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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5)화 (155/220)

154화

아니 난 진짜 지옥일 줄은 몰랐지…. 집에서도 감시당하고 살 줄이야.

“감시자들을 만든 건 두 명이지.”

“한 명은 그….”

마리즈를 말하고 싶은데 호칭이 어색했다. 평생 마호세르디 뒤에 부인이 붙은 사람은 어머니 말고는 없을 거라 생각했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엘라 정도라고 생각했다.

제 지위가 훨씬 높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단제가 공작이 되었다면 오라버니의 아내를 마호세르디 부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을 테니.

“마리즈의 아버지, 로돈도 푸르텐 백작.”

나엘라는 그제야 기억났다. 까먹었다고 하기보단 그때 너무 화가 나서 일부러 듣지도 않으려 했었다.

로돈도 푸르텐 백작은 원래 남작이었으나 현 황제에게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으로 승계되었다. 정통 있는 백작가도 아니고, 남작가 출신에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도 아니어서 나엘라의 분노가 엄청났었다.

우리는 서부의 방패이자 황제의 검으로 불리는 마호세르디인데, 권력과 세력으로는 그 어느 귀족 가문에도 꿀리지 않는 곳인데, 황제만 아니었어도 마호세르디 소공작이 됐을 오라버니인데. 뭐 그런 생각만 가득했었다.

당시엔 나엘라가 혈기왕성할 때라 더 그랬다.

“그래서 다른 한 명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인상을 찌푸리자 클루아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른 한 명은 나야.”

클루아조라고? 감시자들은 대체 언제 생긴 거지?

황제의 첩자들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럼 ‘감시자’가 만들어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가?

그런데…….

“왜 반말이지?”

“당황해서 모를 줄 알았더니 들켰네.”

“들켰네?”

“꼰대네.”

“뭐?”

“죄송합니다.”

대귀족 모욕죄로 잡혀가야 정신을 차리려나.

죄송하다고 말하는 낯짝이 과히 능글맞다. 나엘라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기사를 부르려던 생각을 접었다.

애초에 나이도 클루아조가 훨씬 많았다. 30대 후반인데도 그가 소공작에 머물렀던 것은 아이안 공작이 병석에 누워 승계를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해 나엘라도 다른 때 같았으면 서로 존칭을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협상하는 자리이기에 우위를 점하려 고자세를 취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저 미소는 뭐지. 철이 덜 들었나.

“아무튼, 소공작이 감시자들을 만든 사람 중 하나다 이거죠?”

“와, 태세 전환 뭐지?”

“존중을 보이시길 바랍니다.”

“정보가 마음에 드셨으니 다시 소공작이 된 거겠죠? 후계권 돌려주시는 걸로 약속한 겁니다.”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감안하기로 했다. 클루아조가 정말 감시자를 만든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정보가 꽤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큼 대우할 뿐.

“초기 관련자라면 알고 있는 게 많겠네요? 그런데 왜 마호세르디 부인을 찾아가야 하죠?”

마호세르디 부인이라니, 말하면서도 입에서 겉돌았다.

“저는 오래전에 감시자 관리에서 손을 뗐고, 푸르텐 백작가는 아직도 관련이 깊기 때문이죠.”

흘러가는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클루아조가 생글생글 웃었다.

“일단 감시자들이 만들어진 계기부터 듣죠.”

“별거 없어요. 그냥 첩자들을 굴리다 관리하기 쉽게 재정비한 거니까.”

그 뒤로 이어진 말은 정말 별거 없었다. 첩자들을 관리하고자 기관을 만들며 관련 명칭을 바꾼 것이다. 일단 기관이 세워졌으니 체계도 바꾸고 말이다.

“현재 감시자들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에 있죠?”

“모릅니다. 그러니까 마리즈를 찾아가야 하죠.”

“푸르텐 백작가뿐만 아니라 그녀 또한 기관과 연관되어 있나요?”

“마리즈가 감시자인지 묻는 거라면, 그건 아닙니다. 대신 감시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뭐, 모르는 거죠. 사실 감시자일지도.”

단제에겐 미안하지만 나엘라는 그녀가 후자이길 바랐다. 감시자여야 황제가 가진 정보나 숨겨 둔 것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녀에게서 어떻게 정보를 끄집어내지?

“마호세르디 부인에 대해 좀 알고 있나요?”

“일단 사교 활동은 전혀 안 하죠. 저택에 틀어박혀 자수나 놓는다고 합니다. 친정인 푸르텐에 가는 일도 잘 없고요.”

“쉽게 이름을 부르기에 친한 줄 알았어요.”

“마리즈가 어렸을 때는 자주 봤습니다. 저희 가문과 친해서요.”

보통 친한 것이 아니니 감시자들도 만들었겠지.

“어렸을 때는 어땠어요?”

“그녀는 총명했는데, 푸르텐 가문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죠. 마리즈 위로 오빠가 하나 있어요. 집안에서 장자인 그에게 모든 지원을 몰아줬습니다. 제 오라비보다 무언가를 더 잘하면 밥도 못 먹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하더라고요. 그 덕에 성격이 난장판으로 자랐습니다.”

“난장판이라는 게 뭐예요?”

“까칠하고 사람 싫어하고…… 뭐 그런 거?”

“사람한테 난장판이라니, 쯧쯧.”

나엘라는 본인이 몰아간 건 생각 못 하고 클루아조를 예의를 모른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직접 상대해야 하는 건 대공비 전하신데 나중에 뒷말하지 마세요.”

“됐고, 일단 집안과 사이는 좋지 않을 것 같군요. 거래를 한다면 제가 뭘 제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너무 떠먹여 드리는 거 아닙니까?”

“쉽게 가는 게 반칙이에요?”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물어볼 대상이 있는데 뭐하러 어렵게 가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쉽게 가는 게 이득이다.

뻔뻔한 나엘라의 말에 결국 클루아조가 백기를 들었다.

“자유를 준다고 하세요.”

“자유?”

“푸르텐 가문에도, 마호세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게끔 해 준다고 약속하세요. 그럼 넘어올 겁니다.”

어지간히 갇혀 살았나 보지? 아니면 구속받고 살았나?

뭐가 됐든 나엘라에겐 좋은 일이었다. 푸르텐 가문은 없애 버리고 단제는 이혼시키겠다 마음먹었다.

황권이 바뀌고도 단제가 근위대를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아니면 데테로아의 뒤를 받쳐 줄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이제 와서 다나한을 밀어내고 소공작에 앉으려고도 안 할 테고.

어쩌면 단제 오라버니 역시 자유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더 해 줄 말은 없어요?”

나엘라는 뭐라도 더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클루아조는 물에 빠진 사람 건졌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일단 마리즈부터 만나고 오세요.”

“정보가 더 있다는 말이네요.”

예상대로 클루아조는 한발 물러섰다. 정보를 한 번에 푸는 것은 본인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멍청한 짓이다. 눈치 빠른 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기에 당연했다.

그럼 이제 이야기도 끝났고, 체드란에게 할 변명도 충분히 채웠다.

대화하느라 식어 버린 음식을 먹고 싶진 않은 데다 목적도 이뤘다.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누군가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아까 마중 나왔던 공작가의 집사로 보였다.

“대공비 전하, 대공 전하께서 데리러 왔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나엘라는 무릎에 있던 냅킨은 던져 버린 채 번개와 같은 빠르기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이만.”

대응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서인지 클루아조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나엘라는 그의 얼빠진 표정을 마지막으로 식당을 순식간에 떠났다.

*

급하게 뛰어나가던 나엘라는 현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걸음을 늦췄다. 타고 온 마차와 동행한 이들이 대기 중이었고 가장 선두에 체드란이 있었다.

그를 보니 아까 전까지 열심히 고민했던 상념들이 모두 날아갔다.

“체드란.”

나직하게 내뱉은 이름에 체드란이 웃자 나엘라도 따라 웃어 버렸다.

“점심은 먹은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체드란의 외박도, 외박 전에 들었던 경고 아닌 경고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밥은 먹었는지, 급하게 나갔다 하더니 일은 잘 처리했는지, 그런 생각만 떠올랐다.

“아직 안 먹었네. 그대는?”

“저도 안 먹었어요.”

황급히 마중하러 나온 집사가 그녀를 돌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되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클루아조 소공작과 먹은 것 아닌가?”

“중요한 얘기 하느라 몇 입 먹은 게 다예요. 체드란은 지금까지 점심도 안 먹고 뭐 했어요?”

“가면서 얘기하지. 점심도 같이 먹고.”

눈앞으로 다가온 체드란의 손을 나엘라가 살며시 마주 잡았다. 함께 왔던 나엘라의 하녀들은 마부석과 말에 탄다며 눈치 있게 빠져 주었다.

그녀가 먼저 마차에 오르고 체드란이 뒤이어 오르자 마차 문이 닫혔다.

“밥은 먹고 다녀야죠.”

음식을 가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안 챙겨 먹을까. 곧 전쟁터를 오가느라 정신없을 텐데 그때도 안 챙겨 먹으면 어쩌지?

하지만 그런 걱정도 체드란의 한마디에 모두 사라졌다.

“잘 챙겨 먹겠네. 오늘 점심은 그대와 먹으려고 안 먹은 걸세.”

아까 제대로 안 먹기를 잘했다. 하마터면 체드란과 점심을 못 먹을 뻔했지 않은가.

“그런데 진짜 어딜 다녀온 거예요?”

체드란은 대답 대신 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누가 보아도 크기나 모양이 반지 케이스였다.

뚜껑을 열자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다이아몬드와 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웬 반지예요? 결혼반지라면 보석함에 있는데…….”

“그건 위장 결혼용 반지였지 않은가. 선물로 준 목걸이는 항상 차고 다니질 못하니, 다른 것으로 준비했지.”

체드란이 쓱 내민 손에는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가 완성됐다길래 급히 찾아왔네.”

나엘라는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그런 것도 모르고 저는 내내 이를 갈았는데.

오늘도 홧김에 뛰쳐나와 딴 남자랑 식사 자리까지 가졌는데.

그런데 체드란은 반지도 준비하고 데리러도 와 주다니.

“체드란…….”

“마음에 안 드나?”

“난 정말 쓰레기예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체드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엘라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끼워 줘요.”

케이스에서 탈출한 반지는 나엘라의 손에 안착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에서 영롱히 빛나며 자신을 뽐냈다.

“어제는 미안했네.”

왜 사과를 체드란이 한단 말인가.

나엘라는 그에게 덥석 안겼다. 이곳이 마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짜 재활용도 못 할 쓰레기예요!”

체드란의 당황이 느껴졌지만, 곧 등을 토닥여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렇게 예쁜 쓰레기가 다 있군.”

그래도 예뻐서 다행이다. 나중에 체드란이 진짜 화가 나면 미인계를 써먹어야겠다. 제 인성에 기대어 그가 화를 풀길 바라진 못할 테니 말이다.

“체드란도 반지 절대 빼지 말아요. 반지 빼면 날 버리는 거나 다름없는 거예요. 알았죠?”

“별소리를 다 하는군.”

“내 성격 알죠? 받은 건 꼭 갚아 주는 거. 날 버리면 진짜 각오해야 할 거예요.”

협박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여자가 자신 말고도 있을까?

궁금함이 가슴에 자리 잡았지만 한 점 뺄 것 없는 진심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점점 더 품속으로 파고드는 나엘라를 체드란은 한없이 토닥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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