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1)화 (151/220)

150화

소파에 가만히 누워 있던 나엘라는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상체를 번쩍 일으키자 옆에서 바느질하던 제니가 놀라 천을 떨어트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조물조물하는 거야?”

“손수건 자수 놓는 법이랑 검 장식 만드는 법 알려 달라고 하셨잖아요. 예시로 보여드릴 거 만들고 있어요.”

“아, 맞다. 최대한 빨리 알려 줘. 체드란이 떠나기 전에 줘야 하니까.”

떠나는 체드란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나온 결론이었다.

보통 전쟁을 나가는 기사들에게 건네는 선물은 정해져 있다. 전투를 할 적 거추장스러워서는 안 되기에 보통 소지하기 쉬운 물건에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대체로 승리를 기원할 때는 손수건을, 다치지 않길 기원할 때는 검 장식을 선물한다.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엘라는 밤을 새워서라도 완성할 생각이었다.

그사이 방금 전 들었던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이 노크를 해 왔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낯익은 것이 집안일을 하는 하녀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곧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문을 닫고 들어온 하녀가 나엘라 앞에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단제 마호세르디 경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오라버니의? 그대는 마호세르디 사람인가?”

“예.”

마호세르디의 첩자가 이 저택에도 있을 줄은 몰랐다. 없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하나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는지라 지금의 상황이 의외였다.

“전해드리라는 쪽지입니다. 답장이 필요하시면 절 불러 주세요.”

나엘라에게 곱게 접힌 쪽지를 건넨 하녀는 그길로 방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지?”

오라버니가 제게 할 말이 있나?

황제와의 만남 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만히 쪽지를 확인하던 나엘라는 얼마 후 종이를 구겼다.

“또 머리 아프게 생겼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아이안 소공작이 말을 전해 달라고 했나 봐.”

“클루아조 소공작이요? 아, 이제 소공작이 아니죠.”

쪽지 내용은 아주 간단했으나 결과적으로 간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날 장소와 시간, 그리고 황제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만 적혀 있었다.

“제니, 사피오를 불러와.”

제니가 방을 빠져나가고, 나엘라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부르셨습니까. 무슨 일로 서재에서 보자고 하셨는지….”

“사피오, 내가 시킨 거 다 했어?”

지금 다 했냐고 물은 건가? 바로 어제 시킨 일을?

사피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농담하시냐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황제와 전대 황제, 황자들에 관해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랬지.”

“그걸 지금 다 했냐고 물으신 겁니까?”

“그런데?”

사피오는 울컥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중간에 ‘망할 내 인생…’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분명 체드란이 유능하다고 했는데?”

“저는 조사원이 아닙니다.”

“딱히 유능하지 않다는 얘기네?”

“큭….”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나엘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황제가 귀족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은 찾았어? 뒤통수 안 맞는 방법은?”

“그것도 어제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원래 유능한 직장 상사는 부하를 잘 굴려야 하는 법이야.”

황제가 제게 내준 숙제를 사피오에게 떠맡긴 꼴이 됐지만 똑똑한 머리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은 것 아니겠나.

“잘 들어. 사피오. 원래 큰물에서 놀려면 물 아래에선 미친 듯이 발을 굴러야 하는 법이야.”

“저는 큰물에서 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보낼 건데?”

사피오가 체드란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나엘라는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처리하는 데만도 힘겨워하는 듯 보였으나 그게 다는 아닐 터다.

애초에 톨레로 상단이 황도에서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 건 사피오의 덕이 컸다.

어떤 귀족을 만나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내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교류를 해야 상단이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어떤 상품을 노려야 하는지 등 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방향성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사피오다.

심지어 상단 수뇌부들이 수도를 빠져나간 지금도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좋은 체계란 이렇게 수뇌부가 없어도 조직이 알아서 굴러가게 한다.

그래서 나엘라는 황제의 숙제를 사피오에게 부탁했다. 결국 상단 살림이나 나라 살림이나 큰 틀은 비슷한 법이다.

귀족들이 딴생각하는 것을 막고 안정적으로 제국을 굴리기 위해선 체계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귀족들을 감시하고 관리할 국가운영기구의 신설, 체계 개편, 법 개편 쪽은 손봐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제가 원하던 방향성은 좀 더 폭력적이고 과격하겠지만 일단 기초가 중요하다는 걸 무시하진 못할 거다.

“일단 지금까지 알아본 것들입니다. 제국법과 황실 직속 기관들을 정리해 왔습니다. 그런데 개편을 한다고 해서 황제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 다른 것도 준비해야겠지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넌 기초만 만든다고 생각하면 돼.”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낸 사피오는 책상 위로 그것들을 늘어놓았다. 나엘라도 자세를 고쳐 앉고는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황제와 형제들, 선황에 관해서는 아직 조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관련 자료들이 많이 전소됐습니다.”

“황제가 전부 불태웠나 보지?”

“황실 서고에는 자료가 남아 있겠지만 그 외에는 전부 불태운 것 같습니다. 오래된 기관이나 일부 조직에서만 보관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당시 숨겨 놨던 것들이라 쉽게 접근하긴 어렵고요.”

“흠, 역시….”

자료들을 훑어보자 군데군데 구멍들이 많이 보였다. 아직은 자료의 질이 좋지 않은 걸 감안해야 했다.

“그럼 저는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할 일 많지?”

“예. 지금 대공비 전하께서 시키신 일들 때문에 잘 시간도 없습니다.”

사피오의 나이가 어려서일까. 그의 투정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은근한 웃음을 지은 나엘라는 한쪽 턱을 괴고 사피오를 바라보았다.

“사피오.”

“예.”

“그동안 네가 톨레로 상단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체드란에게 들었어.”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점이 나엘라와 비슷했다.

그런데 특히 비슷한 점은 따로 있었다.

“네가 톨레로 상단이 이만큼 커질 때까지 일조했다지?”

“과찬입니다.”

“지방에서 지방을 잇는 물류 체계를 구상, 실현하고 사업 아이디어를 낸 게 너라고 들었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어지는 칭찬이 부끄러운지 사피오는 얼굴을 붉혔다.

“내 밑에서 일하는 건 어때?”

“갑자기요?”

“내가 마호세르디의 운영 방식을 갈아치우고 새로 개편했어. 군 개편부터 첩자 관리까지, 현재 마호세르디의 보안을 구축했지. 내 생각엔 우리의 일 성향이 아주 비슷한 것 같은데?”

“아….”

“아직 체드란에게 말한 건 아니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톨레로를 내가 가져오려고 해. 그때가 되면 톨레로도 많이 바뀔 거야.”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겠습니다.”

“그래. 바뀔 톨레로가 기대된다면 내 밑으로 들어와.”

이런 계획을 가닥이나마 잡게 된 건 노헤스카의 영지금 문제 때문이었다. 하일모라와 지엘라에게 노헤스카에서 축제를 열기로 약속했는데 돈 나올 구석을 따지다 보니 톨레로까지 생각이 뻗어 간 것이다.

상단만큼 돈 벌기 적합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체드란의 것이 제 것이 될 터였다.

“서민들과 귀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톨레로가 군수 물품과 무역에까지 손을 대면 얼마나 커질 것 같아?”

나엘라는 성심성의껏 사피오를 꼬시고 있었다. 분명 흥미를 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대로였다. 어딘지 설레 보이는 그의 표정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일단 생각해 봐. 그만 돌아가도 좋아.”

고민하는 듯한 표정의 사피오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서재를 나섰다.

능력 있는 부하를 열심히 모아야 한다. 나중에는 부하들에게 맡겨 놓고 체드란과 놀 예정이었기에 더더욱 필요했다.

그럼 노헤스카 군 개편도 해야 할 터. 체드란이 없어도 잘 돌아가게끔 만들어야 하니까….

하나하나 따져 볼수록 할 일이 산더미였다.

“일단 이것부터.”

나엘라는 다시 종이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 줄 기미라도 있으리라.

*

한참을 그렇게 책상 가득 종이를 펼쳐 놓고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책상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 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체드란이 앉아 있었다. 의자까지 갖다 놓고 자신을 바라볼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에 놀랐다.

제 감이 죽은 걸까, 체드란이 암살자 뺨치게 은밀히 움직이는 걸까.

“언제 왔어요?”

“10분 전.”

체드란이 은밀히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자신이 10분 동안이나 다른 사람을 못 알아차릴 정도로 둔할 리가 없다.

“왔으면 말을 하죠.”

“일하는 모습이 관능적이길래.”

나엘라의 손에서 종이가 툭 떨어졌다. 시선을 못 맞추고 고개를 돌리자 체드란이 책상을 툭툭 치며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바쁜가?”

“음, 아무래도 조금 바쁘긴 하네요.”

“내 아내는 언제쯤 나만 봐줄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엘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흘려들을 수가 있어야 흘려듣지.

체드란이기 때문이라서 그렇다. 체드란의 말이기에 한마디에 당황하고 난감해하고 시선도 못 맞추는 것이다.

“미안해요.”

“사과받아 주겠네.”

“모레 떠나는 거죠?”

“그렇지.”

떠나기 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손수건과 검 장식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조금 다른 것 말이다.

“혹시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있어요?”

“원하는 건 없는데.”

이번에 떠나면 우리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일이 틀어지면 예정된 재회의 날짜도 틀어질 수 있는 거였다. 자신은 앞으로 황제 상대를, 체드란은 전쟁을 앞두고 있다.

겁을 집어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체드란.”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미래를 확신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니 늘 상대에게, 제 감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체드란에게, 우리가 함께하는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뭘까.

“오늘 나랑 잘래요?”

체드란이 떠나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불안하지 않게끔 할 만한 무언가를.

마주한 깊은 바다와 같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