 계획인지를 말이다.

시간이 난다면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그런데 에스토의 일을 알게 된 이상 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해야 할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켰다.

*

나엘라는 체드란의 위치를 듣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감정이 우선인지 생각이 우선인지도 모르겠다. 계속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과 상황을 분석하려는 이성이 부딪쳤다. 생각하다가도 분노하고, 화를 내고 싶다가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식당에 도착했다. 언제나 자신을 기다릴 것처럼 서 있는 남자는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나엘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언제부터 저렇게 다정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자 흰색과 푸른색 꽃들이 섞인 꽃다발이 나엘라의 품으로 옮겨졌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 저번에는 직접 꽃을 전해 주지 못해 이 모습도 못 보지 않았나.”

체드란의 앞에 있으니 알 것 같았다. 나엘라는 이렇게까지 화가 나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잃은 거였다.

평소처럼 검을 쥐고 내키는 대로 휘두르면 조금 가라앉았을까도 생각했지만 아닐 것 같았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것만으로 풀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체드란.”

나엘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요.”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한 체드란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아직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아쉽군.”

오늘 정식으로 고백을 하려 했던 체드란은 정말 아쉬웠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대의 판단을 믿게.”

“날 믿을 수 있어요?”

“언제나.”

나엘라가 금방 물기 찬 눈동자로 입술을 물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제 판단을 못 믿겠어요.”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놓치는 부분이 있다면 다음은 체드란이다. 황제의 생각을 알고 황제보다 앞서 생각하다가 체드란을 잃게 되면 어쩌지.

나엘라의 생각을 황제가 알아차리는 순간 체드란을 노릴 것 같았다. 황제는 누구보다 약한 부분을 잘 꿰뚫어 보니까.

“오늘은 그냥 이야기하면서 밥 먹고 내 생각이나 감정, 그런 것들을 얘기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지 못할 것 같은가 보군.”

“제 친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옥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체드란에게 너무 미안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좋은 시간을 뺏게 되었으니까.

미안한 마음에 나엘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툭 올려졌다.

“약한 모습의 나엘라라….”

손의 움직임을 따라 검은색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관능적이군.”

번쩍 고개 든 나엘라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식사는 건너뛰고 침대부터 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보라색 눈이 커지며 입까지 벌어졌다. 아무래도 앞에서 능글맞은 웃음을 걸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체드란이 아닌 것 같았다.

“지, 지금 나한테 문, 문란한 말을 한 거예요?”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 얘기를 할 때는 언제고.”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죠!”

“뭐가 다르지?”

“그게…!”

그때는 이성적인 생각과 계획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엘라, 사람은 누구나 변하네.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와 같지 않은 것처럼.”

“아….”

“언제나 좋은 쪽으로 변할 수는 없는 거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같은 곳으로 향했으니 축복이라 할지도 모르겠군.”

어쩐지 나엘라는 체드란의 말이 다르게 들렸다.

에스토도 마호세르디도 언제나 변한다고, 늘 좋았던 시간에만 머물 수는 없다고.

“다른 생각 하지 말게.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걸세.”

우리, 아무 감정 없이 서로와 결혼식을 올렸던 그때와 많이 변한 우리.

체드란은 다른 생각 하지 말라고 했지만, 왠지 거기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나엘라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또 다른 생각.”

체드란이 나엘라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체드란.”

“그래. 그대의 앞에 있는 나는 체드란이지.”

“나 믿어 줄 수 있어요?”

“아까와 같은 질문을 하는군. 대답도 아까와 같네. 언제나.”

“고마워요.”

황제를 앞질러 가야 한다면 황제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에스토도 단제 오라버니도 황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방법을.

“계속 다른 생각만 하는군.”

체드란의 고개가 나엘라를 향해 내려왔다.

“이렇게 하면 내 생각만 하려나.”

순간 입술이 포개지고 부드러운 살덩어리가 그사이를 갈랐다. 나엘라가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리기 전에 허리가 붙들리고 둘의 몸이 틈 하나 없이 붙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주변에 있을 하녀들이나 사용인들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앞에는 체드란만 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을 느끼며 나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에게는 너무 벅찬 감정의 연속이었다.

*

잠에서 깬 나엘라는 옆에 누워 있는 체드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녁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해치운 나엘라는 그대로 체드란에 끌려 침실로 향했다. 눈 깜박할 새 잘 준비를 마치고 이어진 것은 식당에서의 연장선이었다.

키스 하나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무엇일까.

장소도 침대 위이다 보니 나엘라는 그 이상까지 생각했으나 키스가 끝난 뒤 체드란은 그저 웃기만 했다. 여러 번의 격정적인 키스, 부드러운 키스를 마치고 난 뒤 끌어안고 눕는 것이 다였다.

‘오늘은 그냥 자게. 눈을 뜨면 또 키스를 바란다고 생각하겠네.’

저도 모르게 한두 번 눈을 떴을 땐 정말 키스를 바랐던 것처럼 체드란에게 매달리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또 볼이 화끈거려와 나엘라는 고개를 돌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억지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잠들지 못할 것 같았는데,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옆에 누워 있는 체드란 역시 숨소리가 일정하다는 걸 확인하고는 천천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체드란이 날 믿는다고 그랬으니까, 그러니 괜찮을 거다.

얇은 가운을 입고 침실을 나온 나엘라는 걸음을 옮겼다. 아직 자정 전이라 꽤 많은 이들이 깨어 있을 시간이었다.

조용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움직인 나엘라는 어느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누구십니까.”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을 보니 방의 주인은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날세.”

“대공비 전하?”

얼른 방문이 열렸다. 안에는 놀란 듯한 표정의 집사 라르바가 눈을 깜박였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 없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나엘라는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느리게, 하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 비밀리에 알현을 청해 주게.”

“예?”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 바로 연락을 넣어 주면 고맙겠군.”

라르바가 황제의 사람이란 건 저번에 조사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정하게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는 걸 확인한 이후 확신했다. 그가 황제의 감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라르바는 두 손을 모으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황제 폐하께서 날 기다리신 게 아니라는 말인가?”

구태여 어떻게 라르바의 정체를 알았는지까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라르바가 황제의 사람일지언정 제가 윗사람임을 주지시킬 생각이었다.

“대공비 전하….”

“알아서 전해 줄 것이라 믿겠네.”

나엘라는 그대로 등을 돌려 나갔다.

그 거침없는 태도에 시치미를 떼는 것은 소용없다 느꼈는지 라르바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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