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위로를 잘 못 하는 나엘라가 프리야를 겨우겨우 달래고 저택에 돌아왔다. 지친 상태이지만 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에 거침없이 움직이던 발걸음은 집사 라르바 때문에 멈춰졌다.
“대공 전하께서 급한 볼일이 생기셔서 나가셨습니다.”
쾅─ 계단의 난간이 주먹질의 여파로 웅웅 울렸다. 1층에서 움직이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제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조심하던 것도 첩자 때문이었고 황제가 제 실력을 다 아는 마당에 무엇을 거리끼겠는가.
“무슨 일 때문에 나가셨는지 아는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니 한기가 풀풀 흘렀다.
“모르겠습니다.”
망할 체드란.
설마 자신을 피해 다니는 걸까? 이참에 반성 좀 하라고?
아니다. 체드란이 불같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피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정말 급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점심 식사 준비를 하라 이르겠습니다.”
“됐네. 나가서 먹겠네.”
나엘라는 2층으로 올라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방금 귀가한 그녀가 나가려 하자 불똥이 떨어진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하녀들은 허겁지겁 마차를 다시 부르고 호위 기사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법도 하건만 나엘라는 그대로 대문까지 걸었다.
아무리 대공령에 있는 저택보다 작다고 해도 대문에서 저택 현관까지의 거리는 10분이 넘었다. 하지만 화가 난 듯 팍팍 내딛는 발걸음을 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 요청할 사람은 없었다.
발도 안 아픈지 구두를 신고도 나엘라는 잘만 걸었다.
“나엘라 님, 마차입니다.”
주인을 잃은 마차가 현관에서 급히 내달려 나엘라 근처에 멈춰 섰다. 마찬가지로 급히 달려온 기사가 에스코트하려 했지만, 나엘라는 거칠게 마차 문을 열고는 올라탔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나엘라는 잠시 입술을 짓씹더니 지안을 불렀다.
“지금 클루아조 소공작, 아니 클루아조 공자가 어디서 머물고 있나?”
“수도에 있는 아이안 저택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저택은 안 뺏겼나 보군. 거기로 가.”
어차피 방문할 예정이었긴 하지만 오늘 당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체드란의 행동에 반기라도 들 겸 질러 버렸다.
“출발하겠습니다.”
마부의 말을 들으며 나엘라는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았다.
온몸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
콰직─ 나엘라의 포크로 산산이 조각난 랍스터가 점점 형체를 잃어 갔다. 그 와중에도 요령 좋게 살만 콕콕 찍어 입에 넣었다.
전투적이던 기세는 식사가 끝날 때쯤 점점 힘을 잃었다. 문득 중요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이러다간 진짜 파국이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택에서 기다리던 체드란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리를 비웠고 자신을 생각해 급히 돌아왔다면?
그런데 딴 남자 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러다 진짜 이혼당하는 거 아니야?
화들짝 놀란 나엘라는 포크에 찍힌 랍스터 살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면 이유를 남기고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어야 한다.
와앙, 랍스터를 입에 넣은 나엘라는 다시 전투적으로 씹어 댔다.
일단 지금은 체드란도 잘못 두 개, 나엘라도 잘못 두 개다.
체드란은 외박을 했고 나엘라에게 귀가했다고 연락을 보내 놓고는 바람맞혔다. 나엘라는 어제 말실수로 체드란을 화나게 했고 외간남자랑 점심을 먹으러 왔다.
아침까지는 나엘라가 잘못한 게 조금 더 많았고 지금은……. 근데 지금도 내가 더 잘못한 게 많은 느낌은 뭐지?
체드란의 사정이 정말 이성적으로 합당하다면 나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 돌아가?
도르륵 눈을 굴리던 그녀는 곧 방법을 찾았다. 점심 약속을 합당한 것으로 만들면 되었다!
나엘라의 시선이 앞에 있던 클루아조에게 휙 돌아갔다. 포크를 쥐고 있던 그의 손이 아주 살짝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티도 내지 않고 금세 화사한 웃음으로 마주 웃는다. 역시 보통이 아니다.
“클루아조 공자.”
둘의 사이는 아이안 공작령의 감옥에서 봤을 때보단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그러니 사전 약속도 없이 찾아온 나엘라에게 밥도 내어 줬지.
“편하게 말해.”
마치 인자한 어른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듯 클루아조의 미소는 참 따뜻했다.
“위치가 달라졌으니 서로에 대한 태도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나엘라가 턱을 들고 오만하게 읊었다. 전에는 소공작이었기에 공작 대우까지 해 주었지만, 이제는 후계권이 없으니 일개 영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엄연하게 작위로는 나엘라가 한참 위다.
즉, 존댓말을 쓰라는 얘기였다.
클루아조의 볼이 살짝 떨려 왔다. 재판이 끝나고 다른 이들과 만나지 않았으니 벌써 하대를 받을지 예상 못 한 듯했다.
“내가 쪽지로 만나자고 한 건 가진 정보가 있어서였는데.”
끝까지 존댓말은 하지 않겠다는 듯 말끝을 살짝 늘리는 그를 보며 나엘라는 삐딱하게 웃었다. 반말이라기엔 모호한 상황이었으나 나엘라는 봐주지 않았다.
“공자.”
부름에 대한 대답은 무조건 ‘응’ 아니면 ‘예’가 나와야 한다. 나엘라는 한 번 더 압박했다.
“클루아조 공자.”
“정보가 안 필요한가 보네….”
“공자!”
말싸움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 나엘라는 눈을 부릅뜨고 ‘공자’만 반복했다.
“예… 대공비 전하….”
공기 반, 소리 반. 거친 숨소리를 타고 나오는 존댓말은 나엘라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체드란에게 뺨 맞고 클루아조에게 풀고 있는 셈이지만 뭐 어떤가.
“그래. 이제야 대화를 시작해 볼 수 있겠군.”
정보를 가졌거나 협상을 할 생각으로 클루아조가 불렀으리라는 생각은 했다. 본인의 입으로도 언급했으니 체드란에게 댈 핑계는 생겼다.
무슨 정보인지 체드란이 물어보긴 하겠지만 클루아조가 정보를 안 불어도 협상에 실패했다고 하지 뭐.
“제 태도가 마음에 안 드셔서 애꿎은 랍스터만 박살 내고 계셨습니까….”
어지간히 열받는지 클루아조의 묘한 말투는 계속되었다.
“뭐, 그렇지. 그래서 정보가 뭔가?”
“당연히 황제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겠습니까.”
나엘라의 목적이야 그도 알고 있으니 당연히 가져온 정보의 요체는 그쪽이리라.
“좋아. 말해보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말입니까?”
“흐음, 난 그대에게 줄 것이 없는데.”
클루아조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잠시 고민하던 나엘라는 당당히 말했다.
“그대가 납치 주범이라는 건 비밀에 부쳐 주겠네.”
“주범이라니요, 황후의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옥에서 내가 본 건 그대뿐이네.”
“파르로시 황녀는 어디 갔습니까? 톨레로 상단은요?”
이런, 클루아조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깜박했다. 파르로시 황녀야 황제와 짜고 치는 판이니 거리낄 것이 없다지만 톨레로 상단이 문제다.
황제가 모를 것 같지는 않으니 고려 사항이 아니나 다른 귀족들에게 소문내는 건 별개였다. 파르로시에 관한 건 어떻게 그 불쌍한 황녀님을 모함할 수 있냐며 욕만 먹겠지만 톨레로는 자칫하다간 같이 황후와 묶일 수 있다.
“증거 있나?”
“그럼 그때 제가 있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저택 금고 비밀번호 알려 주지 않았나?”
“제 저택에 금고 따위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시작은 먼저 해 놓고, 나엘라는 상대의 공격만 기억했다.
“그렇다면 내 오라버니에게 추파를 던진 걸 넘어가도록 하지.”
단제에게 이상한 추파를 던진 것도 알고 있었다. 단제가 보내 준 쪽지엔 클루아조가 이상하다며 조심하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그건…!”
“클루아조 공자가 재혼하지 않던 이유가 취향의 문제라는 건 함구하도록 하지.”
벌써 뚝딱 만들어 낸 이 소문을 사교계에서 얼마나 좋아할지는 안 봐도 훤했다. 원래 가질 수 없으면 부숴 버리는 게 낫다.
“이것도 정보의 대가로는 부족한가? 그럼 내게 추파를 던진 것도 넘어가 주겠네.”
클루아조 공자가 성별을 넘어 도덕적 관념까지 무시한 사랑꾼이라는 게 알려지면 한동안 사교계가 아주 활기찰 터다.
“대공비 전하…!”
클루아조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불렀다.
“얼마나 대단한 정보인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부족한가 보군.”
대체 얼마나 대단한 소문을 만들어야 클루아조가 만족할까 싶어 나엘라가 고민할 때였다. 그때 클루아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황권이 바뀐 후 후계권을 돌려주시는 겁니다.”
“후계권? 권력에 욕망하는 타입인지 몰랐는데.”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지요.”
사실 클루아조는 큰 불화가 없는 한 정보는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엘라에게 괘씸죄가 부가되어 얻을 건 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 말은 전해 주시겠죠. 그럼 황태자 전하는 들어주실 거고요.”
클루아조는 나엘라의 예상보다 얽혀 있는 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전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클루아조와 동맹을 맺는다면 나쁘지 않았다. 믿을 수 있는 자는 아니지만, 그가 뱉는 정보가 큰 도움이 된다면 어쨌든 이득이다.
황제 측 정보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고, 황권이 바뀐 후에도 그가 북부에서 중심을 잡아 준다면 데테로아도 한 시름 놓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면 나엘라와 체드란은 대공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홀로 남은 데테로아가 황도를 정리하는 중에 터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하다.
서부는 마호세르디, 남부는 노헤스카, 동부는 루부스, 북부는 아이안.
그 전처럼 네 가문이 딱 중심을 잡고 있으면 데테로아도 안심하고 중앙 정리에 집중할 수 있을 터.
“그래서 정보가 뭐지?”
정보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클루아조의 쓸모를 판단할 생각이다. 굳건한 동맹은 아니더라도 상호 이익을 위한 동맹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감시자들에 대한 정보입니다.”
“감시자들? 황제의 처리자들?”
감시자임과 동시에 감시 대상자가 이상 행동을 할 시 처리하는 이들.
말하기 쉽게 감시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정식 명칭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예. 감시자들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있습니다.”
“누구지?”
“마호세르디 부인.”
나엘라의 눈이 커졌다.
마호세르디 공작부인은 나엘라의 어머니를 뜻한다. 그런데 공작부인이 아니라 그냥 마호세르디 부인이라고?
“설마… 단제 오라버니의…?”
만난 적도 한 번밖에 없으니 호칭도 낯설었다.
누군가 다가와 마호세르디 부인에 대해 물은 적도 없었다.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위대에 들어가며 후계권을 상실한 단제가 결혼조차 황제가 정해 준 이와 했다는 것을.
그래서 나엘라도 오라버니의 결혼식 때 딱 한 번 봤었다. 부인조차 마호세르디 공작령에 방문한 적이 없으니 말 다 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뭐?
“마리즈 마호세르디, 그 전엔 마리즈 푸르텐이었죠. 그녀의 아버지가 감시자들을 처음 만든 사람입니다.”
나엘라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황제는 두 사람을 결혼시켜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근위대와 감시자의 만남입니다. 일의 성향이 너무 다르니 서로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정보를 흘리는 셈이니까요.”
당한 전력도 있고, 근위대조차 감시자로 둘러싸인 환경이다. 단제가 싫어할 것은 당연했다.
거꾸로 마리즈라는 사람은 결혼으로 위장해 상대를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터.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어안이 벙벙하다 못해 단번에 이해가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이야기였다.
문득 자신이 결혼하겠다 결심했던 때 공작령으로 달려와 결혼은 지옥이라고 외치던 단제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