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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57)화 (157/220)

156화

“나는 푸르텐이에요. 감시자들 집안이죠. 그런 내가 당신과 편히 얘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나는 먼저 다가가지 못해요. 당신은 그런 나를 방치하고 단 한 번도 여자로 대해 준 적 없잖아요.”

푸르텐, 그 감옥 같은 곳에서 마리즈는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살아 본 적 없었다. 마리즈에게 결혼은 도피였고 또 다른 꿈이었다.

적어도 단제는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리라 믿었다. 답지 않은 꿈을 꾸었고 남들처럼 평범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억지로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우리는 강요된 결혼이었다. 서로가 원한 적이 있었나?”

“결혼을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부부가 되었어요. 그러면 적어도 내게 일말의 관심이라도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를 감시하러 온 자에게?”

그렇게 생각할까 봐 마리즈는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잘못된 믿음이겠지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다.

몇 년 동안 기다리며 감시자가 아니라는 믿음을 준다면 얼어붙은 이 사이가 변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단제는 과연 자신을 아내로 생각한 적이 있을까.

“억지로 한 결혼에 무엇을 더 바랐나.”

“내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랐죠. 우리는, 아니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니까요.”

“난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살고 있네.”

최악이었다. 서로 너무 다른 것을 꿈꿨고, 그랬기에 마리즈는 참았으며 단제는 내버려 두었다. 한 번도 서로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그런 삶이 행복한가요?”

“내가 욕심을 부리는 순간 내 가족이 위험한 삶을 사는 기분을 아는가?”

“그럼 당신이 결혼 생활 내내 처음으로 날 찾아왔다는 건 알고 있어요? 나는 멍청하게 기대를 해 버렸네요.”

“그대도 먼저 내게 찾아온 적이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의심할 테니까요.”

감시자들에 대한 비밀? 가문의 비밀?

그딴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제가 원했다면 언제든 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기에 마리즈 역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뭘 원하냐고?

참고 참으면 더 나아지리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했다. 눌러 왔던 성격은 도화선을타고 올라가 터져 버렸다.

“빌어먹을.”

마리즈의 욕설에 단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누구 마음대로요?”

꽉 막힌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내에게 너무 무심한 것 아닌가.

단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어딜 도망가요!”

단제의 걸음이 더 빨라졌으나 마리즈는 개의치 않았다. 씩씩거리던 감정만큼이나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분명 참을 만큼 참았고 봐줄 만큼 봐줬다고 마리즈는 생각했다. 얌전하고 현명한 아내, 뭐 그딴 것도 해 줄 마음이 있었건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건 단제였다.

*

평상시 체드란이 타고 다니던 커다란 말은 성인 둘을 태워도 끄떡없었다. 덩치 큰 체드란을 태우고 다니던 것을 보면 어디서 품종 좋은 종마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체드란.”

“말해.”

“나랑 정말 안 잘 거예요? 내일 떠나잖아요.”

등에 닿은 체드란의 가슴이 살짝 울렸다. 낮게 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엘라.”

“말해요.”

“나는 성욕이 없지 않아. 다만 전쟁터에선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풀었고 평상시엔 훈련으로 풀었지.”

“지금은 전쟁터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도에선 훈련도 안 했잖아요.”

“그러니 참고 있지.”

“왜 참냐고 묻는 거예요.”

“전쟁 중에 그대를 보러 뛰어올까 봐.”

“말 타고 와요. 뛰어오지 말고.”

이번에는 체드란의 시원하게 웃는 소리가 어두운 밤공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나는 그대가 성욕이 없는 줄 알았는데.”

“해 봐야 알죠. 뭘 알지도 못하는데 좋은지 안 좋은지 어떻게 알아요.”

“그럼 상상이라도 해 보든가.”

“상상이요?”

“그대는 누워 있고 내가 그대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옷은… 얼마나 벗고 있는 게 좋은가?”

상상? 체드란과 잠자리를 하는 상상?

나긋나긋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엘라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상상 속에서 자신과 체드란이 움직였다.

“내가 벗거나 그대가 벗겨 주겠지. 개인적으로 그대의 옷은 내가 벗겨 주고 싶군. 내 옷은 어떻게 하는 게 더 좋을까.”

나엘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행위가 척척 진행되었다.

“일평생 검을 들었다지만 그래도 그대의 체격은 가는 편이지. 힘보단 속도를 중시하니 근육도 가늘어. 옷을 벗어도 그렇겠지.”

발가락 끝에 전기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다정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만으로 나엘라는 입안이 말랐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남들이 다 잠든 이 새벽에 대공 부부가 말을 타고 지나가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걸.

“체드란.”

“그래.”

“성욕이 있는 편인 것 같아요.”

“그대가?”

“네.”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지금 체드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엘라가 그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쥐고 있던 고삐가 체드란에게 넘어가더니, 말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의 거절은 그저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했지.”

“경고까지 날리고 갔으면서 무슨.”

“적어도 두 번이나 거절하는 건 바보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걸세.”

나엘라의 얼굴이 폭삭 익었다. 그의 말뜻은 곧 승낙이었으니까.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뭘요?”

“그대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말의 속도를 더욱더 빨라졌다.

나엘라는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손가락을 말아쥐었다.

정신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선후를 둘 수 있는 문제일까?

우리의 마음은 어디까지 진전되었고 얼마나 더 성숙했을까.

적어도 나엘라는 하일모라가 얘기해 줬던 것 하나만은 늘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만 맞는다고 사랑이 깊어지지 않아.’

나엘라가 마음으로 불같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다른 쪽으로 불타올라도 되는 거 아닐까.

저택에 도착한 둘은 말에서 뛰어내렸다. 모두 잠든 늦은 밤이기에 말은 대충 마구간에 들여보내고는 침실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가던 체드란이 뒤에 있던 나엘라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늘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이기에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올라간 그가 침실 문을 열자마자 쿵 닫았다.

침대로 가기도 전에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입술을 덮어 왔다. 체드란의 목에서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이 모자라 입술을 잠깐 떼자 그가 눈가를 휘며 웃었다.

“하나는 알겠군.”

“뭘요?”

“옷은 찢는 게 빠르네.”

그다음부터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파도의 연속이었다.

*

저택의 모든 이들이 나와 가주를 배웅했다. 질질 끌다시피 미뤄 둔 귀행길을 드디어 떠난다.

수도로 함께 올라왔던 기사들은 대부분 나엘라의 호위로 남았기에 떠나는 체드란 일행의 규모는 단출했다.

“다롱 경, 나엘라를 잘 부탁하네.”

“목숨을 걸고 대공비 전하를 지키겠습니다.”

부단장 다롱을 비롯해 그 외의 몇몇 기사들에게도 나엘라를 부탁하며 체드란은 모든 인사를 끝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사람은 나엘라였다.

“나엘라.”

이 더운 날씨에 목까지 감싸는 원피스를 입은 나엘라는 조금 수척해 보였다. 누가 봐도 전쟁터에 나가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밤새웠잖아요. 잘 갈 수 있겠어요?”

“밤을 새우는 것 정도는 늘 해 오던 일이지.”

“체력도 좋네요.”

“그대는 의외로 안 좋군.”

나엘라가 울컥한 표정이었지만 보는 눈이 많기에 참아 내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가요. 중간중간 휴식도 취하고요.”

“밥도 잘 먹겠네.”

체드란이 미소를 짓자 몇몇 하녀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원체 무뚝뚝한 사람이기에 큰 표정을 짓지 않아도 작은 변화만으로도 밝아 보이는 걸까. 오늘따라 제 주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데다 기분도 굉장히 좋아 보였다.

“어디 다치지 말아요. 전에도 많이 다쳤었죠? 흉터도 많던데.”

“자잘한 상처야 어쩔 수 없지.”

“자잘하지 않은 것도 있었잖아요.”

체드란은 잔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인지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걱정이 달가웠다. 그게 나엘라라면 더더욱.

체드란이 팔을 벌려 나엘라를 품에 안았다. 밤새 안고 있던 사람인데 또 안고 있어도 좋았다.

“정말 가고 싶지 않군.”

“론체 경이 당신을 대신할 수 있지 않겠어요?”

“마든을 복귀시켰네. 아마 괜찮을지도.”

마든이 드디어 집사를 때려치운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 대공령은 전시 체제에 들어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집사보단 회색 머리의 기사가 필요할 때다.

“그럼 이제 체드란이 필요 없는 거 아니에요?”

“그랬으면 좋겠군.”

이렇게 말을 나눌지언정 결국 체드란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드란 없이도 두칸과의 전쟁이 가능했다면 진즉 복속시켰겠지.

“노헤스카는 여기보다 훨씬 더울 텐데……. 하필 가장 더울 때 전쟁이라니 큰일이네요.”

체드란의 품속에서 웅얼웅얼 발음이 뭉개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칸은 더 난리일 거야. 사막 지역이니 가장 힘든 시기에 전쟁이 시작되는 거지.”

“노헤스카 기사들은 괜찮을까요?”

“물자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버틸 수 있네. 아가산 백작이 제대로 지원해 준다는군. 이럴 때를 대비해서 훈련했으니 걱정하지 말게.”

아가산 백작이라면 나엘라가 열었던 파티에서 페즈몽레 부인도 도와준 적이 있고, 남부에서 큰 무역도 하니 다행이었다. 얼마 전엔 톨레로와도 교류를 시작했다던데, 그렇게 되면 보급품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대장장이 조알론에게도 연락을 받았다. 더운 기후와 더불어 두칸 야만족과의 싸움에 대비해 갑옷을 대대적으로 손봤다고 들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전쟁을 나섰던 기사들에게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거기다 나엘라가 없는 사이 사피오가 대공령에서 이것저것 손을 댔다.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전장까지 보급품 이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도로 개편도 한 모양이었다.

“빨리 그리고 하나도 다치지 말고 끝내요.”

“압도적인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 주지.”

“참나, 이게 남자의 허세인가.”

“내게 한 번도 못 이겨 놓고 말이 많군.”

농담을 건네는 중에도 체드란이 떠나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팔을 풀고 조금 떨어진 체드란이 나엘라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위험한 순간에는 언제나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도망갈 것.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것.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씨익 웃은 체드란이 말에 올랐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했다.

“출발한다!”

체드란이 가장 선두에서 말을 달리자 기사들도 그 뒤를 따라 말의 배를 차며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그를 바라보며 나엘라는 우리가 떨어지는 건 이번뿐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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