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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40)화 (140/220)

139화

나엘라는 천천히 정원을 걸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결정과 계략 같은 것들이 과연 보통 이들보다 조금 뛰어난 정도일까.

전쟁에서의 활약만 보아도 제 책략이 먹혔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보통보다는 그 이상일 것이다.

나엘라가 검을 배우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마호세르디의 보안이나 안전을 생각하기 시작한 시기는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그 전부터 생각은 했었지만 공작이 경제나 영지 운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었다.

그래서 나엘라는 온갖 서적을 뒤적거리며 손바닥 두께의 개정안을 만들어 제출했다. 공작에개 통하지 않으면 시론 후작에게, 오라버니와 다른 가신 가문에도 힘을 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들쑤시고 다니자 결국 공작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곤 나엘라의 의견을 받아 주기 시작했다.

그걸 황제가 몰랐을까?

애초에 마호세르디 안의 첩자들을 몰아내고 보안을 강화하기 전부터 나엘라는 두각을 나타냈다. 

검을 배울 적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공작의 말에 책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선호도는 경제학, 물리학, 운영론 등 온갖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황제의 귀에 들어갔어도 진작에 들어갔어야 했다.

검술의 천재라고 소문난 단제를 뺏어 간 황제가 나엘라를 욕심내지 않았을까.

왜 황제는 나엘라를 건들지 않고 가만히 두었을까.

“기다린 거겠지.”

나엘라의 발걸음은 어두운 연못 앞에서 멈추었다. 달빛 외에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어둠이 꼭 제 심정 같았다.

이미 단제를 뺏어 갔으니 나엘라에게까지 손을 뻗으면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검을 내려놓았다.

더군다나 공작부인이 제 목숨을 걸고 구한 소중한 딸이다. 나엘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터다.

그런 각별한 아이를 어떻게 빼내 올 수 있을까.

그러니 황제는 기다린 것이다. 나엘라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와 이것저것 겪어 보고 소중한 사람이 많아질 때까지.

그리고 알아서 제 손에 들어오도록.

마호세르디를 계속 건드린 것은 다른 목적도 있었다. 황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나엘라에게 과시한 것이다.

체드란이 무엇을 하든 허락해 준 것은 나엘라가 벌인 일일 거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행동을 묵인한 모든 일이 황제의 자비라는 걸 깨닫도록.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다.

반란군을 제압할 때 체드란이 요구한 것들을 황제가 왜 쉽게 들어줬는지, 귀족 회의에서 황후를 수사해 달라는 체드란의 말에 바로 수락했는지를 말이다.

라르바는 황제의 사람이다. 그의 행동이 곧 황제의 뜻과 같았다.

그는 나엘라가 하일모라와 친하게 지낼 때 조언을 건넸다. 나엘라와 하일모라의 사이를 몰라서 한 말이겠지만 그는 나엘라가 황후에게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나엘라 님….”

아직 잠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기사단 숙소 중 방 하나에 짐을 푼 프리야가 나엘라에게 다가왔다.

“황제는 알았을 거야. 나라면 황제의 의도를 알아차릴 거라고.”

그러니 스스로 걸어 제 손에 들어오라고.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불안으로 떨리는 프리야의 눈동자가 보였다.

프리야는 지금 그 누구보다 불안할 것이다. 황제를 겪어 봤으니, 어떤 자인지 알 테니까.

“프리야, 네가 황제라면 어떨 것 같아? 나 하나로 황제가 단제 오라버니와 에스토를 놓아줄까?”

나엘라는 거래를 해 보려는 거다. 제가 황제의 손에 투신할 테니 단제와 에스토를 놓아 달라고.

자신이 황제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솔직히 지금도 불안했다. 제 생각이 틀렸을까 봐.

“왜… 왜 그런 선택을 하려고 하세요.”

프리야의 눈동자에 금세 물기가 맺혔다. 황제의 손에 떨어지고 나면 다른 이들이 걷던 지옥을 나엘라가 걸어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황제가 숨겨 둔 패가 있다면 바로 옆에서 내가 직접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숨 쉬는 것조차 생각하고 쉬어야 할 정도로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일 겁니다.”

“다른 사람이 걷는 것보단 나아.”

“체드란 님은요?”

“체드란은 대공령으로 갈 거야.”

“나엘라 님이 그런 선택을 한다면 안 가시려 할 거예요.”

“날 믿는다고 했으니까.”

체드란이 믿겠다고 한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날 믿는다면 가 달라, 그리 말하면 체드란은 배신당한 표정을 지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체드란도 지켜 내야 한다.

“프리야, 넌 체드란과 대공령으로 돌아가.”

“안 갈 겁니다.”

“안 돼. 네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건 없어.”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황제의 사생아라는 건 너무 큰 위험요소였다.

“어머니께 연락을 넣을 거예요.”

“그녀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 없어.”

프리야의 어머니는 황제궁의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이미 프리야를 숨겨 마호세르디로 보내는 것으로 큰 위험을 감수했다.

“왜 어머니가 아직도 시녀장을 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황제의 사생아를 숨기기까지 했는데?”

“프리야….”

“저라는 약점이 있으니까요. 황제는 이왕 놓친 마당에 약점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겠죠. 그럼 제 어머니는 황제를 배신할 수 없으니까요.”

“원래 그런 자니까.”

“제 어머니도 칼날 위를 걷고 계세요.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모두가 위험을 나눠서 짐을 지면 돼요. 나엘라 님 혼자 모든 걸 감당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안 돼. 나 하나면 돼.”

“어차피 이 일이 실패하면 모두가 죽습니다.”

“그리되지 않게 하려고 내가 가겠다는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할까요? 황제도? 대공 전하도? 공작님도? 아뇨. 나엘라 님이 잘못되시면 모두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복수할 거예요.”

나엘라는 입을 닫았다.

제 행동으로 단제와 에스토가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어쩌면 자신이야말로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던 건 아닐까.

특히 체드란은 바로 검을 들고 황실에 쳐들어올 것 같았다.

“차라리 단제 경과 시론 경을 그대로 두세요. 나엘라 님의 사람은 많을수록 좋아요. 제가 어머니한테도 연락드릴게요. 혼자보단 여러 명이 나아요.”

나엘라도 고집이 만만찮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사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공 전하께도 제대로 설명하세요. 아마 많이… 속상하실 거예요.”

나엘라는 아직 뭐가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체드란이 자신의 의견을 따라 주길 바랐다.

그가 위험하지 않았으면 하니까.

황제는 하나를 노려 여러 가지를 얻어 가거나 한 가지에도 여러 수를 놓는 자였다. 아마 나엘라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이지 않을까.

그래서 실패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체드란이 대공령에서 두칸과 싸움에 집중한다면, 나엘라가 황도에서 무엇을 하든 크게 엮이지 않을 거다. 대공비라는 이유로 처벌을 피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으리라.

“적어도 살아 있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나엘라 님을 희생하고 살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게 의미가 있겠지.”

무섭다. 만일 황제에게 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함께 휘말릴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지금처럼 겁이 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이때까지 황제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구나. 제 행동에 다칠 사람들이 무서워서.

“일단 대공 전하와 얘기해 보세요. 제가 나엘라 님을 무슨 수로 이기겠어요.”

“응.”

“제발 대공 전하께서 이기시길 바라야겠네요.”

프리야와 나엘라는 그 뒤에도 어두운 정원을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

“대공령으로 가겠네.”

단번에 나온 대답에 나엘라는 아침을 집어 먹던 포크를 멈췄다.

“어… 진짜요?”

“바라던 것이 아닌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체드란이 이렇게 순순히 가겠다고 답할지 몰랐다.

그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황제에게 가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만일 반대하면 자신을 믿어 달라 애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른 결정이라니.

“나한테 실망했어요?”

“그럴 리가.”

“그럼 위험하다고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할걸세.”

“저랑 떨어져 대공령으로 가는 건데 괜찮아요?”

“안 괜찮네.”

그런데 왜?

차마 나오지 못한 물음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대화가 깊어지면 안 가겠다고 결정을 바꿀까 봐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만 깜빡였다.

“내가 반대하리라 생각했나 보군.”

“그랬죠…?”

“믿겠다고 하지 않았나.”

“믿는 것과 위험한 것은 별개니까요.”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대체 무슨 생각일까. 나엘라가 오히려 궁금해졌다.

“대공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어쨌든 두칸의 일을 정리해야 하니까. 황후에 대한 것도 이제 막 조사를 시작했을 뿐이고.”

체드란은 궁지에 몰린 황후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니 두칸을 확실히 정리해 놔야 한다고.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어떤 건데요?”

“몸풀기라고나 할까.”

“네?”

“진짜 전쟁을 하기 전에 두칸을 상대로 몸을 푸는 거지.”

두칸을 상대로 몸풀기라고? 진짜 전쟁?

체드란의 강한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그는 지금 내전을 시사하고 있다.

두칸을 상대하는 것은 황후가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선수를 치려는 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황제와 황태자의 마찰이 시작되더라도 노헤스카가 내전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리고 내전을 시작하기 전까지 노헤스카의 전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지. 내전이 발발하면 당장 출전할 수 있도록 기사단을 정비해 놓는 셈이잖나.”

“그런 것도 있죠.”

“내전이라고 말하지만, 명분이 없다면 반란이지. 중요한 건 황제의 죄를 찾는 걸세. 그것도 전 백성이 알도록 단시간에 터트려야 하네.”

“하지만 제국의 황권은 그 어디보다 강하죠. 웬만한 일로는 명분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황제를 처벌하기도 쉽지 않지. 황태자에게 확실한 지지와 명분이 있어야 해.”

황제를 제압할 힘까지 있어야 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귀족이 지지를 보냄과 함께 가담을 한다 해도 힘든 일이 될 거다.

황제가 쥐고 있는 약점은 한두 명의 것이 아닐 테니까.

“그런 일은 사실 그대가 아니면 힘들 테지. 알고 있으니 가는 거네.”

나엘라는 어색한 얼굴로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정말 괜찮은 걸까. 자신이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대가 실패할 때를 대비하러 가는 거기도 해.”

“무슨 소리예요?”

“귀족 중에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가장 큰 군사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자네를 처벌하려면 필시 두 가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노헤스카가 커져야 더 많은 눈치를 본다.”

그의 말은 곧 노헤스카를 키우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노헤스카만이 두칸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주변의 군사력을 흡수해 영지를 단단하게 만들면 황제는 나엘라를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다.

“실패하면 노헤스카를 통째로 바쳐서라도 그대 하나는 살려볼 수 있겠지.”

나엘라는 포크를 꽉 쥐었다.

자신은 체드란을 살리려 대공령으로 보내고, 체드란은 나엘라를 살리려 대공령으로 간다.

만일의 실패가 더욱 두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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