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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3)화 (153/220)

152화

“이런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마호세르디 정원의 꽃밭을 바라보고 있던 체드란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을 보다 오는 바람에 시간을 생각 못 했습니다.”

여름이 다가와 해가 빨리 뜬다는 걸 잊어버렸다. 그 덕에 톨레로 상단의 일이 끝나자마자 찾아왔지만,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을 시간에 방문하게 된 셈이다.

“일을 보다 오셨다는 건… 외박하셨습니까?”

체드란은 이유 없이 찔리는 기분이었다. 크게 싸운 것도 아니고 대공령으로 돌아가기 전 처리할 일이 많아 순수하게 바빴을 뿐이었건만.

“톨레로 상단이 수도로 돌아오는데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황후 때문에 한동안 수도 밖에 있었으나 재판까지 끝났으니 돌아온 것이다. 남들 눈을 피해 입성하다 보니 새벽에 움직이느라 체드란도 외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대공 전하께서 톨레로의 주인이셨군요.”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엘라에게 다나한 경이 알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다나한 경의 사람들이 곧 공작의 사람 아닙니까.”

“허허, 이제는 뒷방 늙은이가 돼야지요.”

“벌써 자리를 물려주시려고요? 아직 소공작의 자리도 주지 않으셨잖습니까.”

“다나한에게 소공작의 자리가 필요 없으니 그랬습니다. 이미 공작령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까요.”

체드란은 문득 단제가 스쳐 지나갔다.

원래라면 단제가 받아야 할 자리이니 혹시라도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신경 썼던 게 아닐까.

그가 받을 상처가 신경 쓰여 공작도 다나한도 건들지 않은 게 아닐까.

“다나한 경이라면 잘 해낼 겁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넘겨줄 생각입니다. 오래전에 끝냈어야 하는 일을 그 아이가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공작령의 사람들은 이미 다나한 경을 지지하나 봅니다.”

“사람을 다루는데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나엘라 같은 방식이 있는 반면, 다나한 같은 방식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엘라와는 많이 다릅니까?”

체드란은 나엘라의 능력을 크게 보았다.

그녀 곁에서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랬다. 그녀는 무심히, 그러나 뒤로는 섬세하게 사람의 밑바닥을 건드렸다.

나엘라에게 매료된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다나한은 나엘라와 다릅니다. 위로는 제 형에게, 밑으로는 제 동생에게 치여 움츠러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장 은은하게 오랫동안 타오를 아이는 다나한일 겁니다. 천재는 결국 평범한 사람을 모르니까요.”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흘려 넘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엘라에 대해 아는 만큼 체드란에게는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검의 천재라 불리는 단제, 전술과 전략에 비상한 나엘라.

그 사이에서 치이던 다나한은 어찌 보면 평범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잘 버텼다는 건 심지가 굳건하다는 말이고.

천재는 평범한 사람을 모른다는 말도 이해됐다. 나엘라의 주변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아온 이가 없다. 그녀가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궤를 달리한 이들이다.

하지만 영지민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엘라도 많은 이들을 이끌 수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나엘라의 강함에 반해 믿고 따르게 되는 것이지, 나엘라가 그들을 이해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도 주인으로선 나무랄 데 없으나 저는 풍파 많던 마호세르디가 평화롭고 안정되길 바랍니다.”

체드란은 공작의 말에서 숨겨진 뜻을 알아들었다.

이미 충분히 강한 마호세르디는 평화와 안정을 추구할 때다. 많은 것을 갈아엎고 진취적으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나엘라는 마호세르디보다는 노헤스카에 어울렸다.

이미 강한 곳보단 앞으로 강해질 곳에.

“저와 나엘라가 만들어 갈 노헤스카가 마호세르디보다 강해질 겁니다.”

“허허. 그것만큼은 물러나기가 힘들군요.”

몇 가지 농담을 더 주고받은 둘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공작께 부탁도 할 겸, 다나한 경에게 서신을 전할 겸 왔습니다.”

“서신이라면 직접 전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공작의 동의도 필요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무엇을 얘기하려고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나 했더니. 공작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을 응시했다.

“일단 제가 대공령에 가 있는 동안 나엘라를 자주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아시다시피 나엘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야 힘을 내는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람들이 곧 삶의 의미이자 그녀가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혼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만큼 앞으로 지칠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주 얼굴을 비춰 주세요. 나엘라가 요즘 겁이 많아졌습니다.”

아마 에스토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검을 들고, 사람을 부리고, 능력을 사용하고 난 후로 처음 겪는 좌절이었으니까.

지키고자 했던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테고 또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 거다.

그건 체드란을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온갖 압박 속에서 나아가게 될 테니 체드란과의 감정도 신경 쓰지 못할 테니까.

아쉽게도 사랑을 하기엔 모든 상황이 나엘라를 옥죄고 있었다.

“겁이 많아졌다라….”

공작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로서도 자식의 좌절이 달가울 리 없었다. 성장통이라 생각하기엔 그 색이 매우 다르다. 단순히 실패에서 오는 아픔이 아닌 만큼 고통의 기간이 오래갈 수도 있다.

공작은 나엘라에게 이런 아픈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클 테니까.

“나엘라가 여러모로 힘든 길을 걷는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래서 어젯밤에도 금방 표정을 풀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살짝 화가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분을 모두 표출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가 얼마나 큰 중압감을 느끼는지 모르지 않는데 자신과의 관계를 더 신경 써 달라고 떼를 쓸 순 없었다.

아닌가, 이미 숙제를 잔뜩 주고 왔나.

“그래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체드란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다나한에게 보내고자 하는 서신이었다.

“내전을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때까지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 없이 몇 번 스치고 지나간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번엔 마호세르디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공작에게 노헤스카 대공령의 주인으로서 전하는 말이었다.

“귀족들을 모아 주십시오. 저 또한 남부의 다른 귀족뿐만 아니라 동부의 루부스 후작가와도 비밀리에 만남을 가질 겁니다. 제가 공작께 부탁드리는 건 마호세르디가 있는 서부와 중앙입니다.”

중앙이라면 데테로아도 가만히 지켜만 보지 않을 거다. 다만 데테로아에게 공작의 지원이 있다면 더 빠르게 진행될 터였다.

“귀족 중 황제의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구별하실 겁니까.”

오랫동안 황제를 봤던 공작이다. 지금 내보인 이들이 황제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안다. 겉으로 자신을 지켜 줄 가문으로 마호세르디를 택한 것일 뿐 숨겨 둔 패가 적지도, 만만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을 가리고자 데테로아와 제가 10년이나 숨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톨레로 상단 정도는 황제에게 들켜도 상관없었다. 그들이 조달하는 자금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한편으론 황제에게 줄 미끼와 같았다.

그의 눈을 가리고 진짜를 숨기기 위한.

체드란이 품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명단입니다.”

어떤 명단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종이 안에 10년의 결실이 있었다.

은밀하고 의심 많고 신중한 황제를 상대하는 만큼 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얻은 것들.

이것이 황제의 숨겨진 패 중 하나라면 그는 꽤 큰 것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작께서는 명단의 사람들이 황제에게 협력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권력에 대한 욕심도 있을 것이고 약점이 잡혔을 수도 있지요. 몇몇 이들은 그저 황제가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종이에 적힌 일부 귀족은 어떤 것을 약점으로 잡혔는지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공작은 깜짝 놀라 종이를 받았다. 한가득 적혀 있는 이름 중 따로 표시된 이들이 있었다. 그 옆에는 무엇이 약점으로 잡혔는지가 적혀 있었다.

“다른 이들은 쳐내면 그만이지만 약점이 잡힌 이들은 한 번쯤 재고해 주세요.”

판단은 공작이 알아서 할 테지만 체드란은 그들의 사정을 아예 외면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한 명이라도 포섭하려다 틀어지면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겠지만 공작이 실수하진 않을 것이다. 첩보전이라면 마호세르디를 따라갈 수 없다. 이 종이로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얼마 없기에 체드란은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지금쯤 약속이 있어 나엘라는 집을 비웠겠지만, 그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베르에티, 하일모라와의 만남을 끝내고 마차에 올라탄 나엘라는 체드란이 귀가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끝장을 보겠다는 마음은 아니지만 밤새 그를 기다린 게 억울해서라도 빨리 가고 싶었다.

초조한 마음이 얼굴로 드러나 인상이 잔뜩 찡그려졌을 때였다. 마차 한쪽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프리야에게로 시선이 달라붙었다.

내내 기사단 숙소에만 머물게 한 것이 미안해 바람이라도 쐬라는 의미로 프리야와 함께 왔었다. 그런데 분명 나올 때는 괜찮았던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새 어두워져 있었다.

“프리야, 무슨 일 있어?”

고개를 든 프리야는 울컥 감정이 차오른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엘라님….”

“무슨 일이야?”

놀란 나엘라가 얼른 자리를 옮겨 그녀를 다독였다.

“어머니한테 쪽지가 왔는데….”

아이고, 이미 한 번 대차게 혼을 냈음에도 또 편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황궁 시녀장이라는 위치상 연락을 주고받는 행위 자체도 위험하니 보내지 말라고 했거늘.

“왜? 뭐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어머니는 저와 인연을 끊으셨나 봐요.”

프리야가 보여 준 쪽지엔 전과 다를 바 없이 날카로운 말들이 가득했다. 왜 그랬는지 이해는 하지만 나엘라는 아무래도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힘들어하는 프리야가 안쓰러웠다.

“제가… 제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남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알고말고.

오래도록 프리야의 정체를 숨겨 왔으나 결국 시녀장은 결국 자식의 존재를 들켰다. 그녀가 알았을 땐 프리야는 이미 황궁에 끌려오던 중이었고, 죽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쳤다.

황궁에서 도망치기가 어디 쉬웠겠는가.

평상시 프리야의 어머니를 잘 따르던 하녀 하나가 목숨을 걸고 프리야를 도망시켰다. 하녀는 당연히 죽었고 그녀 역시 죽을 뻔했다.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중간에 있던 동굴에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살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버티던 아이는 추격이 느슨해졌을 때 혼자서 빠져나와 마호세르디까지 찾아왔다.

그 동굴에서 하녀가 알려 준 도망치는 법을 외우고 또 외웠다고 했던가.

“프리야. 너도 알잖아. 일개 하녀가 그런 길을 알고 있었을 리 없어. 도망치는 법을 하녀에게 알려 준 사람이 어머니일 거야.”

“알아요…. 공작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아버지란 작자는 프리야를 죽이려 했고 어머니는 외면한다, 라.

프리야에겐 잔인하지만, 또 이겨 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랑 제대로 얘기해 보자.”

가족 사이에 끼어들 수 없으니 나엘라로선 이게 한계였다.

그저 프리야를 위로해 주고 다독여 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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