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62)화 (162/220)

Chapter 17. 사냥하는 자

161화

마든은 체드란의 무장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무장하고 검을 차고 있지만, 체드란이 무장하는 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했다.

“마호세르디는 벌써 전면전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마든의 말에 체드란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검을 확인했다.

“우리도 시작해야지.”

그러기 위해 체드란이 무장했으니 정말로 전쟁에 돌입하는 건 오늘부터였다.

지금껏 전시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든과 론체가 끌고 오던 것과 체드란이 중심을 잡는 것은 그 안정감부터 완전히 달랐다. 이제야 한시름 놓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검에 달린 건 뭡니까? 웬 넝마 조각을 달고 오셨습니까?”

설마 검 장식인 건 아니겠지?

무운을 비는 검 장식을 보통 매듭의 형태로 손잡이 끝에 매달곤 한다. 하지만 체드란의 검에 걸려 있는 건 웬 넝마 조각이었다.

“나엘라가 직접 만든 건데.”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도 이길 것 같다 싶었습니다.”

나엘라가 만들어 줬으니 체드란이 달고 있었을 텐데 그 생각까지 차마 못 했다. 마든은 능청맞게 덧붙이면서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는 끝났나?”

“밖에 노헤스카 기사단과 병사들 모두 대기 중입니다.”

“말고 회색 머리 기사 말일세.”

마든은 멋쩍게 웃으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바보같이 도망만 다녔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네. 준비됐습니다.”

“잿빛 머리 기사는 검을 들고 있을 때 가장 멋있네.”

어깨를 툭툭 다독이는 손길에 옛 기억이 떠올랐다.

검을 들 때 가장 멋있는 사람. 그 말과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진정 검을 들고 전장을 누빌 때 가장 멋있는 사람, 노헤스카의 모든 기사가 선망하고 따르는 피에 미친 전쟁광인 그들의 주군,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

그 소문은 겨우 펜이나 들고 있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별명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다시 그 전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마든은 왠지 모를 감흥에 살짝 몸을 굳히고 주먹을 쥐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막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정말 의외의 인물이 와 있었다.

“사피오?”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마든이 표정을 와락 구겼다. 그러건 말건 사피오는 의아해하는 체드란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고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제가 시간 맞춰 도착했네요.”

“무슨 일이지?”

“대공비 전하께서 본인 대신 출정식을 보고 오라셔서요.”

직접 오지 못하는 대신 나엘라가 보낸 깜짝 선물인 모양이다.

“그리고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짧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출정식이 코앞이기에 꺼낼 말이 아님을 사피오 역시 잘 알았다. 지금 바깥에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잘 아는 만큼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곳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가야 했기에 시간이 마땅치 않아 무리한 부탁을 전한 것이다.

“마든, 잠깐 나가 있게.”

결국, 체드란은 마든을 먼저 내보내곤 소파에 앉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쭈뼛쭈뼛 다가온 사피오도 왼쪽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이건 그동안의 진행 상황과 대공비 전하께서 알아내신 정보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품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낸 사피오는 지체없이 체드란에게 건넸다. 그 안에는 그동안 황제가 낸 숙제와 그 해답, 또 나엘라가 따로 알아보았던 감시자들과 또 다른 기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나엘라가 출정식을 보고 오라는 핑계와 함께 전해 주라던 중요한 정보였다. 정보의 무게 때문에 이 시기임에도 사피오가 직접 움직여야 했다.

체드란도 알고 있는 것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제가 대공비 전하께 한 가지 제안을 받았습니다. 대공비 전하 밑으로 들어오라고요.”

뜻밖의 말일 텐데도 체드란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들었으니 답은 대공비 전하께 드려야 함이 맞지만 가장 첫 번째로 주군께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사피오는 그 제안에 관해 제법 오래 고민했다. 생명의 은인이자 지금까지 모든 지원을 해 주며 믿어 준 체드란을 두고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을까.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엘라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뛰었다. 제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까닭이었다.

더 큰 세상, 그건 사피오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저는… 대공비 전하와 함께 일해 보고 싶습니다.”

나엘라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는 반죽음이 되어 돌아온 모습을 본 이후였다. 황제를 만나고 저택으로 도착한 나엘라는 열이 과히 끓어올라 위험한 지경이었다. 약으로도 해열이 되지 않아 욕조에 얼음을 가득 쏟아붓고 물을 채워 나엘라를 담가 놔야 했다.

이틀을 꼬박 앓고 정신 차린 나엘라는 제일 먼저 사피오에게 출정식을 다녀오라 말했다. 체드란이 전쟁을 나가는 모습, 보고 싶어 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주군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주군의 일을 도맡아 하는 것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요, 그런 꿈도 꾸었습니다. 주군께서 마음 놓고 전쟁에 나가실 수 있도록 제가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자고요.”

그렇기에 열심히 지난날을 달려왔다. 체드란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엘라가 독에 당해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보고서를 만들며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던가?

제가 한 일로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며 살았던가?

사실 나는 너무 작은 우물에서 하찮은 능력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던 건 아닐까.

“제가 얼마나 모자란 사람인지 깨달았습니다.”

체드란에게 나엘라가 그렇게 아팠다는 것을 말해선 안 된다. 그녀가 절대 엄금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더 큰 세상에서 제대로 배워 보고 싶습니다.”

나엘라가 체드란에게 전해 주라며 황제와의 대화를 정리해 줄 때 정말 놀랐다.

내정 간섭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거기서 더 나아가 요반나를 속국으로 만들고 제국 귀족들의 돈줄을 잡을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 강렬히 느꼈다.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울 기회라고,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하는 기회라고 말이다.

“물론 주군께 배울 게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주군이 걸어가시는 길과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피오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던 체드란에게 못 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이야기를 듣던 체드란이 그때야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예?”

“사람들이 곧잘 잊는 모양이야. 나엘라와 나는 부부다. 나엘라가 걷는 길이 곧 내가 걸어갈 길이지.”

사피오가 눈을 깜박거렸다.

“네가 내 밑에 있든 나엘라 밑에 있든 결국 같은 일을 한다는 걸 왜 모르지?”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나엘라가 하는 일이 잘되면 체드란에게도 이득인데 왜 따로 생각했을까.

“나엘라의 인상이 어지간히 강했나 보군.”

사피오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제게 얼마나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그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너를 왜 코더와 함께 두었는지 아는가?”

“그건…… 아무래도 제가 공부도 해야 하고 상단 일도 해야 하니까…….”

“그렇지. 나와 함께 있으면 전쟁하는 것밖에 못 배웠겠지만 너는 검에 관심이 없었지.”

사피오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체드란의 손길을 느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정한 손길이었다. 울컥, 그날의 감정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를 뿐, 가는 길은 같다.”

사피오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직 어리긴 어렸다.

체드란도 미안한 것이 많았다. 사피오는 옛날부터 체드란의 옆에 있고 싶어 했지만, 톨레로를 감춰 놔야 했으니 여의치 않았다. 출정식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도 이제 알았으니 나엘라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나엘라의 밑에 있게 되면 모든 일이 끝나고 노헤스카에서 머물겠구나. 그때 되면 매일같이 보겠군.”

사피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 자신은 바보였나, 그 생각은 못 했다.

나엘라의 밑에 있으면 앞으로 노헤스카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녀가 대공령으로 돌아올 때 함께 돌아오면 되는 것 아닌가.

사피오의 표정이 밝아지자 체드란은 피식 웃었다.

“나엘라는 잘 있겠지?”

사피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네. 잘 계십니다.”

“잘 못 있나 보군.”

체드란은 다른 사람의 거짓말을 귀신같이 알았다.

“일단 출정식이 끝나고 다시 얘기하지.”

사피오는 출정식이 끝나자마자 마호세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을 넣어 두었다. 먼저 일어나는 체드란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노헤스카 대공령의 저택은 비상시에 대피소로 쓰이는 만큼 크고 넓었다. 그 모든 부지를 감싼 거대한 철제 울타리들은 사람 주먹만큼 두껍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그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대문이 오늘따라 활짝 열려 있었다.

저택 부지들이 꽉 찰 만큼 기사단과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흉흉한 기세가 사방에 퍼져 나갔다. 매서운 눈길은 모두 단상을 오르는 한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노헤스카 기사들의 선망이 되는 자, 전쟁터 최전선에서 늘 가장 먼저 검을 들어 올리는 자.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사방을 가득 채운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우리가 검을 들어 왔던 이유는 언제나 제국을 수호함에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사람들을 향해 파고들었다. 대공저 바깥은 마중 나온 영지민들로 가득했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올리고 복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이들의 무사 귀환을 빌 터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수호가 아닌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싸울 것이다.”

제국을 좀 먹는 자라면 그것이 두칸의 야만인이든 황제든 싸우게 될 것이다. 시작이 두칸일 뿐, 그들은 늘 제국을 위해 싸운다.

“더는 두칸을 봐주며 수호만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진짜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 줄 것이다.”

기사들의 열기가 더운 날씨보다 더 후끈 달아올랐다. 지금까지는 침략에 대해 전쟁을 했다면 오늘부터는 본때를 보여 주는 전쟁이다. 더 이상 봐줄 필요도 없었고 어중간할 때 물러설 필요 역시 없었다.

“상대가 야만인이라면 우리는 야만인을 사냥하는 더 지독한 야만인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그 지독한 행위에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전쟁광, 체드란은 늘 그런 별명을 얻어 가며 싸우던 이였다. 검을 쥐고 상대를 도륙할 때 가장 탐욕적인 사람, 전쟁터 한복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래도 꺾이지 않고 나아갈 것이며 끝내 누구도 손가락질 못 할 노헤스카가 될 것이다.”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지금 당장 검을 들고 싸우고 싶어 했으니.

체드란의 말에 기사들은 검을 붙잡고 몸을 꿈틀거렸다.

론체가 체드란을 대신해 소리쳤다.

“전원 준비!”

그들의 기세가 터져 나갈 듯 부풀어 올랐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출전이다!”

기사들의 함성이 천지가 개벽한 듯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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