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나엘라가 기대했던 재판은 다소 어이없게 흘러갔다. 클루아조가 입을 열어 황제와의 독대를 청한 것이다.
“황제 폐하께 제가 왜 그래야 했는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황후에게 가담한 것은 맞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황제 폐하께만 드릴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몇몇 이들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평상시에도 능글맞게 웃고 다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클루아조가 또 그다운 일을 벌인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던 황제는 독대를 승낙했다. 곧이어 근위대에게 인도된 클루아조는 황제와 30분에 걸쳐 독대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이들은 재판장 뒤쪽의 문이 열리자 몸을 달싹거렸다.
다시 클루아조가 나타나 죄인석으로 가 섰다. 뒤따라 들어온 다른 시종이 시종장에게 가 소곤거렸고, 시종장은 곧 판결을 내렸다.
“아이안 소공작이 반란에 가담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지만 그가 황제 폐하께 전한 이유, 그리고 요반나에 대한 일급 정보 등을 참작하여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나엘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독대하며 고한 말은 타인에게 알려지지 않을 터다. 거기다 일급 정보라는 말까지 붙었으니 귀족들은 선뜻 항의하려 달려지 못하리라.
이후 처벌에 의문을 품은 귀족들이 따로 황제에게 항의할 순 있겠지만 아마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 또한 일급으로 붙여 버릴 게 뻔했다.
“아이안 공작가의 북부 물류권 전부를 황실에 압수하고 공작가가 가지고 있던 권한들을 모두 박탈하겠습니다. 또한, 아이안 소공작은 아이안 공작가의 후계권을 가질 수 없음을 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클루아조는 앞으로 소공작이 아니게 되는 걸까? 재판장의 혼란 속에서도 클루아조의 알 수 없는 표정은 미동이 없었다.
시종장의 말이 끝나고 황제가 쐐기를 박았다.
“그가 가져온 정보가 보통이 아닌 것도 맞다.”
느긋하게 흘러나온 말에 클루아조가 반란에 가담한 게 맞는지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었다. 사안이 무려 반란인데 처벌의 수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은 무려 가주와 후계권자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가문이 멸족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내가 처벌 수위를 낮춘 것은 나와 같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클루아조의 가족을 두고 그를 협박하는 등 황후는 비열한 짓을 일삼았다. 또한 그 외의 과정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정상 참작하여 처벌을 내렸다.”
이번엔 체드란도 어이가 없었는지 옆에서 헛웃음이 들려왔다.
가족을 가지고 하는 협박이 비열하다는 것을 황제가 알고 있다니 놀라울 일이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들으며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나엘라는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황후만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클루아조의 재판이 끝났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에스토 시론 후작의 재판이 있겠습니다. 죄인 앞으로!”
클루아조가 나가고 에스토가 들어오자 나엘라는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클루아조가 받은 처벌로 에스토의 처벌 방향을 가늠해 보려 했으나 알 수 없게 되었다.
클루아조가 사형을 피해 간 형식을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다. 재판에서 두 번의 독대라니, 그 황제가 허할 리 없다. 그것은 소공작인 클루아조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에스토 시론 후작은 황후의 사람으로서 반란을 이끌고 파르로시 황녀 납치에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죄가 조사 후 밝혀진 것이 아니라 알려져 있다?
에스토의 죄를 읊는 시종장의 말이 묘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상세한 조항들 역시 얘기하는 것마다 죄다 그런 식이었다.
그 이유는 마지막 말에서 나타났다.
“비록 에스토 시론 후작의 재판을 진행하였지만, 이것은 전후 전황을 확인하고 이유에 대해 공표하기 위함이지 실제로 재판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엘라의 시선이 저절로 황제에게로 향했다. 이건 사전에 시종장과 합의를 끝내 둔 것이 틀림없었다.
“에스토 시론 후작은 작위를 이어받고 황제 폐하께 충성을 바친 인물로서 그의 충정은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그가 황후의 곁에 있었다고 하나 그것은 파르로시 황녀님을 걱정하였던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보호하기 위해 간곡히 부탁하였을 뿐입니다.”
결국은 첩자였다는 말이었다. 황제의 패를 하나 드러낸 셈이었지만 어쨌든 첩자라 알리며 그의 가호 아래로 들어간다면 살릴 수 있다.
앞서 클루아조가 황제의 사람이었고, 에스토도 첩자였다고 밝혔다면 여론은 이상한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황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황제는 막지 못했다, 뒤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며 일을 꾸몄다, 황후를 함정에 빠트렸다, 등 부정적인 의혹들을 부정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나엘라가 만들어 놓은 판에 에스토를 살짝 끼얹어 논란이 크게 일지 못하도록 유도했다. 결국, 그는 부성애가 강한 아비로 알려질 것이다.
나엘라의 판을 철저히 이용하여 여러 이득을 보는 꼴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에스토 시론 후작은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재판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요반나 왕족의 재판이 남았으나 그쪽은 협상을 위한 요반나 사신단이 도착하는 대로 다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반란에 대한 것은 모두 마무리된 셈이나 다름없었다.
시종장의 폐정 선언이 끝을 맺자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남은 귀족들끼리 말을 나눴지만, 나엘라는 뒤를 돌았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나엘라.”
자신의 손을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잘하고 올게요.”
“잘하리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그럼 뭐가 걱정이에요?”
“알아도 걱정되는 것은 당연하지.”
푸른 눈동자가 가만히 시선을 맞춰 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도망쳐서 내게 와.”
주위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체드란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에 감기는 그의 손에 고개를 더 숙였으나, 하필 오늘따라 머리를 높게 묶어 얼굴을 가려 주지 못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 언제든.”
부끄러운 짓은 체드란이 하고 있는데 정작 얼굴을 들지 못하겠는 건 저인지.
나엘라는 귀 끝까지 붉어진 채 고개만 끄덕였다.
*
“이쪽으로 오십시오.”
시종이든 하인이든 하녀든.
사용인이라곤 아무리 둘러봐도 없고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정원이었다. 얼마나 굽이굽이 돌아서 가는지 본궁 옆에 이런 정원이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연인의 밀회 장소처럼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돌담길과 그 옆을 따라 핀 꽃들. 마치 미로로 만들어진 숲 같았다.
“여기부턴 내가 안내하지.”
황제를 보좌하던 시종장에게서 다른 이로 안내자가 바뀌었다.
늘 황제의 곁에서 그를 지키는 자.
“오랜만입니다, 오라버니.”
“사고 좀 그만 치거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잔소리가 많다며 한마디 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히 다정한 큰 오라버니이기에 더 그랬다.
“황제 폐하를 만나면….”
입이 마르는지 단제가 침을 삼켰다.
“그 어떤 것도 드러내지 말아라.”
그러기엔 이미 늦지 않았을까.
단제는 자신이 무슨 사고를 치고 이곳에 왔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라버니.”
“듣는 귀가 많다.”
사방에 황제의 사람이 깔려 있다는 얘기구나.
육안으로 봤을 땐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저는 여전히 처음 검을 들었을 때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때처럼 여전히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자 한다. 그 안에는 단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로부터 지키겠는가.
“오라버니도 그러십니까.”
단제는 말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 나엘라가 물은 적이 있다.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검을 드는지 궁금했다.
그때 큰 오라버니는 말했다.
‘내가 맨 처음 검을 들었던 건, 검이 내 손에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 쉬듯 검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을 드는 것이 당연해서 검을 들었다, 라.
그때는 진짜 천재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말의 진위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나엘라는 티 내진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저와 단제의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평생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도.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얼핏 씁쓸한 웃음이 자리 잡았다가 사라졌다. 찰나에 스치곤 사라져 나엘라도 더 물을 수 없었다.
“이쪽으로 쭉 가면 황제 폐하가 계실 거다.”
“오라버니는 같이 안 가세요?”
“난 여기까지다.”
단제가 알려 준 길 끝에는 큰 정자가 하나 있었다. 정자 뒤쪽은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거칠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계곡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무에 가려 풍경이 보이지도 않는데 왜 여기에 정자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 보거라.”
나엘라는 단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정자로 향했다.
한 발자국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정자가 자세히 보였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술상이 차려져 자리했고, 황제가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단둘이 만나는 것은 처음인지라 긴장을 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쉽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 진짜 마주한 적.
나엘라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혔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엘라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앉거라.”
독을 먹어서 목소리가 변했다고 했던가.
쇠를 긁는 것처럼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는 더 긴장하라는 듯 유도하는 것처럼 들렸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보지 않음에도 나엘라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최고의 예를 보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앉았다.
“받거라.”
술병을 드는 황제를 따라 나엘라 또한 앞에 있던 빈 잔을 들어 올렸다. 쪼르륵 술이 채워지고, 곧바로 황제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술에, 혹은 잔에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시겠느냐.”
황제가 미쳤다고 자신의 술잔에 독을 탈까.
대답은 필요 없었다. 행동으로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나엘라는 단숨에 술을 머금은 후 조심스럽게 빈 잔을 내려놓았다.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거침이 없어서 좋구나.”
나엘라는 새삼 우스운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황제를 가만 바라보다 보면 체드란이 누굴 닮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와 닮은 금발의 머리카락, 푸른색 눈동자, 커다란 체격.
다른 것이 있다면 눈매와 황제가 더 나이 들었다는 것뿐.
“이 정자를 왜 만들었는지 아느냐.”
원하는 답이 있을까. 아니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것일까.
당연히 알 수 없는 질문이거늘 물어보는 의도를 나엘라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이 정자 아래에 내 형제들의 목이 묻혀 있다.”
사람의 목이 묻힌 곳 위에 정자를 세웠다는 건가?
악취미라면 이것보다 더한 악취미는 없었다.
“황제 폐하의 형제들께선 모두 참수형을 당하셨으며 시체는 황도 밖에 내다 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내 형제들이라면 이 황궁을 그리워하겠구나 생각했다네. 그래서 황좌는 올라가지 못했어도 황궁은 마음껏 보라고 이곳에 묻었다.”
나엘라는 비틀어 올라가려는 한쪽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이 얼마나 악의가 흘러넘치는 말인가. 그야말로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기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