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황제의 패
158화
톨레로 상단을 나온 나엘라는 마차에 올라 출발을 명했다.
“성격이 난장판이라더니 꼭 그렇진 않네.”
오늘 따라왔던 제니가 이야기를 다 듣더니 잠시 고민했다.
“단제 경과 연결 고리가 있다면 동생인 나엘라 님께 쉽게 굴지 않을 테니까요.”
나엘라가 느낀 미묘함을 제니도 느낀 모양이었다.
“정말 오라버니랑 뭔가 있나. 오라버니는 그냥 서로 원하는 게 없다고 했는데.”
“그러게요. 무슨 사이일까요?”
연애 이야기가 가장 쓸모없지만 가장 재밌는 이야기라고 누가 그랬던가. 괜한 호기심이 들어 제니와 이것저것 수다를 떠는 사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에서 내린 나엘라는 1층으로 내려오던 라르바와 마주쳤다. 황제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집사로서 충실히 일하던 그였다. 오늘도 역시나 마중 나와 제 임무를 다하는 중이었다.
“볼일은 끝내셨습니까.”
“차는 됐네. 저녁은 조금 쉬다가 먹을 거니까 천천히 준비해 주게.”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끝낸 나엘라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라르바가 오늘따라 뒤를 쫓았다.
“할 말이 남았나?”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황제가 무엇인가 시킨 모양이었다. 방으로 들어간 그녀를 따라 자연스럽게 함께 들어온 라르바는 정중히, 하지만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요반나 사신들이 곧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신들을 맞을 준비하시랍니다.”
“내가?”
“황실에 큰 어른이 없어서요.”
어이없는 일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손님을 맞을 황후는 죽었고, 다른 황실 여성이라곤 황녀 둘밖에 없는데 그들도 상태가 마땅치 않았다.
지엘라는 얼마 전부터 아프다며 자리보전 중이었고, 파르로시는 황실 행사 준비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황후 역시 제대로 손님맞이를 한 적도 없긴 했다. 그녀에게 권력을 주지 않으려 황제가 거기까지 권한을 주지 않은 탓이다.
“굳이 따지자면 대공비인 내가 하는 게 맞긴 하지만 하필이면 요반나라니. 협상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요반나 왕족이 반란에 가담한 죄로 아직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번에 오는 요반나 사신단은 그자를 빼내려 협상을 하러 오는 길일 게 분명했다.
나엘라가 어이없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을 아주 요리조리 써먹으려 하는 꼴이 어이없었다.
“이건 필요하실까 싶어 드리는 자료입니다.”
라르바가 내민 자료라는 걸 건네받았다. 몇 장 되지도 않아 받자마자 대충 훑어보니 더 기가 막혔다. 진심으로 이걸 자료라고 준 건가?
“사신단의 이름, 작위, 좋아하는 요리… 요리? 이게 필요해 보여 준비한 자료란 말이지?”
“손님 접대에 취향 파악은 기본이지요.”
“이런 건 조금만 알아보면 바로 아는 정보 아닌가?”
“황제 폐하께서 전해 주라 하셨습니다.”
이 정도 정보는 사피오를 한 시간만 갈궈도 나오는 자료였다.
“한 시간은 아끼겠군.”
“다행이군요.”
사람 복장 터지게 하던 라르바는 곧 할 일이 많다며 돌아가 버렸다.
황제는 대체 무슨 의도일까.
앞으로 써먹을 나엘라, 지금부터 써먹겠다는 심보인가. 아니면 먼저 줬던 숙제가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다른 것부터 하라는 얘기일까.
뭐가 됐든 나엘라를 부려 먹겠다는 의미는 확실해 보였다.
“집안에 큰 어른이 없으면 자기가 할 것이지….”
나엘라의 짜증에 옆에 있던 제니도 맞장구를 쳤다.
“황태자 전하도 있으시잖아요?”
“황태자가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귀족들의 지지가 커질까 걱정스러운가 보지.”
데테로아에게 영영 황제 자리를 안 물려줄 셈인가? 어디서 불로장생의 약이라도 찾은 건지.
대체 얼마나 오래 황제를 하고 싶길래 이리 구는가 싶다. 귀족들도 밟아 놓고 데테로아도 밟아 놓고 뒤통수칠 것 같은 애들은 다 죽이고.
“그렇게 싹 정리하면 남은 인생은 마음 놓고 살 수 있다 싶은가 보지?”
“황제 성격에요? 절대 아닐걸요. 평생 의심하며 살 사람이에요.”
“그 성격 때문에 수명 깎아 먹을 거야.”
“그나저나 사람들에겐 뭐라고 공표할까요? 요반나 사신 접대를 나엘라 님이 한다는 이야기가 돌면 귀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 텐데.”
“제일 최악은 뽑아 먹을 거 뽑아 먹고 입 싹 닦는 거지.”
협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지, 접대는 어떻게 할지 나엘라가 모든 일을 처리한 뒤 정작 황제가 공을 다 가져가면 정말 열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엘라 님이 판 다 짜고 황제한테 보고하면 다음 날 독 든 음식이 오는 거 아니에요? 죽을 정도의 독은 아니더라도 한 며칠 누워 있으라고.”
“그사이에 내가 짠 판대로 자기가 움직이고? 생각만 해도 열받네?”
이미 한 번 독을 먹은 적이 있기에 합당한 의심이었다.
“그래도 독을 주면 먹고 누워 있어야지.”
“너무 치졸한 짓일 것 같은데.”
“치졸하다, 라….”
나엘라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맞아. 황제는 나한테 이미 한 번 독을 먹였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뭐가요?”
나엘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감시자 말고 또 있다던 황제의 비밀 기관이 생각났다.
처음 단둘이 만났을 때 자신에게 독을 먹였던 황제.
하나를 노려 여러 이득을 보려 했던 황제.
그 두 가지를 계속 생각하며 나엘라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맞네, 맞아.”
“뭐가요?”
“아… 황제가 또 독 줬으면 좋겠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나엘라의 패턴에 제니만 영문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
“요반나 왕국은 테사 제국의 북쪽, 아이안 공작령에서 배를 타고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섬을 기바으로 한 나라입니다. 때문에 사방이 바다에 물에는 석회질이 섞여 있고, 토양 역시 농작물이 자라기에 적합한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식량의 대부분을 제국과의 무역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체드란이 쓰던 집무실에는 원래 있던 소파와 티 테이블이 빠지고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자리 잡았다. 제일 안쪽에 자리한 책상은 그대로 두었고 가운데에는 원형 테이블, 오른쪽에는 벽을 가리지 않도록 모든 장식품을 치워 버렸다.
그리고 그 벽에는 현재 커다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사피오는 종이에 써진 그림과 도형, 글자들 가운데 ‘식량’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런데 대공비 전하. 꼭 이렇게 회의해야 합니까?”
체드란과 코더 밑에서 일했던 사피오는 자신이 집중된 가운데 발표하는 것처럼 보고하는 모양새를 부끄러워했다.
“마호세르디에선 항상 이렇게 일했어.”
“저는 아직 낯설어서….”
“그럼 앞으로 익숙해져.”
사피오는 이 방식이 익숙지 않아 부끄럽다는 거지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기존에 하던 방식과 다르게 좀 더 집중되는 기분이 들었고 새로운 방식은 늘 설레기 마련이었다.
“흠흠, 그래서 아마 이번 사절단들 또한 현재 포로로 잡혀 있는 요반나 왕족의 무사 귀환 보다는 황제의 기분을 풀어 주고 얼마큼 사면받을 수 있는지에 집중할 겁니다.”
“제국 입장에서는 먼저 우위를 점하고 시작하는 협상이지. 반란, 그리고 무역. 그 정도는 황제도 알고 있을 거야. 문제는 황제가 나를 이용해서 뭘 얻고 싶냐는 거야.”
“저는 여기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부분은 황제의 욕심이 어느 정도냐를 파악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이번 일로 요반나를 완전히 복속시킬 건지, 아니면 보상금만 거하게 뜯어먹고 자치적으로 나라를 굴리도록 그냥 둘 건지 말입니다.”
“복속의 정도는?”
“제국 아래에 두는 정도는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로 요반나 왕실에 목줄을 거는 정도에서 그칠지, 아니면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합니다.”
“내정 간섭이라…. 아예 제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선택지는?”
“명분이 조금 약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또 다른 반란 분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하는데, 과연 요반나 왕이 순순히 물러날까요?”
요반나를 아예 없애 버리고 그 땅을 제국으로 흡수하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었다. 왕실을 전부 정리해야 하는 데다 혹시나 들고 일어날 반란 분자를 확실히 처리해야 했다.
그럼 이번 일로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득은 내정 간섭인데…….
“식민지도 어려울 거고 내정 간섭을 하려면… 역시 요반나에 기관 하나를 만드는 게 낫지.”
“기관이요?”
“표면적으로는 외교 기관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이 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요반나에서 계속 머물게 하는 거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요반나의 내정 간섭을 할 수 있도록 이번 협상 때 권한을 얻는 거지.”
“그럼 수시로 내정 간섭을 하기 위해선 포괄적인 명분이 필요하겠군요.”
나엘라는 사피오와 이야기가 잘 통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일을 하고 보니 확실히 잘 맞았다.
“맞아. 예를 들면 지금 포로로 잡힌 요반나 왕족이 황후의 반란을 도운 이유를 조금 꾸미는 거지. 황후의 반란이 성공하여 제국의 뒷배를 얻은 왕족이 요반나로 돌아가 왕좌를 차지하려고 했다면?”
제국의 반란이 요반나 내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건 한순간의 일이다. 하지만 반란은 실패했고 제국이 먼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협상 때 말하는 거다.
“요반나 내의 반란 분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 잡힌 왕족이 말하길 반란을 주도하던 세력이 아직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제국은 요반나의 평화와 왕의 안전을 위해 군사력을 제공하겠다. 단, 왕 또는 왕실의 안전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즉시 자체적으로 움직일 순 있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요반나 내에 제국군이 주둔하든, 아이안 공작가에서 요반나 허락 없이 출병하든 자체적인 군사권이 생기게 된다. 그걸 기반으로 내정 간섭에도 쉽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던 사피오는 예상보다 큰 조건이라는 판단이 들었는지 조금 핼쑥해졌다.
“왕과 왕실의 안전이라…. 만약 왕의 의견을 귀족이 반대한다면… 혹시 반란 분자일지도 모르니 제국의 군대가 나설 수 있겠네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지. 완전히 요반나를 주무르고 싶다면 우리에게도 처벌권이 있어야 해.”
그래야 귀족들이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귀족들을 처벌할 수 있고 군사력도 있는 제국의 외교 기관, 어쩌면 힘을 얻고 싶은 자는 오히려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우와…. 상당히 잔인하시네요.”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 데테로아 황태자가 황제에 올라가는 순간 협상 무르고 전부 철수시키라고 할 거야.”
“왜요? 잔인하긴 하지만 외교적으로 강점인데 굳이 철수까지 시킬 필요 있나요?”
“황태자가 황제가 될 때 제국은 혼란이 가득할 거야. 어쨌든 정상적인 즉위가 아니고 황제의 만행도 까발려져 있을 테니까. 그때 요반나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면 외교 기관은 오히려 독이야.”
인류애적인 관점은 아니다. 요반나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씁쓸하기는 했다.
“요반나는 사방이 바다인 만큼 자기네들끼리 싸우기도 쉽고 뭉치기도 쉬워. 왕국민 특성이 그런 것 같더라고. 우리가 공동의 적이 될 필요는 없지.”
우리 쪽에도 출혈이 상당할 거다. 제국이 혼란에 빠진다면 요반나는 왕국 내의 외교 기관을 아니꼽게 볼 테고 원치 않는 피가 흐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 내용을 정리해봐. 선택은 황제가 하는 거니까.”
황제의 새로운 숙제는 이렇게 간단히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