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뭐 그런 이유로 체드란을 보게 해 달래요.”
“그렇군.”
잠시 고민하던 체드란은 만나겠다고 답했다. 그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이 나왔지만 나엘라는 눈동자만 또르륵 굴렸다.
“지금 당장이요.”
“음?”
“황녀님이 황궁으로 돌아가서 황후가 죽은 걸 보고해야 해요.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 촉박해서 지금 당장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정체 모를 서류를 바리바리 들고 왔던 체드란은 겨우 종이 더미에서 얼굴을 들었다.
“…….”
체드란의 침묵이 이어질수록 나엘라의 표정도 점차 변했다. 멋쩍은 얼굴이었던 나엘라는 점점 당당하게 바뀌었다. 마치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고 뭐하냐는 듯이.
“바쁘다 하니 일단 가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체드란은 기사 하나를 불러 집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옆으로 나엘라가 쫄래쫄래 따라붙었다.
“에스토 시론은 만났나?”
파르로시에 대해서밖에 못 들었지만, 아이안 대공령에 에스토도 머물렀으니 왠지 함께 있을 것 같아 물은 것이었다.
“만났어요.”
“얘기는 좀 했나?”
“아니요. 대화는 안 했어요.”
에스토가 무엇을 감당했는지 알아 버린 지금, 그것을 아는 척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다 그만두고 마호세르디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각오한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에스토에게 돌아가라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그래요. 복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 있으라는 말인데.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군.”
“할 말을 하지 못하니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대화를 안 걸었어요.”
“잘했네. 정리 안 된 말은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지. 결국, 둘 다 상처받을 테니까.”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네요.”
“다 아는 수가 있지.”
“친구 없잖아요.”
순간 체드란이 걸음을 멈추자 나엘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
방 안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프리야를 제니가 억지로 앉혔다.
“그만 진정하고 앉아 있어.”
“너는 나엘라 님 안 따라가도 돼?”
“지안이랑 가린이 따라갔잖아. 거기다 대공 전하까지 가셨는데 뭘. 너나 좀 진정해.”
“몇 년 만에 어머니랑 연락하는 건데 어떻게 진정을 해.”
나엘라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프리야는 본궁에 볼일이 있는 마호세르디 공작을 통해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본궁의 시녀장이라는 어머니의 위치상 연락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직접 보낸 것은 거의 5년 만이었다.
그간은 공작을 통해서만 안부를 물었었으니 당연히 초조할 수밖에.
그때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아래 문틈으로 편지가 쓱 나타났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프리야는 단숨에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요동치는 감정에 따라 제니도 안절부절못했다.
“뭐래? 뭐라고 쓰여 있어?”
프리야는 안부 인사와 이번 일에 대해 적어 편지를 부쳤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도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허튼 생각 하지 말고 대공령으로 돌아가래….”
프리야의 손에서 편지가 꾸깃꾸깃해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관심 가지지 말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라고….”
제니도 암담해지는 기분에 프리야를 끌어안았으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너를 생각해서 그러신 걸 거야.”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여기 있는 것보다 위험한 게 어디 있겠어?”
“몇 년 만의 편지라고. 더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잖아.”
“프리야, 어머니가 너를 어떻게 살렸는지 잊지 마. 왜 아직 시녀장을 하고 계시겠어? 황제가 뭘 약점으로 잡았겠어? 절대 잊지 마.”
황제는 아무것도 없이 충성을 바치는 자보단 약점이 잡힌 자를 더 선호했다. 약점이 잡혀야만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주위에 모든 이들의 목숨줄을 꼭 잡고 휘두르려 하는 것이리라.
“지금은 나쁜 생각 하지 마.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께 물어봐. 그때 제대로 대화해도 늦지 않아.”
제니는 프리야의 어깨를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너무도 보고 싶은 어머니일 테고, 두 사람의 애틋함을 이해하기에 서로의 감정에 대해 오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니 나쁜 생각을 하는 건 뒤로 미루자고, 계속 프리야를 다독였다.
*
체드란은 방문 앞에 서서 턱을 문지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죽음을 각오했던 파르로시가 황후를 죽이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 이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겨우 생각을 정리하고 문을 열자 침대에 가지런히 앉아 있는 파르로시가 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
등 뒤로 문을 닫은 체드란은 아무 데나 놓여 있던 의자를 끌어 파르로시 근처에 놓았다.
“얼굴이 많이 상했군.”
상했다는 말로 표현이 될까.
뺨에 붙은 거즈, 고단함이 보이는 얼굴과 전보다 훨씬 마른 체형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어했음이 느껴졌다.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래. 쉽게 버틸 수 있는 일은 아니었겠지.”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이야기를 선뜻 꺼내지 못하고 미약한 숨소리만 허공에 떠다녔다.
“……오라버니.”
오랜 고심 끝에 나온 파르로시의 목소리에는 흔적처럼 달라붙은 슬픔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어요. 오라버니께서 데테로아를 보는 것과 저를 보는 시선이 아주 달랐다는 거요.”
“데테로아는 네게도 동생이었다.”
“그리고 데테로아에게도 오라버니는 형님이었죠. 제게 오라버니였던 것처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파르로시는 또렷하게 체드란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제게 황실에서 나가 살라고, 어머니를 벗어나라고 처음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을 들었다면 이 순간이 많이 달라졌을까요.”
“후회하는 것이냐.”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차라리 내 원망을 해라.”
“저를 이용했으니까요?”
“……그래.”
파르로시의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 차올라 떨어질 듯 아롱댔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번에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러려고도 해 봤는데 잘 안 돼요. 겨우 이런 일들로도 저는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저보다 훨씬 어렸던 그때의 오라버니가 무엇으로 버텼을지 가늠이 안 된단 말이에요.”
커다란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체드란은 처음 파르로시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죽도록 미웠어요. 그런데 왜 이번 일을 돕겠다 했는지 아세요? 제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데요?”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네가 도와준다고 해서 놀라기도 했고.”
“오라버니가 제게 구원이었던 것처럼 오라버니에게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구원일 것 같아서요.”
파르로시가 점차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도 쏟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라버니를 좋아한다 해 놓고, 정작 오라버니가 어땠을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아이안 공작저에서 나엘라와 함께 있는 체드란을 보며 문득 느꼈다. 왜 나엘라여야만 하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알게 된 것들이었다.
체드란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쉴 곳 하나 없는 그의 삶이 어땠을지.
그런 그에게 나엘라는 어떤 의미였을지.
“그래서 오라버니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돕는 거다. 나엘라가 하고자 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져야 체드란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 테니까. 나엘라의 복수가 곧 체드란의 복수일 테니까.
자신은 황제에게 별 감정이 없지만, 체드란은 아닐 테니까.
“우리가 조금 더 평범한 사이였다면 지금과 달랐겠죠?”
“파르로시….”
그녀를 달래 주려 손을 뻗었던 체드란이 가만 주먹을 쥐었다.
지금 그녀를 토닥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들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 왔다.
“앞으로를 생각해라.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고, 그거 하나만 믿고 달려가야 해.”
“그런 미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런 미래만 믿고 달리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믿고, 그걸 위해 달리는 사람.”
“…나엘라 마호세르디요?”
“나는 남은 인생을 그 사람을 위해 살 거야. 그리고 살다 보면 너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 거다.”
결국, 체드란은 이번에도 나엘라였다. 파르로시는 이해가 되었음에도 그가 또 야속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에게 나엘라가 구원이라면 나엘라 하나만 보일 테니까.
자신이 체드란 하나만 보였던 것처럼.
“증언할게요.”
“고맙다는 말밖에 해 줄 말이 없군.”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모든 일이 끝나면, 황제가 죽고 데테로아가 황제가 된다면 자신은 황실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체드란은 대공령으로 돌아가야 할 테고 황실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될 테니까.
그때쯤이면 황후의 편이었던 자신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터였다.
그래도.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데테로아처럼 아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오랜 고민 끝에 뱉은 말이었는데 체드란은 작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저를 미워하시잖아요. 황후의 딸이니까.”
“나는 너를 미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엘라 마호세르디에게도 이런저런 짓을 했었고….”
“우선 모든 일이 끝나면 나엘라에게 제대로 사과해. 그리고 호칭도 제대로 해야 할 거다. 그녀는 내 아내이자 대공비니까.”
파르로시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너의 새언니다. 엄연히 손윗사람이야. 그녀에게 제대로 사과해야 다시 가족이 될 거다.”
파르로시를 받아 줄지 말지 선택하는 건 나엘라의 마음이겠지만 적어도 사과라도 해야 어느 방향이든 진전이 있을 것이다.
가족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은 거기서부터 피어날 터였다.
“그리고 데테로아한테도, 지엘라에게도 사과해.”
“그건…!”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내가 가족이라면 그들도 가족이야.”
황후를 빼면 파르로시의 세상에선 체드란만이 단 하나의 가족이었다.
그런데 체드란은 데테로아와 지엘라에게 사과함으로써 그녀의 세상에도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할게요….”
이상하게 눈물이 더 쏟아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믿고 달려가라는 말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미래를 상상하고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리고 말을 안 듣는 법도 배워. 황후 말만 듣는 게 버릇이니 너에게 그런 존재가 또 나타난다면 지금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그건….”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단단히 혼날 준비도 해. 나는 데테로아가 잘못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냈다. 그러니 너도 잘못한 만큼 혼나야지.”
“네…. 네, 그럴게요.”
혼낸다는 말이 왜 이리 고마운지, 그 미래가 왜 기다려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파르로시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으려다 결국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웃으며 울었고, 울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