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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41)화 (141/220)

140화

나엘라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테이블을 두드렸다. 한쪽 턱을 괴고 종일 움직이지 않는 탓에 다른 이들만 발을 굴렀다.

그런 정적을 라르바가 다가와 깨트렸다.

“황제 폐하의 전언이십니다.”

드디어 답을 가져온 것이다. 기다리던 말이라 나엘라도 손가락 운동을 멈췄다.

“황후를 뒤탈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이요.”

더불어 황후가 현재 있는 장소를 적은 쪽지를 건넸다.

“하. 시험이다, 이건가?”

황제를 만나려면 이 정도는 해결하고 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은 황제에게 지고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대등한 입장에서 상호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닌 황제의 아랫사람으로 말이다.

나엘라는 손가락 사이에 쪽지를 끼고는 뾰로통한 얼굴로 라르바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래 기다리셨으니 말입니다.”

“내가 기다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황제가 언제부터 나엘라를 이용하기 위해 기다렸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라르바는 그게 마치 나엘라의 탓인 것처럼 했던 말을 돌려주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이 고까워 나엘라는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럼 준비하게.”

“예?”

“그대도 나갈 준비를 하라고. 검은 좀 쓰는가?”

황제의 감시자면 제 몫은 하겠지.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굳이 제 하녀들을 데리고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몇 명은 데리고 가야겠지만 뭣하면 라르바를 던져 놓고 도망가야지.

해결만 하면 될 거 아닌가. 황제가 감시자 하나 잃었다고 화낼 좀팽이면 어쩔 수 없고.

저도 집사 하나를 잃는 거였지만 나엘라는 개의치 않았다. 사피오를 집사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상단 운영도 잘했으니 집사도 잘하겠지.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아주 유능한 집사가 있네. 사피오라고, 대공령에서 온 자인데 그대도 봤겠지. 할 일을 알려 주고 시키게.”

라르바의 흔들림 없던 표정이 처음으로 깨졌다. 꽤 고소한 일이라 나엘라는 살짝 미소를 걸었다.

“바로 출발하지. 저녁 전에는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체드란은 톨레로 상단으로 향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전권을 나엘라에게 위임하고 여차할 땐 그녀의 패로 사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저녁은 함께 먹기로 했으니 나엘라도 그 전에는 돌아와야 했다.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라르바는 더 말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이참에 그녀를 감시하고자 동행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황제에게 들어갈 보고가 더 세세해질 테니 나쁜 일은 아니라 판단한 듯했다. 나엘라의 처리 방식을 알아 둘수록 좋을 테니까.

라르바가 방을 나간 후 나엘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체드란이 준 검도 챙겨 가야지.”

그 검을 쥐면 체드란이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적 같은 기분도 드니 이제는 이 검만 들게 될 것 같다.

*

황후는 산발이 된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넘기고는 손톱을 깨물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으나 제대로 바로잡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네놈은 대체 무엇을 하다 들어온 게냐!”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겨우 하나 남은 호위는 황후의 신경질에 얼굴을 굳혔다.

“자질구레한 용병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게 문제였다. 하필 습격 때 귀금속도 하나 챙기지 못하고 몸 하나 빼기도 급급했던 탓에 수중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살아남은 이는 황후와 호위 하나.

하다못해 시녀라도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호위만 남았으니 옷을 갈아입는 등 자질구레한 일을 스스로 해야 했다. 빨래조차 그녀 스스로 해야만 했으니 이런 치욕이 없었다.

평생 치장 하나 스스로 해 본 적 없기에 그녀의 몰골은 점점 추레해졌다. 빗질 안 된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드레스는 죄다 구겨진 데다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해 더러웠다. 황후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놈의 돈, 돈, 돈! 파르로시와 시론 경이 오면 해결될 일이 아니냐!”

그들은 최소한의 금전이라도 쥐고 있을 터. 황궁에서 몸을 빼내던 날 그들도 아이안 공작가에서 출발했으니 하루, 이틀 뒤엔 수도에 도착할 것이다.

그럼 그때 망명을 하거나 다른 가문에 몸을 숨기면 될 터다.

“지금 당장 먹고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럼 살라만가에 가서 돈을 가져오면 되지 않느냐!”

빌려오는 것도 아니고 당연하게 가져오라는 황후가 이때만큼 우스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호위는 꾸역꾸역 참아 내었다. 황후의 행적 조사에 들어간 이상 그녀의 호위였던 자신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적었다. 파르로시와 에스토가 오면 적어도 타국에 망명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참고 있었다.

“살라만가는 지금 자택 억류에 들어갔습니다. 황실 근위대가 모든 접근을 막고 있습니다.”

“뭐? 그, 그럼 톨레로 상단은!”

“아이안 공작령에서 파르로시 황녀님을 도와 대공비를 감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톨레로 상단이란 걸 아직 들키진 않았지만, 혹시 몰라 모든 꼬리를 자른 채 잠적 중입니다.” 

현재 표면상의 상단만 운영 중일 뿐 주요 인물들은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그들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호위는 아마 꼬리를 자르며 황후도 잘라 냈으리라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녀의 히스테리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으니까.

“그럼 시중을 들 시녀나 하녀들이라도 데려와라!”

“그들도 돈이 없으면 데려올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황후 때문에 호위는 머리가 다 아팠다. 지금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는 상태였다.

“일단은 식사부터 하십시오. 아침에 만들어 놓은 스튜는 다 드셨습니까.”

“그 음식 같지도 않은 걸 어떻게 먹으란 말이냐.”

남자는 대꾸하기도 지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주방이라고 할 수도 없는 허름한 공간에 가니 먹긴 먹었는지 쌓여 있는 빈 접시가 보였다.

묵묵히 치우던 호위는 속에서 열불이 날 것 같았다.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밖에 나가서 소리라도 질러야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럼 저녁은 언제 먹으려고?”

“금방 차리겠습니다.”

이런 곳에 와서도 황후는 겸상조차 하지 않았다. 기껏 음식을 해도 황후가 먹고 나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 꼴같잖은 행태를 보며 남자는 황급히 은신처를 빠져나왔다. 이곳에 더 있다간 정말 일이라도 칠 것 같았다.

은신처와 조금 떨어진 산으로 가 맘껏 소리라도 치려는데 순간 강한 힘이 복부를 강타했다.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당해 버린 거다.

일격은 가한 당사자가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진 그 앞에 천천히 몸을 낮췄다.

“이렇게 실력까지 형편없을지는 몰랐는데.”

상대가 여자였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남자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지만 금세 다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종아리를 강하게 걷어 차인 덕분이었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크윽, 누구냐.”

“라르바, 예절 교육부터 해 놔. 황후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티 안 날 곳으로만.”

여자가 물러나자 그제야 주변에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수적으로도 불리한 형세였다.

남자는 지금부터 당할 일이 보통이 아니리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천천히 사라져 가는 황후의 호위를 보고 있던 라르바에게 나엘라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그대에게 알려 줘야 하나?”

“저도 힘을 쓰지 않았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력도 확인할 겸 호위의 예절 교육은 라르바에게 맡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호위의 실력이 너무 변변찮아 그의 실력을 확인하진 못했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던데.”

“그래도 시키는 대로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알려 달라 이건가.

나엘라는 황제에게 무엇을 노출할 건지 고민했다.

처음 호위를 기습할 때 살짝 보여 준 무위는 알려져도 상관없었다. 마호세르디의 보안을 강화하기 전까지 황제가 지속적으로 보고를 받았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중요한 건 앞으로 나엘라가 제 이용가치를 높여 황제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었다.

“호위의 말에 따르면 내일이나 모레, 파르로시 황녀와 에스토 시론이 온다 하지 않았는가.”

몇 번의 몸싸움 끝에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이대론 황후에게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호위는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런 뒤 황후를 잘 감시하면 도움을 주겠다는 나엘라의 제안에 호위는 가타부타 말없이 얌전히 돌아갔다.

“황제 폐하께 아무런 질타받을 일 없이 황후를 깔끔하게 처리할 방법이 있으십니까?”

“사람들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지. 더불어 동정심까지 살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자극적인 이야기와 동정심 말입니까?”

“파르로시 황녀는 현재 납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주체가 딸을 오랫동안 학대했으며 제 앞길을 위해 과감하게 이용한 황후라 퍼뜨리면 되네. 황제 폐하께선 황후에게 납치된 딸을 걱정하여 아무것도 못 한 것으로 같이 알리면 되겠군.”

그리고 파르로시와 에스토가 도착했을 때 황실근위대가 이곳을 습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았다. 에스토는 황제의 명으로 파르로시를 보호하고 있던 것으로 함께 있던 이유의 명분을 만들어 주면 될 터.

라르바는 아직도 의심되는지 더 물어 왔다.

“황후를 재판에 넘긴다 해도 파르로시 황녀님께서 과연 그렇게 증언하시겠습니까? 파르로시 황녀님의 죄가 밝혀지면 황제 폐하께서 질타를 받게 되실지도 모릅니다.”

“딸을 잘 키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래도 주군이라 이건가. 라르바의 얼굴이 차가워졌지만, 나엘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증언하도록 만들면 그만이네.”

“자신 있으십니까?”

“뭘 그런 질문을 하나. 어떻게든 만들어야지.”

“잔인하십니다.”

나엘라는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챘다. 라르바 역시 알고 있었다. 한평생 학대받으며 이용당하던 파르로시의 인생을 말이다.

그런 파르로시가 자신을 외면했던 아비의 편을 들고 그동안 학대받은 일을 만천하에 밝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잔인하다 평할 법했다.

하지만 나엘라는 파르로시가 해 줄 것 같았다. 라르바에게 말할 순 없지만, 진심으로 얘기한다면 들어줄 것만 같았다.

“제 것을 지키려면 그 정도야 뭐. 파르로시 황녀에게도 아끼는 것 하나는 있지 않겠는가.”

“황녀님께서 아끼는 것이요?”

“체드란 대공 전하 말일세.”

라르바의 표정이 알 수 없게 가라앉았다. 무슨 생각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면 황제와 비슷해 보였을까. 잔인한 일면이 부각되었을까.

처음부터 믿을 리는 없지만 하나씩 해 나가면 된다.

나엘라는 그리 생각하며 저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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