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단제는 황제가 잠자리에 들어간 것까지 확인 후 다른 사람과 교대했다. 보통은 한 달 내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고 호위를 하는 일이 많지만, 근위대 단장이기에 평기사보다 대우가 나은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대우를 남용하지는 않았다. 본인이 쉴 시간에 밑에 사람들을 쉬게 하고 집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으니 상사로서는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황궁을 빠져나온 그는 오랜만에 집으로 향했다. 처음 걷는 것도 아닌데 귀갓길이 낯설었다. 낯선 것은 길이 아니라 낯선 상황과 마주해야 하는 마음이겠지만.
“나엘라.”
저택 대문을 지난 단제는 마구간에 간다는 핑계로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후문 쪽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이네요. 오라버니가 사는 저택.”
한 번도 이곳에 발걸음한 적 없는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왔을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내가 근위대에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지금도 싫어요. 황제의 근위대라서 더욱.”
어렸을 때는 막냇동생의 고집이 기꺼웠다. 원하는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이루어 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엘라의 고집은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들어주고 싶어도 쉬이 이루어 주기 어려운 바람이 많았다.
평범한 귀족 영애의 소원과 비슷한 종류였다면 쉽긴 했겠지만 그런 나엘라는 상상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또 맹점이었다.
“이왕이면 제대로 약속이라도 잡고 방문하지 그랬느냐.”
“황제가 퍽이나 좋아하겠어요.”
남들이 들었으면 나엘라의 강한 말투에 겁을 먹거나 그녀를 꺼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제는 나엘라의 투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나 말해 보거라.”
“오라버니 부부 사이를 좀 물어보려고요.”
단제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 클루아조에게도 부탁받지 않았던가.
하필 그 이후 마리즈를 만나지 못해 이야기도 꺼내 보지 못했다.
“갑자기 왜?”
“그걸 알아야 저도 마호세르디 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태도를 달리할 테니까요.”
“우리라고 다른 귀족들과 다를 거 없지.”
“사랑 없이 황제가 정해 준 사람과 한 결혼이요?”
“황제 폐하께서 정해줬다 뿐이지 다른 이들도 가문에서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죠. 마호세르디라면 그 정도 힘은 있잖아요.”
“그럼 너는? 너는 사랑해서 결혼했느냐?”
“적어도 내가 선택한 사람이고, 이제는 사랑도 해 보려 해요.”
“그래? 너라도 행복하니 되었다.”
나엘라는 열이 오르는지 이마를 감싸 쥐었다. 기껏 화를 냈건만 돌아오는 건 다행이라는 말이었다.
어떤 대화를 해도 결국 끝은 서로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아, 마호세르디 부인과 거래를 할 거예요. 대가는 푸르텐과 마호세르디를 벗어날 자유고요. 오라버니는 그녀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나엘라보다는 그녀에 대해 잘 알 테니 물어본 말이었다.
“글쎄, 나도 마리즈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를 원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지.”
“그럼 됐어요. 두 사람 사이는요?”
“아까도 말했듯이 다른 귀족들과 다름없지. 형식상의 부부이고 얼굴도 잘 못 본다. 그녀가 내게 원하는 것도, 내가 그녀에게 원하는 것도 없어.”
“오라버니… 괜찮은 거 맞아요?”
가문을 위해 포기한 것들, 소중한 사람에게 약점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삶,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단제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걱정하기엔 나엘라는 자격이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녀의 생각일 뿐이라, 단제는 걱정스런 동생의 표정을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매우 괜찮아. 너는 네 생각만 해라. 네 행복만 생각해.”
“그럼 오라버니는 뭘 위해 사는데요?”
“마호세르디와 너의 행복. 그거면 되었다.”
단제의 손이 어린 시절처럼 나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그에게 나엘라는 작고 어린 막냇동생일 뿐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감정을 삭이는 나엘라의 모습에도 단제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생각해 둬요. 모든 일이 끝나면 뭘 할지.”
휙 돌아서는 그녀 뒤에 서서 단제는 마지막까지 걱정을 건넸다.
“설마 혼자 왔느냐. 데려다줄까?”
“체드란이랑 같이 왔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오라버니는 얼른 들어가서 쉬기나 해요.”
단제는 체드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막냇동생은 제 행복을 찾아가는 결혼을 했구나 싶었다.
“화난다고 검만 붙잡지 말고, 위험한 일에 함부로 뛰어들지 마. 웬만한 건 주위 사람에게 맡기는 연습도 좀 하고.”
가던 나엘라가 나무를 뻥 차는 게 보였다. 뭐가 화나는지도, 저런 행동조차 제 앞에서만 보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동생이 사랑스러워 단제는 웃음이 나왔다.
“조심해서 가라.”
“빨리 들어가요!”
마지막 말을 남긴 나엘라는 휙 담을 넘어 사라졌다. 누굴 담아 저렇게 몸놀림이 좋은지.
나엘라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제가 걸음을 옮겼다. 막내를 위해 자신도 미뤄 뒀던 것을 해야 할 때였다.
*
저택 안으로 들어온 단제는 바로 침실을 향했다. 각방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부부라 자신의 귀가 소식이 마리즈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늦은 시간에 밥을 먹을 것도 아니라 딱히 서로를 찾기 전까진 얼굴 볼 일이 없었다.
“바로 주무실 겁니까?”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곁에 서 있던 집사의 말에 단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리즈는 자는가?”
“아직 안 주무십니다.”
“그럼 잠깐 얘기 좀 하자고 전하게.”
“예.”
집사는 그길로 침실을 빠져나갔다.
옷을 마저 갈아입으며 단제는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대충 시간을 계산한 그는 지금쯤이면 준비를 끝냈겠거니 싶어 마리즈의 침실로 향했다. 부부의 사이를 보여 주듯 침실조차 복도 끝과 끝에 있었다.
마침 방을 나온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켰다.
“들어오시랍니다.”
마리즈의 침실을 들어간 적은 손에 꼽는다. 단제에게도 무척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의 성격을 대변하듯 방에는 필요한 가구만 자리해 단출했다. 화려한 가구라고는 그녀가 대부분 생활한다는 커다란 소파뿐이었다.
사람 두세 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소파는 벽난로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리즈는 오늘도 그곳에서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군.”
남편의 인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건조한 말이 정적을 깨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갈색의 웨이브 진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태연히 답했다.
“그렇네요. 그런데 무슨 일로?”
단제 못지않게 건조한 답변이었다. 빨리 용건을 말하라 재촉하는 어조에도 단제는 그녀 근처에 자리한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네.”
“말씀하세요.”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어 단제는 차분히 그녀를 살폈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마리즈를 겪어 본 몇 이들은 그녀가 사람을 싫어하고 까칠하다고 했다.
하지만 단제 앞에선 그런 행동이나 성격을 드러낼 만한 일이 없었기에 고심하던 그는 말을 꺼냈다.
“그대는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무슨 말씀이죠?”
“바라는 것이 있느냐는 말일세.”
“갑자기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물어본 적이 없으니 마리즈의 의아함은 당연했다.
“혹시 자유를 원하나?”
단제는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사 생활을 한 터라 말재주가 없었다. 무턱대고 용건부터 꺼낸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즈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푸르텐도 마호세르디도 관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은 걸세.”
“이미 마호세르디는 단 한 번도 제게 관여한 적 없어요.”
“푸르텐은 있다는 말이군.”
마리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에게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단제는 황제 곁에서 푸르텐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고, 마리즈 또한 단제가 얼마큼 아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제는 그간 감시자인지 아닌지를 마리즈에게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누군가 푸르텐을 막아 준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사람을 설득하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하는 게 순서였다. 어떤 설득도 변명도 없는 말에 마리즈는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이제야 움직일 생각인가요?”
이번에 입을 다문 것은 단제였다. 그는 부탁을 받았을 뿐 어찌할지는 결정한 적이 없었다.
다만 나엘라와 연관되었으니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었을 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푸르텐의 사람이고 감시자들에 대해 알고 있죠. 그런 내게 무언가 목적을 갖고 묻는다면 그것밖에 없고요.”
“나는 그대를 이용하거나 정보를 알아낼 생각은 없네.”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러고 싶다면요?”
단제의 표정이 굳어지자 둘의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서로에게 예민한 문제는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둘 사이에 자리 잡은 암묵적인 규율이었다.
“당신이 먼저 시작한 거예요. 제가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당신도 말해야 하죠.”
하나를 내주고 하나를 취하라, 그런 뜻일까.
그가 알고 있던 마리즈와 다르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단제는 마리즈에 대해 하나도 몰랐으니까.
“나는 그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네.”
“그렇게는 변하는 것이 없어요.”
“그대에게 내 생각을 평가받고 싶진 않군.”
“그럼 내가 푸르텐이 있건 없건 원하는 것이 없고, 이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면 어쩔 거예요?”
까칠하다.
단제는 다른 이들의 평가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말투, 눈빛, 자세, 태도는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까칠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네.”
마리즈와 반목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와 다툼이 있어 봤자 집에 오는 것이 더 불편해질 뿐이었다.
여기서 대화를 끝내자는 생각에 단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엘라에겐 차라리 푸르텐의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낫겠다고 전할 생각이었다.
푸르텐의 첫째를 잘 달래 봐도 괜찮겠지. 욕심 많고 허영심만 가득 찬 멍청한 작자니까 분명 접근할 방법이 있을 터.
미인을 좋아한다고 하니 사람을 보내거나 술을 먹여도 괜찮으리라.
“그냥 가려고요? 내게 원하는 것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단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젠 없네.”
악화할 것도 없는 사이였으니 상관없었다. 애초에 서로 좋아할 수 없는 관계였다.
“당신은 푸르텐이 아닌 나를 본 적이 있었나요?”
따지듯이 묻는 말이었다.
마리즈의 말이 이해가 안 되어 단제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대에게 단 한 번도 푸르텐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적 없네. 벗어나지 못하는 건 오히려 그대 같군.”
그 말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단제의 옷을 꽉 말아 쥐었다.
마리즈가 감정을 이리 격하게 드러낸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격렬한 감정이 낯설었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두 눈동자엔 분노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