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꺄아아악─!”
찢어질 듯한 외마디 비명 뒤로 파르로시가 달려들었다. 황후는 도망치려 발버둥 쳤지만 며칠 동안 고생한 탓인지 힘 하나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파르로시도 힘이 좋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악물었다. 그간의 쌓인 감정들 때문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버텼다.
어설픈 힘겨루기를 하던 두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황후가 발버둥 치며 사정없이 팔을 휘둘렀지만 파르로시는 목만 보았다.
‘황녀님의 힘으로 장검을 쓰는 건 무리입니다. 단검을 쓰십시오. 하나, 짧은 검으로 갈비뼈를 부수고 심장을 찌르는 건 기술이 없어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목을 찌르세요.’
파르로시는 에스토가 알려 준 것을 잊지 않았다. 부족한 힘으로 황후를 제압하려 들지 않고 휘두르는 대로 맞아 주다 틈을 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단번에, 깊숙이 찌르세요. 그리고 꼭 칼을 뽑아야 합니다.’
촤악─.
단검을 빼냄과 동시에 황후의 목에서 피가 뿌려졌다. 황후가 급히 자신의 목을 막았으나 소용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샌 피가 바닥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네가…. 컥….”
황후는 입에서도 피를 토해 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파르로시는 뺨에 튄 피를 쓰윽 닦아 내었으나 얼굴에 붉게 번질 뿐이었다.
서서히 죽어 가는 황후를 바라보며 파르로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두면 황후는 알아서 죽을 것이다.
“생각보다 쉽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파르로시에게 에스토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단검, 계속 보관하실 게 아니라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증거물은 처리해야 하니까요.”
황후의 피가 잔뜩 묻은 단검.
파르로시는 단검을 바라보고 나서야 자신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억지로 힘을 줘 에스토의 손에 단검을 툭 올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일단 씻으십시오. 이곳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죠.”
처음부터 황후를 죽인 뒤 실종으로 처리하기로 말을 맞춘 상태였다. 고개를 끄덕인 파르로시는 황후에게서 몸을 돌렸다.
“로브를 갈아입고 일단 자리를 옮기시죠. 피 묻은 것은 주십시오. 함께 처리하겠습니다.”
얼굴에도 피가 잔뜩 묻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는 씻을 수 있는 도구가 부족해 보였다. 그의 말대로 일단 다른 여관으로 옮겨 가 씻어야 할 터다.
파르로시가 로브를 벗고 주변 기사에게 넘길 때였다. 갑자기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무도 방문할 일이 없을 이곳에 누군가가 방문한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황후의 호위이자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한곳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안 하던 남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본인은 모른다며 손을 흔들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에스토 옆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뽑자, 에스토가 서서히 문에 다가갔다.
파르로시는 더듬더듬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지금 누가 방문했던 파르로시와 죽은 황후를 발견하는 즉히 소란이 일 게 분명하다.
에스토가 문 옆에 서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모두 긴장한 채 숨을 죽이던 찰나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르로시와 에스토, 두 사람에게 익숙한 여자치고는 조금 낮은 목소리.
“음… 황녀님? 혹시 황후 죽었습니까?”
아무리 쫓기는 황후라지만 입에 올리는 것만도 위험한 사안이나 나엘라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슬쩍 열린 문 사이로 에스토와 눈이 마주친 나엘라는 잠시 당황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저 멀리 서 있던 파르로시를 발견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왔다.
“비명이 들리기에 설마 했는데….”
나엘라의 눈동자는 황후를 향했다가 다시 파르로시에게로 돌아갔다.
“이것 참…. 손 안 대고 코를 풀었다 해야 할지, 일이 이상하게 진행됐다고 해야 할지….”
나엘라는 모두의 시선 속에서도 당당하게 황후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곁에서 몸을 낮추곤 손을 대 맥박을 확인했다.
“라르바를 안 데려온 게 다행이네.”
황후가 죽은 것을 확인한 나엘라는 손수건을 꺼냈다.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는 파르로시와 마주 섰다.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조용히 처리하려던 파르로시는 나엘라의 등장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나엘라를 처리할 순 없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향했다는 걸 알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고 집 밖에 함께 온 누군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 그 전에 잠시만요.”
나엘라는 품에서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꺼낸 뒤 한 남자에게 건넸다.
“수고했네. 밖을 나가면 다른 이들이 있을 걸세. 가린이란 여자에게 도망갈 수 있는 길을 확인하고 떠나게.”
남자는 잠시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주머니를 받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 에스토가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나엘라가 더 빨랐다.
“그냥 보내 줘. 이때까지 황후의 감시를 해 줬어.”
에스토와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엘라를 슬쩍 본 그는 들었던 팔을 내렸다.
남자가 후다닥 빠져나간 문으로 지안이 들어왔다. 곁에 서 있는 에스토와 다른 이들을 둘러본 뒤 문을 닫고는 나엘라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하루 거리까지 도망갔을 때 처리해. 황후를 죽이고 장신구 몇 개 챙겨 도망간 것처럼 꾸며.”
“알겠습니다.”
지안이 황후에게 다가가 끼고 있던 장신구를 빼냈다.
이렇게 고생하는 와중에 장신구 몇 개만 팔았어도 식사라도 제대로 챙겼을 것을. 끝까지 끼고 있던 황후였다.
그 모습을 보던 파르로시는 굳은 얼굴로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 하는 거지?”
“범인으로 잡히면 곤란해서요.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마지막 만남에서 서로를 향해 일말의 존중도 없이 반말하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나엘라는 깍듯한 높임말을 사용했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파르로시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
“황후가 쓰던 방인가?”
구석에 있던 방에 들어오니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곧 부서질 것 같은 침대 위로 어딘지 지저분한 이불과 시트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이불은 흘러내려 바닥과 닿아 있는 상태였고 머리 쪽에 올려진 베개는 하나도 없었다.
여분으로 보이는 잔뜩 구겨진 드레스에서는 나름 빨아 놓으려 했던 듯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나마 이 방에서 제구실할 듯 보이는 건 벽에 붙어 있는 책상뿐이었다.
“은신처로 알고 있었는데 너무 허름한 거 같네.”
아무리 그래도 황후나 다른 이들이 사용하려던 은신처가 아닌가. 이렇게 아무것도 구비되지 않은 상태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황후가 쓸 은신처가 아니었으니까.”
하긴 이렇게 급하게 은신처가 필요해질 거라고 황후가 생각이나 했을까. 동시에 그녀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무려 황녀가 쓸 은신처였는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런 것에 조금 익숙해졌는지 지저분한 침대에 털썩 앉은 파르로시가 물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황녀님께서 황제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황후는 그녀의 호위 기사가 점차 조여 오는 포위망에 겁을 먹고 죽인 뒤 금품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하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호위는 하루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황후의 장신구, 금화 주머니와 함께 발견될 테고 지금 제국의 여론은 황후에게 부정적이었으니까.
“그리고 황녀님께서는 황후의 명에 따라 이곳에 왔으나 죽은 황후를 발견하고 자진해서 황궁으로 돌아온 것으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부탁드리고픈 건 재판에서의 증언입니다. 황후에게 받은 학대와 모욕을 증언해 주세요.”
파르로시의 얼굴이 전에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나엘라를 죽일 듯 강렬한 눈빛과 이불 시트를 꽉 쥔 손이 보였다.
“황후에게 납치된 황녀님이 걱정되어 그간 황제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것으로 공표될 겁니다. 황후에게 황녀님의 목숨으로 협박당한 것처럼요.”
“네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구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파르로시는 금방이라도 나엘라에게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
“황녀님이 갖고 계시는 황제에 대한 생각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좋을 리 없겠죠.”
파르로시가 이를 빠드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저를 도와주신다면 황제에게 복수하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하…! 황제의 오른팔인 마호세르디면서?”
“장담하건대 저희 가문이 황제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일 겁니다.”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마호세르디가 가지고 있는 분노는 만만치 않다는 거다. 황제가 마호세르디를 손에 넣으려 저질러 왔던 추악한 짓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엘라는 천천히 그동안 당했던 일들을 얘기했다. 일단 파르로시를 납득시켜야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을 협상할 수 있었다.
파르로시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는 그녀가 저지른 것만큼의 벌만 받으면 된다. 황후의 죄까지 덮어쓸 필요는 없었다.
그 과정에서 파르로시가 황제에게 복수하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나엘라가 도와줄 수 있었다. 파르로시 또한 나엘라를 조금 도와준다면 말이다.
“황제를 처리할 겁니다. 그걸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파르로시는 이해가 안 되는지 되물었다.
“대체 어떻게 황제를 처리하겠다는 거야?”
“황제의 사람이 될 겁니다. 이건 그 과정이고요.”
“황제의 뒤통수를 치겠다는 거야? 황제가 그렇게 쉬운 사람일 것 같아?”
파르로시는 황궁에서 지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황제는 뱀 같은 사람이다. 덫을 여러 개 놓고 기다리며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것은 가만두지 않았다.
응당 사람이라면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는 데다 누구보다 비열했다.
“황제가 가지고 있는 패들, 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 황제가 쥔 제 약점들도 지키려고 하는 거고요.”
파르로시는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저도 목숨 정도는 걸려는 거죠.”
나엘라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가만 보던 파르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르로시는 나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이유는 체드란 때문이었지만 그냥 그녀 자체로 싫기도 했다. 그녀가 살며 누려 왔던 사람들의 관심, 애정이 모두 싫었다.
“나는 네가 싫어. 솔직히 황제에게 그렇게까지 억울한 일은 없어서 죽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고.”
“황녀님이 당한 모든 일에 황제가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잠시 입술을 물어뜯던 파르로시는 나엘라의 제안을 수락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오라버니를 만나게 해 줘. 그럼 증언이든 뭐든 할 테니까.”
나엘라가 잠시 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체드란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