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재판이 시작되기 전, 클루아조는 감옥에서 황실 근위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사람이니 사실 말을 맞추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셨나?”
반역자의 신분으로 갇힌 클루아조지만 죄인보다는 잠시 놀러 온 것처럼 편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를 거론하기엔 문제가 많습니다.”
단제의 답은 재판 때 황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클루아조가 황제의 명으로 황후를 감시하고 첩자 노릇을 했다는 건 비밀에 부치게 되었다. 황제의 명으로 일했을 뿐인데 말이다.
“이러다 사형당하게 생겼군.”
클루아조의 비아냥에도 단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파르로시 황녀는 황후에게 납치당한 것으로 진행할 예정이며 황제 폐하께서는 자식의 생사를 걱정한바, 어쩔 수 없이 묵인했다고 알려지게 될 겁니다.”
“하…!”
누가 짜 놓은 판인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만약 황녀가 그 판에 협력한다면 황제에 대한 평판이 단번에 기울 것이다.
“그래도 무능한 황제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나. 황후 하나 어쩌지 못해서야.”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확신하는 듯한 말에 클루아조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황제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황후에게 휘둘린 셈인데 그런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있는가?”
“사람들은 황후의 악행에 주목할 겁니다. 지금 황제 폐하의 평판은 일을 냉정하게 처리하는 것에 더 가까웠으니 동정심이 생길 만한 일화 하나 정도는 괜찮습니다.”
“냉정한 게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거겠지. 자식들을 죄다 내쫓았는데.”
“말을 가려서 하시지요, 소공작.”
엄중한 경고에도 클루아조는 비웃음만 날릴 뿐이었다. 말없이 가만히 단제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떠오른 사람을 입에 올렸다.
“동생이랑 굉장히 닮았군.”
거울 표면에 금이 가는 것처럼 단제의 표정에도 살짝 금이 갔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가 아이안 공작령에 누구를 데려갔었는지 잊었나 보군.”
“나엘라 말입니까?”
“꽤 많이 닮았어. 간, 쓸개 다 내어 줬는데 내 집까지 싹 털어 가더니 입을 닦은 사람이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하…….”
단제는 자신이 왜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재판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직접 확인차 왔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클루아조의 입을 단속할 겸 재판 때 증언을 확인할 겸 말이다.
하지만 클루아조는 다른 것이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동생이 증거를 모을 때 도움을 주었다면 클루아조도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원했다면 나엘라를 불러오길 요구했을 테지만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을 물려주게.”
감옥 중에서도 일부 이들에게 주어지는 독방, 이곳엔 단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루아조의 요구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단제는 문 앞으로 걸어가 대기하던 이들에게 떨어지라 말했다. 듣는 귀가 없길 바라는 그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더불어 창문에도 신호를 줘 사람들을 떨어트렸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클루아조는 원하는 것을 말했다.
“증언 때 황제 폐하는 거론하지 않겠네.”
“살고 싶다면 당연한 겁니다.”
“그대의 동생 또한.”
나엘라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걸까. 공작가에서 어떤 사고를 친 모양이지만 단제는 개의치 않았다.
“나엘라는 거론해도 상관없습니다. 대비하지 않을 아이가 아니니까요. 설사 아무런 대비가 없다 해도 처세술 하나는 괜찮은 아이니 알아서 빠져나갈 겁니다.”
“믿음이 대단하군.”
“진짜 원하는 걸 말하십시오.”
그녀와 닮았다면 그녀의 생각도 같지 않을까.
클루아조는 나엘라와 닮은 단제에게 걸어 보기로 했다. 가족이라면 그녀가 가려는 길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데이트를 한 번 했으면 좋겠는데.”
쾅─! 단제가 옆에 있던 탁자를 내리치며 불길이 이는 눈으로 클루아조를 쳐다보았다. 상대가 소공작이라고는 하지만 앞에 있는 저도 엄연히 공작가의 장남이었다.
근위대 단장만 아니었어도 똑같은 위치였을 터. 또한 지금은 황제 직속이니 직위를 따진다면 단제가 조금 더 높다 할 수 있었다.
“그 데이트 상대가 제 동생이진 않길 바랍니다.”
“음…. 그럼 어쩔 수 없이 상대는 자네라고 말해야겠군.”
“지금 저랑 데이트하겠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대공비라고 말하면 내가 죽을 것 같은데?”
“제게 데이트 신청을 하셨으니 답을 드리죠. 거절하겠습니다.”
억지로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됐으나 거절당한 클루아조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 장난스러운 태도에 단제의 기세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나엘라와의 데이트도 장난으로 던져 본 것이 틀림없었다.
“남자에게 거절당하는 건 썩 좋은 경험은 아니군.”
“계속 이런 식이면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본론만 얘기하겠네. 자네 동생을 탐내는 게 황제만은 아니란 이야기일세.”
나엘라를 황제가 탐낸다고?
단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바로 옆에서 황제를 지켰지만 한 번도 그런 기세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늦은 밤, 라르바의 말을 전하려 감시자 하나가 찾아왔던 것이 떠올랐다.
황제의 감시자라고 해도 단제가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였다. 라르바도 누군가의 언질이 있었기에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또한 감시자라는 것과 노헤스카 황도 저택의 집사로 있다는 것을.
“표정을 보니 이제 알았나 보군.”
“황제 폐하가….”
“그래. 오래전부터 그대의 동생을 탐냈지. 알지 않은가. 욕심 많은 이라는 걸.”
“그럼… 황제 폐하만 탐내는 게 아니라는 말은 뭡니까.”
“나. 내가 탐내는 중이지.”
클루아조의 말은 단제의 경계심을 키웠다. 무엇 때문에 나엘라를 탐낸다는 건지 그 의도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황제의 감시자를 처음 만들었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나라는 걸.”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마호세르디의 감시자를 누가 관리했을 것 같나? 그대의 동생이 범상치 않다는 걸 누가 가장 먼저 알았을 것 같나?”
클루아조란 이야기였다. 그가 나엘라를 알아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황제가 나엘라를 탐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모두 클루아조 때문에.
단제의 주먹이 꽈악 주먹 쥐었다. 나엘라에 관한 모든 위험이 앞에 있는 자 때문에 시작됐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 눈빛 하지 말게. 내가 아니어도 그대의 동생은 눈에 띄었을 테니.”
“적어도 황제가 탐내진 않았겠죠.”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 의심 많은 황제가 클루아조가 없었다고 한들 감시자를 만들지 않았을까? 마호세르디를 감시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대의 능력을 확인한 건 감시자를 만들기 전이네. 그 전부터 이미 황제의 첩자들은 마호세르디에 있었지.”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래. 덧붙이자면 대공비가 지금껏 자유롭게 살 수 있던 것도 내 덕이란 말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황제 폐하께 내가 고했거든. 당장 그대의 동생을 데려온다면 모든 걸 망칠 거라고. 황제는 바로 대공비를 데려가 교육하고 싶어 했어. 마호세르디와 유대감이 적으면 적을수록 가족에게 애착이 없을 테니까.”
단제는 눈앞의 클루아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연두색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고 같은 색의 눈동자도 장난기를 담은 채 반짝거렸다. 단제와 비슷한 나이지만 어려 보이는 외모 덕에 아직도 인기가 많았다.
아내와 일찍 사별했기에 더더욱.
“나는 그대의 동생에게서 가능성을 봤네. 처음엔 그저 머리 좋은 어린아이 정도였지. 당시에 황제 폐하를 말렸던 건 그대 때문인 것이 컸지. 첫째를 강탈하듯 빼 왔는데 막내까지 건드리면 충신도 배신하는 법 아니겠나.”
“그래서 기다리자고 하셨습니까.”
“그래. 황제의 욕심은 사람도 물건도 가리지 않으니 말이야. 대공비 스스로 황제 폐하께 걸어오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설득했지. 그래야 마호세르디와 척지지 않을 수 있다고.”
단제도 클루아조의 이야기라면 조금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황제의 사람이 됐는지 말이다.
그는 스스로 황제의 사람이 됐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나엘라처럼 여러모로 두각을 보이던 사람이니 어렵지 않았다.
“나라고 대공비가 이리 자라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똑똑하기만 했던 나와 다르게 대공비는 약간 그런 게 있어.”
클루아조의 손가락이 파도를 그리듯이, 또는 점을 찍듯이 움직였다.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황제의 구미를 딱 당기게 하는 그런 거 말이야. 보안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제 편으로 만들고 영지를 강하게 만든다. 이거야말로 황제가 좋아하는 그림이지 않겠나. 황제 폐하의 욕심을 채워 줄 일에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 그들을 이용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데 말이야.”
“나엘라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만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겠지. 황제 폐하를 모르나?”
모든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선 순간 그는 이미 천하를 가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 짓을 하지 않아도 충성을 바쳤을 마호세르디를 의심하고, 황제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아 위협할 수도 없는 자리를 끌어안은 채 다른 이들을 의심한 것이 아닌가.
대체 황제는 어디까지 가져야 만족할 것인가.
“대공비에게 내가 하는 말을 전해 주게.”
“원하시는 것이 그겁니까.”
“그리고 또 하나, 자네의 아내를 설득해 주게.”
단제의 눈빛이 점차 깊어졌다.
하필 그녀를 거론한단 말인가. 그녀와 단제가 어떤 사이인지 뻔히 알면서.
“내가 설득하는 것보단 그래도 부부인 자네가 낫지 않겠나.”
클루아조의 웃음에 단제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