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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2)화 (152/220)

151화

잠자리를 제안한 건 이성적인 생각 반, 순간적인 감정 반이었다. 이제 막 감정을 조금씩 쌓아 가던 차이니, 멀리 떨어져 있어도 끊어지지 않고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유대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체드란은 무엇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에게도 이유가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하지만 나엘라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체드란에게 유대감이 목적이라 말하기엔 잔인할 것 같았고 즉흥적이었다 말했다기엔 그것 또한 잔인하지 않을까.

자신의 표현이 체드란을 상처 입힐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도 체드란을 좋아하기에 한 말이었는데.

“그대의 가장 큰 딜레마가 무엇인지 아나?”

“딜레마요?”

“감정에 대한 확신이지. 그대가 사람의 감정에 둔하고 잘 모른다는 건 알고 있어. 그게 본인한테 가장 크게 적용된다는 것도.”

“음….”

“솔직히 조금 화가 나기도 하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 알 것 같아서.”

나엘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상처받을까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그래서 화가 났을까.

“일반적인 연인이라면 잠자리를 하기 전에 가장 먼저 동반되어야 하는 감정이 있네. 뭔지 아나?”

“어….”

“성적인 설렘과 유혹, 그와 비슷한 다른 감정들이지. 그대는 내게 그걸 느끼고 있나?”

다른 이들이라면 이런 주제 자체가 부끄러웠을까.

일반적인 연인과 우리의 사이가 조금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엘라도 언뜻 부끄러움이 들려다가도 그의 진지한 눈에 침착해졌다. 그의 진지한 태도만큼 나엘라도 진지하게 마주해야 옳다.

“그대는 나와 손을 잡고 싶은지, 키스하고 싶은지, 그 이상을 하고 싶은지 묻는 걸세.”

스킨십을 묻는다면 나엘라도 싫지 않았다. 설레고 떨림이 있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체드란이 묻는 것은 조금 달랐다. 나엘라가 먼저 그를 원하고 그 이상을 원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그건….”

그제야 나엘라는 그의 의도도, 스스로에게 무엇이 비어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체드란은 지나가는 말이라도 자신에게 계속 표현했었다. 표현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스킨십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나엘라가 먼저 시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와 함께 쓰는 침대에서 잠만 잘도 잤으니까.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나엘라는 멍해졌다.

“나엘라.”

그녀의 충격을 알아챘는지 체드란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굳었던 분위기가 살짝 풀리자 나엘라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말 차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차, 차인다고요?”

“마음이 일방적으로 기운다면 지치기 마련이지. 내가 그대를 못 찰 것 같나?”

이혼.

그 두 글자가 나엘라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체드란이 지쳐서 먼저 이혼하자 그러면 어떡하지?

“일단 오늘은 잘 생각해 보게. 난 이만 나가 보지. 보던 거 마저 보고.”

체드란은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찬바람을 풍기며 나가 버렸다.

체드란이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나엘라는 손끝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나엘라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도 같았다.

체드란과 이런 문제로 싸우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단호히 닫히는 서재 문을 보며 나엘라는 절망했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한참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던 그녀는 잠들기 전에 다시 얘기해 보자고 결단을 내렸다.

굳게 다짐하고 침실로 들어갔건만 결국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대공 전하께서 톨레로 상단 문제로 오늘 안 들어오신답니다.”

외박이라고? 싸우고 외박?

나엘라는 떨어지는 종이처럼 흐물흐물 소파 위에 누웠다.

“나 진짜 이혼당하면 어떡하지….”

마음이 초조해졌다.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생각한 모든 미래에 이젠 체드란이 있는데….

*

나엘라는 아침까지도 체드란을 보지 못한 채 저택을 나서야 했다. 하필 일찍부터 잡아 놓은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나엘라 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드는 베르에티가 보였다. 나엘라는 신이 난 베르에티와 그 옆에 있는 하일모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채비를 서둘러 왔건만 대체 언제 온 건지 모르겠다.

“여기가 수도 루부스 저택이구나.”

루부스 후작령에 있는 저택은 바다와 마주 보고 있는 지역답게 푸른색에 하얀빛이 특색 있다고 들었다. 기본적으로 더운 지역이라 저택의 구조도 1층은 뻥 뚫린 건물들이 많다고도.

하지만 아쉽게도 수도의 저택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수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을 법한 귀족 저택 중 하나였다.

“아쉽네. 루부스 후작령 저택은 예쁘기로 유명하니까.”

“다음엔 후작령으로 초대할게요.”

베르에티의 말에 아쉬웠던 마음이 조금 가셨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루부스령을 언제고 꼭 가 보리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왜 후작령 해변 지역은 건물이 전부 하얀색이야?”

“빛을 반사해야 덜 더우니까요! 어두컴컴하게 칠해 놓으면 쪄 죽거든요.”

발랄하게 대답한 베르에티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설명했다. 가장 아름다운 바닷가, 선상 위에서 즐기는 파티라는 대답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진심으로 루부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엔 수도 저택도 그렇게 지을까 했는데 주변 귀족들이 좀 아니꼽게 생각했나 봐요. 루부스 지역 양식을 자기네들이 쓰기엔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보자니 루부스 저택만 너무 예쁠 것 같았나 봐요.”

정말 별의별 걸로 난리다.

“휴가는 매번 루부스로 가면서.”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에 도착했다. 앞으로의 대비를 간단히 논하려 만난 자리기에 야외에서 이야기 나누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나저나 지엘라 부인께서는 오늘 안 오세요?”

베르에티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들어 몸이 안 좋으신가 봐.”

나엘라는 세간에 흐르는 소문을 알려 주었다. 이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만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다.

하일모라는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황제가 뭐 한 거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파르로시를 아낀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지엘라 부인에게 문제 생겨서 좋을 게 없으니까.”

엄연히 같은 황녀이니 사람들의 관심은 지엘라에게도 번졌다. 파르로시를 아낀다 말한 황제이니 지엘라도 같을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두 사람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

지엘라의 이야기를 오래 해 봤자 좋을 게 없어 나엘라는 분위기를 바꿨다. 본격적으로 논의할 기세를 느낀 두 사람도 자세를 바꾸었다.

시종을 멀리 떼어 놓아 들을 사람도 없건만 세 사람은 목소리도 죽였다.

“뭔데?”

“어떤 거예요?”

이유를 묻기는 해도 걱정을 하기보단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나엘라가 두 사람의 반응을 걱정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할 부탁은 즐거울 만한 종류가 아닌 탓이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사교계 시즌이 끝나잖아.”

하일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무더위가 가시고 나야 가을에 다시 시작되겠지. 당분간은 소소한 파티 말고는 없지 않을까. 다들 여름 휴가도 떠날 테니까 수도는 한산해지겠네. 그건 왜?”

“사교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사교계를 휘어잡아 놓을 사람이 필요해. 원래는 황후의 영향력이 컸지만, 이제는 그 자리가 공석이니까.”

“흐음, 아마 부인들 사이에 물밑 싸움이 치열하겠지. 황후의 빈자리를 누가 채울 것인지 정해야 하니까.”

“지금은 어때?”

나엘라가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사교계는 아예 신경도 쓰지 못했다.

남부에서 함께 올라온 줄리 백작 부인이나 황제 측 사람들이 잘하고 있겠지만 황후를 따랐던 귀족들이 문제였다. 아무래도 사교계는 황후의 영향력이 더 강했던지라 물밑으로 난리가 났을 게 뻔했다.

“요즘은 조금 주춤했지. 큰 파티는 안 열리고 친한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모이고 있어. 반란과 같은 문제는 너무 큰 건이니까 사교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그렇구나.”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단순히 물러난 거라면 알력 싸움으로 가득했겠지만, 하필 커다란 재판이 열린 터라 사교계의 위축을 가져온 셈이다.

나엘라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베르에티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사교계를 휘어잡을 사람이 왜 필요하세요?”

“정보전을 음지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사교계는 정보 말고도 여러모로 중요하기도 하고, 다른 구도를 조금 만들까 해.”

“구도요?”

“귀족 연합 같은 거?”

쉽게 말하자면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사교계의 방향을 틀고 싶었다. 지역마다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연합으로 구도를 재구성할 생각이었다.

황실 여자 중 사교계에 나설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적기였다.

“내가 나설 수는 없어. 남편은 두칸과, 친정은 제스라 왕국과 전쟁 중인데 사교 파티나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나를 대신해 사교계를 휘어잡고 움직일 사람이 필요해.”

로열 중의 로열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더불어 권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붙어 어느 한쪽이 깰 수 없도록.

그러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이도록.

“북부는 아이안 공작가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제외하고 동부의 루부스 후작가, 신흥 세력 중엔 세레노피 백작가, 남부엔 전쟁 중인 대공가 대신 줄리 부인이 있는 도이네 백작가 정도?”

“그럼 서부는요? 마호세르디를 제외하고 괜찮은 곳이 있을까요?”

“아직 생각 중이야. 줄리 부인은 아버지와 친분이 있지만, 도이네 백작은 그렇지 않거든. 한마디로 줄리 부인은 황제 측 사람이라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모호한 상태야.”

루부스와 세레노피가 황후의 사람들이었으니 황제 측 인사도 두 사람 정도가 나선다 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황후가 사라지며 권력이 기울었다는 점이다.

황후의 이름이 사라진다 해도 루부스와 세레노피 자체는 괜찮다. 루부스야 워낙 튼튼한 가문이고, 세레노피 또한 신흥 가문으로서는 튼튼한 곳이었으니까.

다만 황후의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작은 오물이 튄 셈이다.

그러니 황제 측 인사들이 과도하게 큰 세력으로 뭉치면 줄다리기가 힘들어졌다.

“이왕이면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사람 중 괜찮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네.”

이건 따로 데테로아에게 요청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로열 세력을 만들고 나면 그다음이 중요했다.

“로열 세력을 만들고 사교계에 억지 평화를 만들어야 해. 부인들끼리 알력 싸움 금지, 눈치 싸움 금지. 평화가 생기면 부인들은 작은 소문에도 금방 반응을 보일 거야.”

뭐 하나라도 씹어야 즐거운 이들이 많으니 저들끼리 싸우지 못하게 만들면 사교계 외에서 씹을 거리를 찾을 터. 여론전을 하게 된다면 자연히 사교계가 가장 먼저 움직이게 될 것이다.

더 폭발적으로, 더 광적으로.

“거기다 사교계 밖에서, 그러니까 남자들 사이에서 사교계를 공격해 온다면 하나로 똘똘 뭉치게 될 거야.”

나엘라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였다. 써먹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사교계가 그녀의 힘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그런 이유로 잘 부탁해.”

한동안 사교계를 열심히 뛰어다녀야 할 둘을 향해 나엘라가 싱긋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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