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실마리 찾기
149화
본궁에서 빠져나오던 나엘라는 때마침 앞에서 기다리던 체드란과 마주쳤다.
“마차에 있겠다면서요?”
황제와 단둘이 있는 게 걱정된다며 기어코 따라오더니 본궁에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잠시 데테로아 좀 보고 왔지. 일단 마차로 가게나.”
자연스럽게 내어 주는 팔을 잡고 마차를 향하니 체드란이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강아지도 아니고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 모습이 웃겼다.
“술 마셨나?”
“한 잔 주길래 들이켰습니다.”
“얼마나 마셨길래 이리 오래 걸렸나.”
사실을 말하자면 술은 별로 안 마셨다. 대화도 길지 않았고.
다만, 독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간에서 독을 해독하느라 술은 해독 못 했는지 자신이 느끼기에도 술 냄새가 났다.
“술을 세숫대야로 주더라고요. 황제가 술친구가 없나 봐요.”
“독이 들어 있지 않았다면 다행이지.”
나엘라는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체드란은 유난히 제 거짓말을 잘 알아채는 편이니 지금 눈을 마주치면 거짓말인 것을 들킬 게 뻔했다.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범인은 황제니 꼭 잡아 주세요.”
잘 넘겼을까? 슬쩍 체드란을 보자 농담에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심한 나엘라는 더 빨리 움직이자며 그를 재촉했다. 나름 비밀스럽게 입궁한 건데 체드란과 있으니 너무 눈에 띄었다.
마차에 올라탄 둘은 바로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차는 금세 황궁을 빠져나가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집에 들어갈 건가?”
“그럼 어디 가요?”
“잠시 어디 좀 들리지.”
미리 언질을 줬었는지 마부는 알아서 집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마차는 점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에 접어들더니 귀족들이 자주 가는 거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달려 있던 노헤스카 문장을 모두 떼어 버린 터라 대공 부부란 것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없었지만 이대로 내리면 시선이 몰릴 터였다.
“뭘 하려고요?”
“쇼핑.”
“쇼핑이요?”
마차는 어느새 커다란 드레스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체드란이 재촉하듯 손을 척 내밀었다. 나엘라는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따라 내렸다.
“들어가지.”
함께 들어간 가게 안에는 점원들이 이미 모두 대기 중이었다. 심지어 직원 외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나엘라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시선으로 연신 물었지만, 체드란은 답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담을 따라 귀빈실로 향한 두 사람은 푹신한 소파에 착석했다. 그와 동시에 앞에 자리한 작은 테이블에는 차와 가벼운 디저트들이 하나둘 놓였다.
“제일 비싸고 제일 고운 것들로.”
“네. 준비해 뒀습니다.”
나엘라에겐 대답도 안 해 줬으면서 저들끼리 얘기하기 바빴다. 무슨 상황인가 가만 지켜보니 나갔던 직원이 기다란 행거를 줄줄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준비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 보다.
“이쪽부터 늦봄용 드레스, 초여름 드레스, 여름 드레스, 늦여름 드레스입니다.”
“늦여름 드레스는 빼게. 그 전에 돌아올 테니.”
누구 마음대로? 아니 그 전에 어떻게?
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입을 드레스를 사 줄 생각인 듯싶었으나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었다. 중간중간 드레스가 필요하다면 자신이 따로 구매해도 그만이었다.
“어울리는 모자, 장갑, 구두까지 모두 들고 오게. 아, 가방도.”
그런 것도 안단 말인가? 이번에는 나엘라의 눈빛을 읽었는지 체드란이 덧붙였다.
“붙어 있다 보면 알게 된다네. 그대의 하녀들이 아침마다 극성이잖나.”
“이 많은 걸 다 언제 입어요?”
“내 생각하면서 입게. 자리를 비운 동안 그대가 무엇을 입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뭘 먹는지 난 알 수 없지 않은가. 적어도 무엇을 입는지는 예상할 수 있게 해 주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많은 옷을 전부?
거절하려던 나엘라는 체드란의 표정을 보고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차라리 무조건 입으라는 듯 강요했다면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이별이 못내 아쉽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신구는 바로 옆 가게에서 보도록 하지.”
아니다,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할 상황 같다.
“혹시 장신구 말고 또 살 거 있어요?”
“다음 드레스 가게를 가야 하지.”
나엘라는 어쩐지 피곤해졌다. 이제 시작이건만 쇼핑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지치는 기분이었다.
“피곤한가?”
제 기분은 또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체드란은 손을 들어 마담을 불렀다.
“그냥 전부 다 주게. 내 아내가 피곤해하는군.”
피곤해지다 못해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장신구 가게에서도 설마 이러진 않겠지. 보석을 몽땅 사는 건 비할 바 없이 과한 사치가 될 테니 그때는 정말 유심히 골라야 할지도 모른다.
“체드란….”
“돈 걱정은 하지 말게. 황태자 전하께서 지급한다 하셨으니.”
황태자가? 데테로아가 내 드레스를 대체 왜?
“그대가 황태자 전하께 결혼 선물을 달라 했었던 것을 기억하나?”
그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와서?
어쨌거나 노헤스카 영지 자금에 문제가 없다면 나엘라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녀도 가만히 손을 들어 마담을 불렀다.
“모자나 기타 물품들도 전부 살게요.”
이 맛에 쇼핑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오늘 가게에 있는 모든 상품을 팔게 생긴 마담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나엘라 역시 미소를 지었다.
곧 청구서를 받을 데테로아는 웃지 못하겠지만.
*
나엘라는 장례식용 모자에 달린 망사를 정돈하여 얼굴을 완벽히 가렸다. 점차 더워지는 날씨에도 살이란 살은 모두 가린 검은 드레스를 입었더니 조금 답답한 감이 있었다.
“아무도 장례식 복장이 아닌데 혼자만 검은 드레스인 거 알아요?”
파르로시의 핀잔에도 나엘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없었다. 누가 감히 반란을 일으킨 황후를 기리며 명복을 빌어 주겠는가.
“왜 존댓말이에요?”
저번에 체드란을 보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의문을 표하고 보니 파르로시도 제게 이리 물은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요.”
억지로 한다는데 더 말해 무엇하리.
“그런데 왜 여기로 불렀어요?”
그녀들의 앞에선 살라만가의 하인들이 황후의 물품들을 태우고 있었다. 매케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 위에 번졌다.
“사람도 없고, 얘기 나누기 좋아 보여서요.”
파르로시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들과 살라만 후작을 빼고는 귀족 하나 보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어떤 간 큰 자가 이곳에 오겠냐마는.
“황제가 이곳에 오는 걸 용케 허락해 줬네요.”
그런 일을 당한 파르로시에게 살라만가의 간소한 장례식 참석을 허락해 줬다는 게 웃겼다.
오면서 보니 호위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도 같았다.
“뭐…. 기대도 안 했어요.”
이제 와서 관심을 보이면 이번엔 자의로 황실을 뛰쳐나올 것 같다며 파르로시가 몸을 떨었다.
나엘라로선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왔다. 제가 황제였다면 바로 어제가 재판이었으니 보여 주기식으로라도 며칠간 파르로시를 싸고돌았을 텐데.
“그나저나 살라만 후작은 참….”
나엘라는 황제도 황제지만 살라만 후작을 보고서도 할 말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다리를 달달 떨어 대던 후작은 곧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그러고는 하인들이 물품 처리하는 걸 직접 지휘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더 빨리 태워라! 대체 뭣들 하는 것이냐! 바테니가 썼던 물건이라면 침대나 커튼 하나까지 모두 태워!”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그래도 본인의 딸이었는데.
하인들의 행동이 느린 것도 이해는 됐다.
살라만가가 조사받기 시작하며 꽤 많은 사용인이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시간이 지나 조사가 끝났으나 대부분이 그길로 도망가 버렸다.
누가 살라만가에 남아 있고 싶겠는가.
그나마 몇 남지 않은 이들은 갈 곳이 없거나 희미한 의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대단하죠. 원래 이런 사람들이에요.”
파르로시의 한쪽 입가가 비틀게 올라갔다.
“바로아 이모님이라고 다르지 않았어요.”
“살라만 후작 부인이요?”
“처음엔 기세등등하게 찾아와 거래하자고 하더군요. 어마마마가 무서워서 제국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던 분이.”
살라만 부인은 멍청하게도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파르로시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황후를 업신여기는 눈빛을 한 채 친히 도와주겠다는 표현을 썼단다.
그렇게 굴었으니 황후가 마지막까지 그녀를 괴롭히다 죽인 것도 이해는 됐다.
“누울 자리는 보고 뻗으란 말이 있죠.”
나엘라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다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살라만 후작의 말년도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의 두 딸처럼.
“그런 교양 없는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황녀님이 이제 와서 제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파르로시가 제게 교양을 찾다니, 놀랠 노자다.
“그런데 정말 왜 불렀어요?”
살라만가의 콩가루 같은 면모나 구경하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고, 따로 목적이 있을 것 같았다.
“뭐 좀… 궁금한 게 있어서요.”
나엘라는 망사포로 얼굴을 둘러싼 채지만, 파르로시는 맨얼굴이어서 조금 붉어진 것이 훤히 보였다.
대체 뭘 물어보려고 부끄러워하나 알 수 없었다. 그것도 나엘라에게 말이다.
“사과…하는 법 좀….”
“사과요? 미안할 때 하는 그 사과?”
“그래요….”
세상에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싶다가도 어쩐지 파르로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과연 사과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을까.
“그냥 하는 사과는 알아요. 그 정도도 모르지 않는다고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대로 하는 사과를 말하는 거예요.”
“누구에게 하려고요?”
“그것도 말해야 해요?”
“안다면 더 도움이 되겠죠?”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던 파르로시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지엘라… 언니랑 데테로아에….”
지엘라와 데테로아에게? 파르로시가?
나엘라가 얼마나 빠르게 고개를 돌렸으면 망사포가 다 펄럭였다. 세상이 개벽한 것은 아닌지 잠시 하늘도 바라보았다.
“왜요?”
“사과하는데 이유까지 말해야 해요?”
“그건 아니지만….”
사람이 너무 갑자기 변해도 문제인 법이다. 혹시 파르로시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것은 아닐까?
“그냥 좀 알려 줘요!”
얼굴이 가려져 있어도 표정이 매우 이상하다는 걸 알았는지 파르로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겠어요.”
조금 더 뜸들였다간 옛날 성격 나올까 걱정이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어떤 반성을 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돼요.”
나엘라의 말에 파르로시가 금세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듯 입술은 계속 움직이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흠흠.”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전투에 나가는 장군처럼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너무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때는 그냥 미웠어요. 엄청나게 반성했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미안해요, 대공비.”
이런 성의 없는 사과가 어디 있을까. 거기다 상대는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파르로시를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았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그만 돌아가서 쉬는 건 어때요?”
결국, 참지 못한 파르로시가 꽥 소리를 질렀다.
“진짜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나는 뭐 마음에 들어서 얘기하고 있는 건 줄 아나.
진짜 웃기는 황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