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사피오가 정리해 온 보고서를 살펴보던 나엘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깔끔하네.”
딱 내정 간섭에 대한 것들로만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 협상 조건, 저쪽에서 반대하지 못할 명분 정리, 외교 기관에 대한 체계까지.
또한, 요반나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게 나은지, 아이안 공작가 쪽에 상비군을 주둔시키는 게 나은지에 대한 이야기도 각각 장단점을 들어가며 정리되어 있었다.
“됐어. 이만 가 봐.”
그만 나가보라는 말에 사피오의 얼굴이 조금 이상해졌다. 어째 불만이 담긴 얼굴이었다.
“그게 끝입니까?”
아무래도 사피오는 칭찬 한마디 없이 내보내는 그녀의 태도가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이 모습만 보아도 그동안 코더나 체드란이 그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좋은 아이디어 하나만 나와도 열심히 칭찬했겠지.
사피오가 일을 잘하긴 해도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엘라는 사피오를 곱게 굴릴 생각이 없었다.
“내정 간섭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가 냈고, 구체적인 틀도 내가 잡았고, 너는 그걸 정리하기만 했는데?”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추가적인 자료도 전부 조사했는데…….”
“사피오.”
“예?”
나엘라는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사피오는 머리도 좋고 일도 잘한다. 그건 확실히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가 일하던 스타일은 전부 톨레로의 방식이었다.
톨레로가 만들어진 이유는 체드란에게 얼핏 들었다. 설립 계기를 듣다 보면 그 구조가 어떨지도 예상이 됐다.
어렸던 사피오의 눈에 자신을 구해 주고 묵묵히 지원해 주던 체드란이 어떻게 보였겠는가. 그에 대한 존경과 충성은 당연한 일이었다.
코더 또한 체드란을 대신해 전반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하니 사피오에겐 가족이나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하나 구축된 관계와 별개로 영업 이익을 위한 상단의 체계는 달라야 한다. 톨레로에 사피오만큼 똑똑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체드란이나 코더는 사피오가 무엇을 하든 각자의 방식대로 응원하며 상단을 키우는 동안 내내 칭찬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체드란은 나엘라에게도 뒤에서 묵묵히 지원을 해 주었다.
“내가 저번에 내 밑으로 들어오라던 말 기억해?”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 답은 안 했지?”
“예….”
“그럼 미리 말할게. 내 밑으로 들어오면 지금까지 일했던 것처럼 대우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상단 하나에서 멈췄던 사피오의 세계는 앞으로 제국 전체로 넓어질 거다. 앞으로 그는 나엘라가 없을 때 그녀를 대신할 만큼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네가 겨우 이 정도 일로 칭찬을 받고 싶다면 너의 한계도 겨우 여기라는 뜻이야. 미안하지만 난 따뜻한 상사가 될 생각이 없고 너에 대한 기대도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어.”
더 큰 세상에서 일하고 싶다면 사고방식도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겨우 이 정도로 만족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난 지금부터 이 보고서를 들고 황제에게 갈 거야. 저번처럼 이번에도 독을 먹게 될지도 몰라. 어쩌면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 해독제를 받지 못할 수도 있어. 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더 많은 것들을 얻어 내기 위해 움직여.”
그러니 윗사람인 거다. 아랫사람들을 모두 책임지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니까.
“그런 나를 따라오려면 네가 여기서 멈춰서는 안 돼. 만약 황제가 이 보고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 목숨과 더불어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위험해질 거야. 지금 넌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사피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지금껏 책임지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거다. 사피오가 무엇을 하든 책임은 언제나 체드란과 코더가 졌을 테니.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는 없다. 나엘라가 없을 때 그녀를 대신할 사람은 사피오가 되어야 했고, 책임 또한 그가 져야 한다.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건 보다 큰 세상에서 많은 걸 감당하고 살겠다는 거야. 앞서갈 자신은 없어도 나를 따라잡을 자신은 있어야지. 그리고 언제까지 내 밑에 있으려고?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도 나에게 의지할 거야? 나를 뛰어넘을 수 있겠어?”
제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사피오가 이 말에 좌절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역량은 앞으로 더 피어날 것이다.
“나가 봐. 잘 생각해 보고.”
어두운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는 사피오는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너무 큰 짐을 얹어 준 건 아닌지 안쓰럽긴 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사피오는 무럭무럭 커서 자신을 대신해야 하니까. 그래야 나중에 체드란이랑 놀러 다닐 수 있다.
사피오가 나가고 나엘라는 지안을 불렀다.
“라르바에게 준비됐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이제는 황제를 만나러 갈 때였다.
*
“다 좋아요. 다 좋은데…… 왜 여기죠?”
지엘라의 눈빛이 나엘라에게 내리꽂혔다.
“병문안을 왔어요.”
지엘라는 제국으로 돌아온 뒤 처녀일 적에 썼던 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그녀는 진작에 요반나 왕실로 돌아갔어야 했으나 납치 사건을 겪으며 그 충격으로 건강이 상해 아직 체류 중이었다.
“병문안을 온 것까진 좋아요. 같이 납치를 당했으니 오히려 늦게 찾아온 감도 있죠. 그런데 왜 황제와의 밀회를 여기서 하냐고요.”
“밀회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니까.”
지엘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덮었다. 후우, 심호흡까지 가다듬으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닙니다.”
나엘라라고 오고 싶어서 왔겠나. 지엘라를 보는 건 좋았지만 그녀의 궁에서 몰래 황제를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가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지엘라의 병문안을 가는 척하며 기다리라던 말을 황궁으로 향하던 마차 안에서 들었다. 황당했지만 이미 출발을 한 터라 그 속셈까진 알아보지 못했다.
망할 라르바, 왜 따라오나 했다.
“그래서 언제쯤 만나는데요? 아니, 제 궁 어디서 만나는데요?”
“음… 모르겠네요. 그냥 지엘라 부인을 만나고 있으면 연락이 올 거라고 했습니다.”
“하아….”
답답한 건 나엘라도 마찬가지였으나 계속 신경 쓰고 있다 한들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참에 최선을 다해 병문안이나 할 생각이다.
“그래서 몸은 어때요?”
“대공비께서 시킨 대로 착실히 아픈 척 중입니다.”
“이왕이면 상사병이 제일 좋을 텐데. 그래야 마호세르디로 가는 핑계도 대고.”
“절대 안 돼요. 다나한 경에게 연락할 생각 하지 말아요.”
“오라버니에게 이미 말해 놨는데요?”
지엘라가 눈을 꾸욱 감고는 이를 악물었다.
여러 일을 겪어서인지 표정이 참 다양해졌다. 전에는 늘 완벽하고 차갑기만 하더니. 나엘라가 이전보다 편해진 걸까.
어쨌든 어지간히 열받은 모양인데 하녀들을 다 내보내 흉을 볼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뭐라고 보냈어요?”
“지엘라 부인이 있는 궁에 들르라고요.”
“다나한 경은 제스라 왕국과 전쟁 중 아닌가요?”
얼마 전 마호세르디 국경 근처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덕분에 고향은 전란에 휩싸여 있었다.
“얘기 못 들으셨군요. 아버지께서 황제 폐하께 공작위 승계를 언급하셨습니다. 정식 승계를 받기 전에 그에 관한 준비로 수도에 한번 올라와야 해요.”
“그 바쁜 와중에 뭐하러 여길 와요.”
“지엘라 부인을 마호세르디로 보낼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상사병으로요?”
“그게 제일 좋아요. 그게 아니면 요양 여행을 굳이 마호세르디로 갈 이유가 없죠. 결혼 전에 꾸준히 마호세르디를 오갔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요. 이번에 다나한 오라버니를 보고 다시 흔들렸다고 하면 되죠. 좋은 가십이 될 겁니다.”
그래야 여행을 마호세르디로 가겠다고 바득바득 우겨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병석에서 머무르던 중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첫사랑을 보고 상사병이 생겼다고 하면 되니까.
지엘라가 마호세르디를 고집하며 억지를 부려도 사람들은 이해할 거다. 변명에는 사랑과 관련된 가십이 제일 좋으니까.
“나는…….”
지엘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복잡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나한 경을 볼 자신이 없어요.”
“목숨보다 중요한가요? 지금 요반나로 돌아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이번 협상 때 불평등 계약을 맺을 생각이니까요.”
지엘라의 심란한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아무래도 다나한을 다시 본다는 건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킬 테니까.
하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할 리는 없었다.
“나는…… 죽더라도 그 사람에게 당당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사랑 앞에서도, 목숨 앞에서도 당당한 사람이요.”
하지만 나엘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엘라의 사랑은 남들보다 심오했고 단단했다.
하긴 그렇게 대쪽 같은 사람이니 추문이 일든 말든 마호세르디를 찾아온 걸 테다. 그러니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온 마음으로 다나한을 사랑했을 거고.
“일단은 알겠어요.”
이 문제는 나엘라가 끼어들 수 없다. 아니, 끼어들어선 안 된다.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문제이니 다나한이 해결해야 했다. 다나한도 지엘라가 요반나로 돌아가면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때, 라르바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대공비 전하,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지엘라가 전부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라르바는 돌아가야 한다며 나엘라를 불렀다.
말에 숨겨진 은근한 재촉을 느낀 나엘라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는 말과 함께 일어났다. 지엘라가 이렇게 확고하다면 다나한만이 설득할 수 있을 터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방을 빠져나오자 라르바가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지엘라의 궁임에도 라르바는 당연하다는 듯 앞서 걸었다.
계단을 내려온 두 사람은 뒤쪽 입구로 향했다. 주방과 온갖 창고가 자리해 있는 곳이라 주로 하인들이 오가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야 할 그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기묘할 정도로 고요한 긴 복도를 지나 작은 문을 열고 나오니 온갖 집기를 모아 둔 뒤뜰이 보였다. 그곳을 지나쳐 걷자, 가끔 하녀들이 쉬는 용도의 작은 분수대 하나가 다른 궁과 마주 보며 우뚝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는 황제가 서 있었다.
황제의 옆으로는 근위대 기사들이 분수대를 둘러싸고 나엘라가 들어갈 길만 살짝 터 준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예를 보이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저 멀리 서 있던 단제와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어떤 답을 가져왔느냐.”
“요반나와의 협상, 확실한 속국으로 만들겠습니다.”
황제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정 간섭이란 단어가 얼마나 탐나는 것인지는 안다.
나엘라는 천천히 황제에게 다가갔다. 내정 간섭이라는 단어만큼 자신 또한 탐나는 독 사과임을 감춘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