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나엘라는 챙겨 왔던 보고서를 건넸다. 황제는 무심한 눈길로 한 장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무혈입성이라고 하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정 간섭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황제가 끝없이 욕심을 부린다면 속국으로 만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국군들의 피를 뿌려 가며 요반나를 점령하기보단 안에서부터 흔들어 국력을 약하게 만들고 조각내면 된다. 그 뒤에 아주 손쉽게 파이를 먹는 것이고.
“내정 간섭이 시작되면 그 뒤는 일사천리입니다. 제국 외교 기관을 이용해 귀족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현재 요반나 왕실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세를 얻은 귀족들이 각 영지에 왕실 권한을 점차 줄여 가게끔 만들면 됩니다.”
한번 권력을 맛본 자는 절대 그 힘을 놓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원하는 법이다. 그때 중요한 것은 한 가문이 큰 힘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왕실의 힘은 최대한 약화해 놓고 귀족들의 힘은 서로 비슷하게끔 유도해야 합니다. 서로 싸움이 될 수 있게요.”
저들끼리 싸워 출혈이 일어나도록 만든다. 그래야 요반나가 황폐해지고 더욱 물자가 필요해질 것이다.
이때 제국은 군수 물자를 팔며 그들의 싸움이 더욱 격해지도록 만든다.
“요반나는 현재 영지전을 하려면 왕실의 허락이 필요하고, 또 도를 넘는 순간 왕실에서 중재합니다. 우선 그것부터 바꾸어도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영지전에 관한 법 개편을 요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제국의 의도를 의심하고 저들끼리 뭉칠 수도 있었다.
“처음엔 제국도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각 영지가 부유해져야 귀족들이 부유해지니, 그 부분은 지원해야 할 겁니다.”
먼저 귀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전쟁할 생각도 들 것이다. 부유해진 귀족들에게 권력적으로 힘을 실어 주고 그들끼리 불화를 만드는 게 첫 목표였다.
영지전에 관한 법 개정은 왕실의 힘을 약화한 다음이다. 귀족들도 저에게 이득이 돼야 법 개편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그렇게 귀족들의 싸움이 시작되면 왕실에서 제국에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이미 귀족들을 왕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때는 정말 무혈입성이 되겠군.”
“제국군이 투입되는 순간 귀족들의 싸움은 주춤할 겁니다. 그 이후 파이를 먹는 건 제국군을 출전시킨 것에 대한 보상금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죠.”
“대가를 받고 난 뒤에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제국군을 안 물리면 됩니다.”
그렇게 입성하게 되는 제국군은 외교 기관이 들어서며 주둔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눈치를 보며 행동하던 것들이 이제는 목숨의 위협이 될 테니까.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요반나가 그리 매력적이진 않은데.”
“바로 옆에 제국이 있는데도 요반나가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왕국민들의 특성도 있겠지만, 사치품에 쓰이는 원재료가 풍부한 점이 큽니다. 또, 왕국 하나를 먹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제국의 피는 흘리지 않을수록 이득입니다.”
“이상하게 그 작은 섬나라에 보석 광산도 많고 고급 품종의 나무도 많지.”
“제국 황실이 그런 것들을 꽉 손에 쥘 수 있다면요? 귀족들의 사치품만 독점해도 돌아오는 이익은 상당할 겁니다.”
귀족들이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부분 중 하나가 사치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북부 무역이 황실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원재료가 들어올 때마다 경매로 가져가는 형식이었다. 보통은 가공할 수 있는 장인들에게 넘어가지만, 만일 황실에서 원재료와 장인들을 모두 독점한다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요반나산 모든 사치품이 황실의 손을 거치게 될 테니까.
“요반나 사신단과의 협상 하나로 거기까지 생각할 줄은 몰랐군.”
“일을 크게 벌리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나쁘지 않아.”
겨우 나쁘지 않다는 말로 끝낼 건 아닌데 말이다.
협상 하나로 내정 간섭, 요반나 무혈입성, 속국, 제국 귀족들의 돈을 빨아들이는 것까지 계획했는데 구미가 안 당길 리가.
황제는 보고서를 옆에 있는 이에게 건넸다. 이제 보니 이곳에 있던 자 중 유일하게 기사가 아닌 자였다. 검도 없고 체격도 운동한 체격이 아닌 데다 수염도 길게 늘어뜨려 학자 같은 인상이었다.
누구일지 예상이 되어 나엘라는 그자를 유의 깊게 보았다. 인상착의를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떤가?”
황제의 물음은 나엘라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내정 간섭은 괜찮지만, 속국으로 만드는 방법은 너무 오래 걸리고 복잡합니다. 제국의 기사들은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생겨서 뭐가 어쩌고 어째? 학자가 아니라 염소같이 생긴 것으로 나엘라는 정정했다.
황제의 시선이 마치 반론하라는 듯 나엘라에게로 향했다.
“제 방법을 써서 속국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면 내정 간섭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하러 제국의 귀한 인력을 요반나로 보내야 하나요.”
염소는 나이도 어린 나엘라에게 한소리 들었다는 점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상당히 울컥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내정 간섭으로 포문을 열고 점령을 시작하면 됩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요반나의 점령은 단번에 끝날 겁니다.”
“전쟁을 겪어 보지도 않은 듯하시니 방금 모자란 말씀은 이해해 보겠습니다. 일단 요반나의 주조 기술과 조선 기술에 비해 제국은 아직 손색이 있습니다. 해군 또한 사방이 바다인 사람들과 차이가 없을 리가요. 또한, 전쟁이 시작되는 즉시 외교 기관은 인질이 될 겁니다. 그래서 무혈입성이 중요한 겁니다.”
염소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졌다.
모자란 말씀을 이해해 보겠다고 해서 그런 걸까. 그런데 정말 모자란 발언인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럼 제국이 요반나와의 전쟁에서 질 거란 말입니까?”
“아뇨, 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출혈이 상당할 거란 얘기입니다. 제국군이 약화되는 건 귀족들을 견제할 패가 약해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염소는 제 분에 겨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저 황제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낼 순 없으니 참는 것 같았다.
나엘라도 굳이 이런 자리에서 싸울 필요가 없다 생각해 말을 줄였다. 이로써 나엘라가 저 염소보단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했으니 되었다.
“그대는 그만 가 보게.”
황제는 손짓으로 염소를 보냈다. 마지막까지 나엘라를 노려보던 그가 거친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일이 대충 마무리되자 황제는 나엘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무언가 병을 꺼내 건넸다. 설마 하며 바라봤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독일세.”
“제 소임이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겠습니다.”
“일주일 정도는 일어나지 못할 걸세.”
돌아가면 제니에게 영험한 기운이 있는지 물어야겠다. 황제의 행동을 딱 맞췄으니.
“안 마시고 그냥 쓰러진 척하는 것은 안 되겠지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맨정신으로 독을 마시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겨우 일주일 정도라고 해도 껄끄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진짜 일주일일지, 한 달일지 모르는 것 아닌가.
“이곳은 지엘라의 궁이지.”
황제가 병을 한 번 흔들어 보였다. 반투명한 병 속에 무색의 액체가 함께 흔들렸다.
“그대가 쓰러지면 근위대가 집까지 데려다줄 걸세.”
“호위 기사라면 궁 앞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근위대의 도움을 받게나.”
왜 근위대여야 할까. 근위대의 행적은 곧 황제를 뜻했다. 근위대의 도움을 받는다면 황제가 나엘라를 집까지 데려다준 것과 같은 의미였다.
“딸이 독을 썼는데 내가 그 죄를 덮어야 하지 않겠나.”
욕이 나오려는 것을 혀를 깨물어 참아 내었다.
황제는 파르로시가 재판을 받을 때 썼던 방법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지엘라가 나엘라에게 독을 먹였고, 그걸 알게 된 황제가 아비 된 마음으로 일을 덮으려 나엘라를 집까지 데려다준다.
참 좋은 이야기였다.
그 말인즉, 황제는 언제든 지엘라를 처벌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엘라가 무엇이든 잘못을 하면 지엘라를 재판장으로 보내 버리겠다는 협박이었고.
나엘라의 약점이 지엘라가 된 것이다.
이를 악문 그녀는 황제의 손에서 병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뚜껑을 열어 망설임 없이 마셨다. 혀를 타고 넘어가는 액체가 펄펄 끓는 물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해독제는 없네. 앓고 나면 나아질 약한 독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황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근위대 전체가 움직이고 나엘라의 옆에는 몇 사람만 남았다.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나엘라를 붙잡은 근위대는 그녀를 마차까지 부축해 주었다. 대기 중이던 호위 기사들과 하녀들이 놀라 뛰어왔지만, 근위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코 마차 안까지 데려다준 그들은 저택까지 따라올 생각인지 말을 가져왔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호위 기사들과 근위대에 둘러싸여 저택으로 향했다.
“이것 참….”
핑핑 돌기 시작하는 시야에 나엘라는 누울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세요?”
함께 왔던 제니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나엘라는 웃을 뿐이었다.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을까. 오늘 너무 좋은 걸 알아 버렸는데.
“황제는 치졸한 새끼가 맞았어.”
“예?”
“그릇이 바늘구멍만 한다고.”
황제의 성격을 들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황제는 툭하면 남의 약점을 잡아 협박했고 매번 약점이 잘 먹히는지 확인까지 했다. 나엘라에게는 처음부터 독을 먹이지 않았나.
그 모습은 마치 언제든 손을 쓸 수 있다 자신감을 내비치는 것처럼 보이나, 황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의심과 욕심이 많고, 무엇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릇이 작으니 뭐 하나에 벌벌 떨며 매번 약점이 아직 유효한지 확인하는 것이고.
고양이가 적을 만나면 몸집을 부풀리는 행동과 다를 것이 없었다.
황제는 그저 연기를 잘해 왔을 뿐이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이용해 온 만들어진 이미지였다.
그렇게 그릇이 작으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 것을 뺏길까 전전긍긍하는 것이지.
“하지만 황제를 무시하기엔 너무…….”
제니가 무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나를 노려 두세 개의 이득을 얻는다,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다.
그러한 방식으로 황제는 상대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호세르디 공작만 보아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그건 잘 만든 이미지에 불과해. 실제로 황제는 그렇게 대단한 자가 아니야.”
“네? 그럼 이때까지 황제가 벌였던 일은…….”
“마리즈 마호세르디 부인이 알려 준 또 하나의 패.”
그녀는 감시자들 말고, 황제가 숨겨 둔 또 하나의 패를 언급했다. 황제의 뒤에서 그의 두뇌가 되어 주는 기관이 있다고.
그들이 지금껏 두려운 황제의 이미지를 만들어 온 존재였다.
오늘 나엘라가 확인한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황제는 그들이 없으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만 먼저 처리하면 황제를 손쉽게 몰아낼 수 있다.
독으로 눈앞이 어지러웠으나 나엘라는 환히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