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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49)화 (149/220)

148화

“하여 속이 시원하셨습니까.”

“거침이 없다 하여 선을 넘지는 말거라.”

황제가 봐주는 선을 조금씩 가늠하며 나엘라는 죄송하다는 말을 건넸다. 분위기를 바꿀 겸 술병을 들어 황제의 잔에 따랐다.

그러고는 제 잔에도 따르자 황제는 자연스럽게 잔을 들었다.

“내 선물은 마음에 들었느냐.”

선물? 황제가 언제 내게 선물을 보냈단 말인가?

“죄송하지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에스토 시론. 그대의 친구가 아닌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해 준 그대를 위해 친히 봐주었거늘.”

에스토가 나엘라의 친구인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일까.

나엘라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분명 보안을 강화하고 첩자를 처리하기 시작한 이후에 에스토와 친해졌다. 그전에는 그저 시론 후작에게 같이 검을 사사받는 정도였다.

황제에게는 정확한 정보가 없을 것이다. 단지 같은 나이에 같이 검을 배웠다는 것으로 떠보는 것일 터.

또 에스토를 재판에서 도와준 건 황제 본인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걸 선물이라고 나엘라에게 시사하다니.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에스토에게도 특별히 봐주었다는 말을 했을 거다. 겸사겸사 에스토의 충성심도 챙기고 나엘라에게 생색도 내고.

사람들을 협박하여 제 뜻대로 조종해 놓고 여러 사람에게 특혜를 베풀 듯 구는 게 역겹기만 했다.

“그와 오래 얼굴을 보았으나 그리 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마호세르디였던 자니 제가 대신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뭉뚱그려 전하는 대답에 황제는 킬킬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곧 주제를 바꿔 버렸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기에 더 얘기하기가 싫어 넘긴 것일까.

“나는 내게 도전하는 자들을 봐주지 않는다. 그것이 황좌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도 말이다.”

마호세르디를 노린 이유일까.

체드란도 같은 이유였을까.

나엘라가 아는 한 그 사람들은 황제에게 도전하는 자가 아니었다.

“물론 싹을 자르는 것도 중요하지. 솜씨 좋은 정원사란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잡초면 뽑으면 그만이고, 자라야 하는 풀이라면 적당히 자란 뒤 모양을 잡아 주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눈에는 마호세르디가 자라나는 싹이었나. 아니면 체드란이?

적어도 삐뚤어 자라는 기세가 보이지 않는 이상 그냥 두어도 되는 싹이었다. 무릇 솜씨 좋은 정원사란 잡초와 꽃을 구별 정도는 하지 않을까.

“정원에 필요 없는 싹이라면 잘라 내야지.”

울컥, 감정이 올라왔지만, 나엘라는 또다시 꾸욱 눌러 삼켰다. 자꾸만 가족들과 체드란이 떠올라 감정이 요동쳤다. 그의 눈에는 그들이 필요 없는 싹이었던 모양이다.

“폐하의 정원엔 어떤 꽃들이 필요하십니까.”

대체 황제는 제국을 어떤 정원으로 가꾸고 싶기에 그 많은 이들을 잘라 냈을까.

하지만 황제는 실수했다. 필요 없다 여겼으면 뽑아냈어야지 자르기만 하니 안 보는 새 자라난 것이 아닌가.

“너무 큰 꽃들은 필요가 없지. 전부 내 발아래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을 정도면 된다. 그들의 처지에 맞게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글쎄.”

황제는 다시 잔을 들고 술을 넘겼다. 그와 속도를 맞춰 나엘라도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런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평온하게 이어지던 말투가 급변했다. 황제가 눈을 빛내며 나엘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마주 앉고서 처음으로 시선이 맞닿았다.

“그 누구도 내게 반기를 들 수 없을 방법을 찾아와라.”

그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나엘라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푸른 눈동자에선 기이한 빛이 흘러나왔다.

정상적인 사람의 시선이 아니었다. 어디 하나 미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뒤틀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진득하게 타고 흐르는 탐욕이 있었다.

하지만 나엘라는 멈출 수 없었다.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황제 폐하의 눈이 되고 귀가 되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귀족들은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황제의 감시자들, 또는 황제가 따로 움직이는 자들의 규모와 범위를 확인받아야 했다.

“그들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말하는 것이다.”

감시자들의 존재는 에스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확신했다. 주요 귀족들에게 모두 붙어 있는지, 아니면 황제가 주시하는 가문에만 들어섰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허나 그것을 물었다간 좋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제게 시간을 주시옵소서.”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역대 황제 중 하나는 써먹었겠지.

“내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귀족들의 권력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게도 벅찬 일이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황제도 첫 만남부터 대뜸 답을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첫걸음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하기 위해 나엘라는 가늠했다.

“그대라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크게 자라면 황제 폐하의 정원에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몸을 낮추는 것일 뿐이라 전했다. 또한, 자신은 보조 정원사조차 아니며 그저 정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꽃 중 하나임을 피력했다.

“처세술이 나쁘지 않구나.”

“황제 폐하의 심기가 어지러우실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입니다.”

“올곧은 마호세르디답지도 않고 말이지.”

방금 그 말은 기분이 나빴다. 나엘라는 어디서나 마호세르디답고 싶었다.

“오래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답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전선으로 가게 될 체드란도 안심하지 않겠느냐.”

지금껏 당했을 다른 이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소중한 사람을 약점으로 잡혀 뇌리에 꽂히는 기분은 속이 뒤틀릴 정도로 더러웠다.

“체드란은 제게 약점이 아닙니다.”

시론 후작을 찾아갔던 감시자들을 단제 혼자서 처리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체드란도 상대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겨우 감시자들 따위에 당할 그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믿어주는 만큼 나엘라도 체드란을 믿었다.

“당돌하군.”

선을 넘었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덧붙이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협박을 이어 갈 생각은 없는지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다면 짧은 대화이거늘 황제는 더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게도 그런 당돌한 아이 하나쯤은 괜찮겠지. 능력이 있다면 말이다.”

황제가 정복 재킷에 넣어 두었던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테이블 위로 병을 내려놓은 황제는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해독제다.”

이런 미친 황제… 무슨 짓을 했을 줄은 알았지만 진짜로 독을 썼을 줄이야. 어쩐지 몸이 조금씩 더워지더라니! 술이 약한 편은 아니기에 그저 긴장했기 때문인 줄 알았건만.

술은 같이 마셨으니 아닐 테고 잔에 독을 발라 놓았나 보다. 나엘라는 병뚜껑을 열어 해독제를 들이켰다.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해독제를 주지 않을 작정이었을까. 아니면 순순히 나오지 않을 시를 대비한 협박용이었을까.

무엇이 되었든 나엘라는 바닥을 치는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황제에게 허리를 숙였다.

“조심해서 들어가시옵소서.”

애초에 술을 준비한 이유도 훤했다. 음식으로 독을 섭취하면 몸의 이상 변화를 쉽게 알아챘을 테니 독한 술로 그것을 감춘 것이다.

독기가 아니라 취기라고 생각하도록.

새삼 사람의 목숨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는지 느껴졌다. 허리를 한껏 숙여 시선 끝에 걸린 제 주먹이 분노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재판이 끝나고 바로 돌아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데테로아의 말에 체드란은 잠시 일이 있을 뿐이라고 전했다. 황제와 만나고 있는 나엘라를 기다리고 있던 차지만 굳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황후의 장례식은 어떻게 한다더냐.”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인데 어디 제대로 장례식이나 치르겠습니까. 살라만 후작은 이미 남은 자식도 없습니다. 재산이나 모든 권한은 진작에 뺏겼고요.”

그래서 재판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시체는 짐승의 먹이로 주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오늘 재판을 참관한 제국민들의 분노가 대단했으니 일반적인 사형으로 끝낼 수 없었으리라.

“장례식은 하지 않으나 살라만가에서 내일 황후의 물건과 초상화를 모두 불태운다고 합니다. 황후의 흔적을 전부 없애려는 것이지요.”

그 정도만 해도 살라만가에선 최선을 다해 고인을 보내주는 셈이었다. 황제의 눈치가 보였을 텐데 묵묵히 진행하는 살라만 후작이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그것이 아니었으면 근위대가 모두 처리했을 터였다.

“파르로시는 내일 참석하여 불태우는 걸 보겠다고 의사를 전해 왔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라 체드란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파르로시는 더 이상 황후에게 그 정도의 애정도 남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제 손으로 모두 불태워 버리겠다는 마음인가.”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애증을 털어 내는 것일 수도 있지요.”

무엇이 되었든 파르로시의 마음 정리에 도움이 된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어두운 이야기를 털어 내려는 듯 데테로아가 다른 주제를 꺼냈다.

“형님은 곧 대공령으로 돌아가시겠군요.”

“사흘 후엔 출발할 것이다.”

“대공비께서는 안 가신다고요?”

“못 가는 거지.”

지금 시기에 둘 다 수도를 비워선 안 된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이유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다. 부탁 하나만 했으면 한다.”

“형님이 제게 부탁이요? 처음 하시는 부탁이네요.”

데테로아에게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었던가 싶어 체드란은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혼자 있을 나엘라를 부탁해도 되겠느냐.”

그녀가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혼자서는 힘에 부칠 것이다. 때로 마음이 지칠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이 곁에 있다면 좋겠지만 한동안 그러지 못할 게 뻔하였다.

대공령은 벌써 두칸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체드란은 나엘라가 걱정이 되어 귀향길을 미루고만 싶었다.

“제가 대공비께 힘이 되겠습니까?”

“나엘라는….”

체드란은 잠시 그녀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걸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애정을 담뿍 담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는 데 큰 힘을 얻는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이 늘어 갈수록 더 강해지지.”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야. 사람에게서 힘을 얻는 사람이니 곁에 있어 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지엘라 누님께도 전해 두겠습니다.”

“지엘라는 이미 알고 있을 거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챙겨 줄 테지.”

그가 떠나기 전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들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나엘라를 부탁하고 그녀의 곁을 지켜 달라 말하는 것.

“부탁한다.”

“예.”

체드란은 나엘라가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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