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나엘라의 답을 듣자마자 체드란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옆으로 다가와 나엘라를 쑥 들어 올렸다.
다 큰 성인 여성을 어린아이 들어 올리듯 말에서 가볍게 내려주고는 작은 협박을 곁들였다.
“약속하지 않으면 오늘 집은 못 들어가네.”
나엘라만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들어가지 못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대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 나도 어떻게든 약속을 받아야겠네.”
체드란에겐 누구보다 이 약속이 필요했다. 나엘라가 마지막 순간엔 자신을 떠올려 주기를, 누구보다 제 목숨을 우선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약속하지 않으면 대공령도 가지 않을 걸세.”
“체드란…. 지금 내가 누굴 상대하러 가는 줄 알잖아요. 물론 나도 무조건 살기 위해서 노력할 거예요. 하지만 정말 최악의 상황에선 장담할 수 없어요.”
“행복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소중한 사람들과 말이야. 그 행복에 나와 그대가 함께하는 일상은 없었나?”
물론 있었다. 나엘라에게도 앞으로의 미래가 누구보다 중요했다. 그러니 모두를 위해 황제와 맞서는 것이다.
다만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다. 만에 하나 생길지 모르기에 나엘라는 조심스러웠다.
“한 번쯤은 나만 생각해 줄 때도 된 것 같은데.”
나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체드란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짙은 색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네. 모든 걸 내던질 정도로 내게 연정을 품은 것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나는 체드란을 좋아해요. 이건 다른 문제라고요.”
“날 좋아한다면 약속해 주게. 최악의 상황에는 나만 생각하겠다고.”
누구보다 제 안위를 걱정하는 체드란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져 나엘라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늘 이기기만 했던 자신이 체드란에게 조금씩 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답은 나왔나 보다.
“알겠어요. 제 목숨이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도망, 그리고 이기적으로 굴 것.”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체드란의 팔이 등을 감싸 그녀는 따듯한 품에 안겼다. 넓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나엘라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로….
“어떻게든 황제를 처리하고 대공령으로 돌아가야겠네요.”
“늦으면 내가 데리러 올 거네. 기사단을 이끌고.”
“본격적인 반란이겠네요.”
“그대를 위해서라면 황제의 자리도 마다하지 않지.”
위험한 발언임에도 체드란은 서슴없이 뱉었다.
데테로아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체드란이 주도하는 반란, 그리고 황좌에 앉을 체드란이라. 그렇게까지 할 것 같지는 않지만, 우스갯소리로도 잘 어울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전 황궁에 갇혀 있기 싫어요.”
“다행이군. 데테로아에게 인제 와서 후계권을 주장하기도 민망하니 말이네.”
그런데 이 남자, 황후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정말 반란이라도 일으킬 생각인가?
다른 때라면 모르겠지만 감정의 극을 달리는 체드란을 보고 있자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여러모로 새로운 모습을 자주 보여 준다.
문득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나엘라는 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코앞에 있는 체드란의 얼굴에 잠시 당황했지만 눈을 가늘게 접으며 물었다.
“그런데 왜 자꾸 최악의 상황을 얘기해요? 꼭 내가 질 것처럼?”
“음…. 그냥 걱정이었네.”
“내가 황제에게 못 이길 거라고 생각한 거죠? 당할 거라고?”
대답을 거부하는 건지 체드란은 말을 하는 대신 손을 들어 나엘라의 머리를 눌렀다. 힘을 줘 꾹꾹 누르는 손길에 나엘라의 머리는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안 내리려 버텼지만, 체드란의 힘을 어찌 이길까. 목이 부러지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황궁 비밀 통로를 하나 알려 주지. 황궁 밖으로 통하는 길이네.”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암살자를 상대하다 보면 알게 되네.”
“그런데 황제가 비밀 통로를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리고 움직여야지. 도망칠 때는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잊지 말도록.”
어쨌든 황제도 알고 있는 비밀 통로라는 말이 아닌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게 얼마나 도움된다는 거지?
다시 고개를 번쩍 들려던 나엘라는 커다란 손에 제지당했다. 꾹꾹 누르는 힘으로 단단한 어깨에 얼굴이 뭉개졌지만 체드란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속은 것 하나 없이 속은 느낌은 무엇일까.
이런 건 비밀이라고 말할 필요 없이 알려 주면 될 정보 같았다.
*
다음 날 저녁.
오늘은 호위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황후와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이 의아할 법도 한데 파르로시와 에스토가 오는 날이니 그러겠거니 하고 황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란 말이냐.”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30분에 한 번씩 질문하는 통에 호위는 짜증을 내리눌렀다.
“늦어지신다면 내일 도착하실 겁니다. 정 그렇다면 제가 나가서 확인해 볼까요?”
“어디를 나가서 확인해 본다는 말이냐?”
“마을과 이어진 길에 나가면 방문자를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을 못 찾을지도 모르니 나가 보겠습니다.”
“웃기지 마! 이제 내가 우스운가 보구나. 파르로시와 에스토를 데리러 간 자들이 은신처를 뻔히 알고 있지 않으냐!”
“아…. 저는 몰랐습니다. 그들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황후마마의 호위 중에서도 말단이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이다! 황제에게 뭐라도 받았구나!”
호위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점점 불안에 휩싸여 예민해진 황후는 믿지 않았다.
애초에 황후의 심부름꾼들이나 기사들이 각각 어떤 임무를 받았는지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일이다. 보통은 기사 단장의 지시로 움직이고 기사들끼리 친분이 있을 때나 정보를 나눌 뿐이었다.
앞으로 황후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골치가 아파 와 호위는 결국 사죄를 하며 말싸움을 끝냈다.
“죄송합니다, 황후 마마. 이곳을 지킬 테니 노여움을 푸시지요.”
황후의 서릿발 같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목소리가 호위에게로 향했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견딜 뿐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날 때마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달렸을까, 문밖에서 여러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황후 마마! 황녀님과 시론 경께서 오신 모양입니다!”
호위와 황후에게 각자 다른 의미로 구원과도 같은 이들이 도착한 것이다.
호위가 얼른 뛰어나가 문을 열자, 짙은 로브로 얼굴까지 가린 이들이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훌렁 후드를 젖힌 한 사람이 낯익은 기사 중 하나라 호위는 혈색이 돌았다.
“황녀님과 시론 경입니까?”
호칭 중 무엇이 잘못됐을까. 기사는 잠시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집 안으로 체구가 작은 이가 걸어 들어갔다. 추레한 몰골의 황후를 보고 걸음을 멈춘 그녀가 천천히 후드를 벗었다. 찰랑거리는 적발이 드러났다.
“어마마마….”
“파르로시!”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체 왜 이제야 온 것이냐! 어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황후는 파르로시의 하얗게 질린 얼굴도, 뺨에 붙어 있는 커다란 거즈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만 번들댔다.
“시녀는? 아니, 그건 힘들겠지. 하녀는 얼마나 데려왔느냐? 일단은 가지고 온 금품이 있으면 줘 보아라. 이 지긋지긋한 쓰레기장부터 떠나야겠구나.”
황후는 따뜻한 음식과 고급스러운 재질의 침대가 아른거렸다. 일단은 시중을 받아 몸부터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파르로시? 묻는데 왜 답을 안 하느냐. 금품은 얼마나 가지고 있냐니까.”
파르로시의 눈빛이 얼마나 얼룩져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엔 삶에 대한 짙은 회한과 후회, 허탈함 같은 것들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황후는 몰랐다.
“하나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뭐?”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 서 있던 기사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마치 황후와 호위를 포위하듯이 둘러싼 모양새였다.
“지금… 뭘 하자는 것이냐.”
“황제를 제거하려 하셨죠. 황제를 상대할 명분이 있으셨을 겁니다. 증거 같은 것들, 어디 있나요?”
황후가 여러 세력을 이용해 황제를 치려고 했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분명 그때를 대비한 명분들을 준비해 놨을 터였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파르로시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차갑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황후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둘 사이에 생겨난 그 간격을 파르로시가 아무렇지도 않게 좁혔다.
“아무것도 없으셨습니까?”
“그,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않으냐! 황제는 페트론을 죽였다. 네 오라버니를 죽였단 말이다!”
“그걸 어떻게 증명하시려고요?”
“뭐…?”
파르로시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 생각 없이 황후가 나서진 않았을 테니 분명 무언가는 쥐고 있을 텐데 그게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힐끔, 에스토를 바라보았지만, 후드를 깊이 눌러쓴 그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묻을게요. 정말 아무것도 없으세요?”
정말 아무것도 없다면 더는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파르로시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니까.
파르로시와 다르게 눈동자까지 모두 붉은 황후.
한때는 왜 그 눈을 물려받지 못했는지 생각했었다. 황후와 조금이라도 더 닮았더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물음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그런 태도가 드러났는지 황후의 눈동자에 불이 일었다.
“없다. 마치 날 황제에게 팔아넘길 것처럼 구는구나.”
“아니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럼…?”
로브 속으로 가려져 있던 파르로시의 손이 툭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제가 죽을 때 혼자는 쓸쓸할 것 같아서요. 복수를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갈 거예요.”
“하…! 네년이 정말 미쳤구나.”
황후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분명 그녀의 사람이었던 기사들이 언제 파르로시에게 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네놈들이…!”
“죄송해요, 어마마마.”
그래도 마지막까지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것은 파르로시가 쥔 마지막 끈과도 같았다. 황후로서 죽게 해 주겠다는 배려가 아니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기대와 마음이었다.
파르로시는 에스토에게 배운 대로 검을 붙잡고 황후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