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체드란이 엊그제 출정식을 했습니다.”
“승전보를 올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클루아조는 나엘라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은 척,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치 레이디인 척 새끼손가락을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능글맞은 태도에 나엘라는 비딱한 자세를 잡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체드란이 황도에 없다는 말입니다.”
“대공령으로 가셔야 하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런…… 황도에 절 말릴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협박입니까?”
“그러게 처음부터 황제가 어떤 자인지 알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요.”
황제가 그릇이 작고 옹졸한 자라는 걸 클루아조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황제의 바로 곁에서 감시자들을 만들며 은밀히 움직이던 자니까.
“마호세르디 공작님도 알고 계셨을 겁니다.”
클루아조는 마치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말했다. 역시 그 또한 황제의 대중적인 이미지와 소수의 사람만 아는 진짜 모습이 다르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모르고 계셨습니다.”
“황제는 강한 자에겐 기가 막히게 숨기니까요.”
“그럼 아버지가 뭘 알고 계셨을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의심은 하고 계셨겠죠. 그리고 황제가 생각보다 무서운 자가 아니라고 해도 제일 조심해야 하는 인물이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많기에 제일 음습한 자라는 말인가요?”
“그리고 가장 방심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알려 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뭐, 알았다고 해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대공비께서 스스로 황제의 본성도 파악하지 못하신다면 같이 일하기 힘듭니다.”
“날 시험했다는 말입니까?”
“설마요. 다만 금방 알아차리실 거라 믿은 거죠. 황제를 무서워하는 자가 황제를 어떻게 상대하겠습니까.”
“말은 잘하네요.”
입을 꾹 닫고 있던 클루아조의 태도가 아니꼬웠지만, 오늘은 그를 탓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나엘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제를 바꿨다.
“다른 정보 주시죠.”
“맡겨 놨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마호세르디 부인도 만났고 정보도 얻었습니다. 그러니 숨기고 있는 다른 정보를 주시죠.”
“이것 참…….”
이를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하듯 클루아조는 턱을 문질렀다.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고 해서 물러설 나엘라가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을 약속한 사이였다. 똑같은 목적이 있는 마당에 정보를 숨겨 봤자 속도만 느려지고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클루아조가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잖는가. 결국 발로 뛰는 것도, 황제를 상대하는 사람도 나엘라였다. 직접 움직이는 사람은 그녀이니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할 사람도 그녀였다.
“뭔가 억울하네요.”
나엘라의 말에 클루아조가 생각을 멈췄다.
“어떤 게 말입니까?”
“나는 이렇게 바쁜데, 클루아조 공자께선 하는 일이 뭡니까?”
“정보를 드리지요?”
“사실 제가 조금만 더 알아봤다면 알 수 있을 법한 정보라고 생각이 되네요.”
“그럼 제가 대공비 전하의 시간을 아껴드렸다고 치지요.”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단 얘기입니다. 모든 위험을 제가 감수하지 않습니까?”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클루아조와 계산기를 두드리던 나엘라는 동시에 눈매가 가늘어졌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아이안 공작이 되신 뒤 북부의 물류권을 다시 가져가게 되면 거래는 톨레로 상단과 하시지요.”
“너무 날강도 아닙니까? 북부 물류의 거래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아이안 공작이 되셔도 물류 거래권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을 텐데요?”
데테로아에게 말해 아이안 공작가의 권리를 되찾아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턱 밑에 칼을 들이민 듯한 협박에 클루아조는 어이가 없었다.
“과한 요구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나엘라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요반나에서 생산되는 사치품의 원재료, 그걸 중간에서 유통할 수 있다면 톨레로에 쌓이는 수익은 막대할 것이다. 차후 데테로아가 황제가 되어도 사치품에 대한 중간 물류는 손에 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감춘 뒤 그저 미소를 지었다.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하…!”
“너무 황당해하지 마세요. 현재 황실엔 요반나의 사신이 도착해 협상을 진행 중이죠. 그 협상 건도 제가 다 준비해 놨던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일주일 정도 저택 밖으로 나오지조차 못했습니다. 기껏 판을 짜서 보고했더니 황제가 독을 주더라고요. 벌써 두 번이나 독을 받았습니다.”
어느 누가 뭐가 좋다고 독을 두 번이나 먹겠는가. 자신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으니 정보만 줄 뿐 행동하지 않는 클루아조에게 얌전히 요구나 들어 달란 말이었다.
클루아조도 결국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죠.”
“다음엔 계약서를 가져오겠습니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 피곤한 신경전 끝에 먼저 손을 든 건 클루아조였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행이군요. 그래서 정보는요?”
“감시자들에 대한 겁니다. 그들의 구심점이 되는 기관과 건물의 위치, 그리고 감시자들 우두머리의 대한 정보.”
“아주 좋네요.”
“그런데 앞으로 계획은 있는 겁니까?”
“당연하죠. 이건 나중에 좋은 거래를 할 파트너에게 받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나엘라는 황제를 파악하자마자 세운 계획이 있었다. 그가 보여 줬던 태도, 성향,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세운 계획이었다.
“황제를 흔들 겁니다.”
“흔들어서요?”
“제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해야죠. 황제의 머리가 된다는 그 기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야겠습니다.”
이때까지 황제를 받치고 올려놓았으니 분명 쉽게 볼 곳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황제와 독대했을 적에 보았던 염소 닮은 늙은이, 분명 그자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염소 같은 늙은이야 상대하기에 어렵지 않았지만, 기관에 그런 자만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황제를 흔들고 저를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기관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겁니다. 모든 팔다리를 잘라야 황제를 상대하죠.”
나엘라는 그동안 세웠던 계획을 가볍게 전했다.
*
“폐하, 요반나 사신단과 진행한 협상 관련 보고서입니다.”
누군가가 창문 밖을 바라보던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나엘라가 보았던 염소 같은 늙은이, 헤르만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황제의 보좌관 중의 한 명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어둠 속에서 황제의 뒤를 받치는 기관 ‘센텐티아’의 수장이었다.
“센텐의 다른 이들은 뭐라던가.”
그가 수장임에도 황제는 늘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헤르만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의 수장으로, 황제에게 센텐의 의견을 전할 뿐이었다.
“노헤스카 대공비가 가져온 보고서에 다들 이견이 없었습니다. 이번 협상은 그저 요반나의 사신들이 얼마나 빨리 받아들이는지가 관건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 센텐에서 나엘라 노헤스카를 인정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헤르만은 아직도 그날 했던 말싸움이 생생했다. 맹랑하기 그지없는 대공비가 두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무시하던 것이 잊히지 않았다.
센텐에 돌아가서도 있는 욕, 없는 욕을 했지만 속이 풀릴 리 없었다. 되레 돌아온 것은 그래도 대공비가 꽤 대단한 것 같다는 다른 이들의 인정뿐이라 화만 부글부글 끓었다.
“확실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군.”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지자 헤르만은 더욱 깊이 고개 숙였다. 질투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협상은 언제쯤 끝날 것 같던가.”
“아마 오늘 내일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요반나 측에서도 저희가 제시한 걸 받아들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차라리 포로가 된 왕족을 죽여 버리고 조건을 낮춰 달라고 하더니.”
“요반나엔 왕족이 많아서 미련이 없는 듯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황제는 손을 내저었다. 그만 물러가라는 표시였다.
과연 황제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단 한 번도 그에게 시선을 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수치심까지 든 헤르만은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빠져나왔다.
센텐이 없으면 황제가 이리 단단히 자리를 잡았을 리 없다. 그의 자리가 공고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센텐의 힘이었는데 말이다.
거기다 자신은 그 센텐의 수장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헤르만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을 가득 채우며 걸음을 옮겼다.
*
체드란의 집무실에 나엘라와 사피오, 그녀의 하녀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황제를 흔드는 거야.”
“뭐로 흔드실 생각입니까?”
사피오의 물음에 나엘라는 이름을 적어 놓은 종이를 탁 붙였다.
“제일 먼저 건드릴 사람은 데테로아 황태자야.”
“예?”
황제를 흔드는데 갑자기 데테로아가 왜 나오는 걸까?
나엘라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사피오는 어리둥절해졌다. 나엘라가 같은 편의 뒤통수까지 칠지 몰랐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네. 뒤통수치는 거 아니야.”
“그러면요?”
“황제의 후계자는 단 한 명밖에 없어. 페트론 황자는 죽었고 체드란은 후계권을 포기했지.”
“하나 남은 후계자를 없애겠다는 겁니까?”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데테로아 황태자를 죽이겠다는 게 아니야.”
나엘라는 그 후계권을 위협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대외적으로 지금까지 데테로아 황태자와 체드란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황후를 계기로 잠시 손을 잡은 것이라 알려져 있지. 그걸 다시 틀어 버릴 거야.”
“황제는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의 사이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황제의 의심을 이용할 거야. 체드란은 전쟁을 위해 전력을 보강했고, 군사력을 꽉 잡은 마호세르디와 혼인까지 했어. 그렇다면 한 번쯤 황제의 자리를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황제가 믿을까요?”
“믿지 않더라도 의심은 하겠지.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부터 시작해 혹시 체드란이 황좌를 노리진 않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
데테로아의 황태자 자리를 위협하는 건 시작일 뿐이다. 황제는 곧 정신 못 차리고 흔들릴 것이다.
“그다음은 근위대야.”
“감시자들을 건드는 게 아니고요?”
“황제가 나를 믿게 만들고 찾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음…… 모르겠습니다.”
“황제의 머리가 되는 기관인 센텐티아, 팔다리가 되는 기관인 감시자들. 이 두 곳에 배신자가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해.”
그래서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됐을 때, 쓸 만한 이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나엘라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비중을 두기 시작하겠지.
나엘라는 그렇게 되도록 유도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