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요반나 사신단 환영 파티.
나엘라는 체드란을 대신해 대공비로서 참석해야 했다. 오전 중에는 황제와의 만찬, 오후에는 쉬다가 저녁에서야 파티가 열린다고 했으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녀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으…….”
“괜찮으세요?”
피곤함에 전 나엘라는 가린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둘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안 괜찮아.”
“제니와 지안이 수도에 와서 더 예민해진 모양이에요.”
“수도 귀부인들에게 기죽으면 안 된다고 난리네.”
이른 아침부터 지안과 제니에게 시달린 나엘라는 불편한 옷을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등을 기댔다.
“그래도 오늘 나엘라 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황후도 죽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수도의 귀부인들이 모두 사라져야 이 생활을 안 해도 될걸요.”
“반란보다 희대의 살인마가 되는 게 빠르겠네.”
지안과 제니의 극성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현재 사교계에서 가장 웃어른은 그녀나 다름없었다. 황실 사람인 지엘라는 아프다고 불참을 선언했고 파르로시는 본인의 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다.
그러니 대공비로서 다른 이들에게 무시받아선 안 되고 유행을 선도해야 한다나 뭐라나.
“하일모라랑 베르에티 영애가 잘해 줬으려나.”
얼마 전 자신은 두 사람에게 사교계를 휘어잡아 달라 부탁했었다. 쉽지 않은 일인 만큼 잘하고 있었을지 걱정이었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도 없었기에 그간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예정이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추고 들려오는 기사의 목소리에 나엘라는 지친 몸을 바로 세웠다.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진이 다 빠졌지만, 자신은 이 문을 나서는 순간 파티장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후! 잘하자.”
기합을 넣고 마차에서 내린 나엘라는 나와 있는 시종의 안내를 따라 홀에 입성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그녀가 입장한다는 시종의 외침을 듣곤 시선을 모았다.
오늘 그녀는 평상시 선호하던 딱 달라붙는 드레스가 아닌, 풍성한 드레스를 입었다.
동그랗게 부풀린 형태의 드레스는 아니었다. 어깨를 내놓고 가슴부터 시작한 드레스는 허리선을 타고 내려가 웨딩드레스처럼 퍼져 나갔다.
새틴처럼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검은색의 원단이 그녀의 걸음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위에는 반짝이는 망사가 원단과 기묘한 형태로 섞여 있었다. 풍성하면서도 비치는 느낌이 있어 드레스가 무거워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반 묶음으로 올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백금색 비녀를 여러 개 꽂으니 누가 뭐라 해도 이 밤의 주인공은 나엘라였다.
“어머…… 마치 밤의 여왕 같네요.”
누군가가 중얼거린 말이 눈치 보느라 조용하던 파티장을 갈랐다.
“그런데…… 설마 오늘 아무도 대공비 전하의 에스코트를 안 해 준 건가요?”
남편이 없다면 가족, 가족도 여의치 않다면 친분이 있는 기사의 에스코트라도 받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나엘라는 그 누구의 팔짱을 끼지 않고 당당히 홀로 나타났다. 마치 진짜 여왕이라도 된다는 듯.
“대공비 전하.”
파티장 한가운데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에게 줄리 부인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나엘라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잘 지내셨나요?”
반가운 인사만 나눈 후 줄리 부인은 나엘라를 끌고 한적한 구석으로 움직였다. 사담을 나누는 척 왔으나 도착과 함께 목소리를 낮추곤 말을 건넸다.
“대공비 전하께서 시키신 일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다과회를 열심히 열었습니다.”
하일모라와 베르에티를 도와달라 했더니 꽤 본격적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무슨 선물을 받을지 생각해 두지요. 아, 세레노피 부인은 저쪽에 있고 베르에티 영애는 저쪽에 있습니다.”
줄리 부인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일모라는 신생 귀족들과 중앙 귀족들의 무리에, 베르에티는 동부 귀족들의 자제 무리에 끼어 있었다.
“지역별로 뭉치게 되었네요.”
“원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제가 원했던 건 지역의 대표들끼리 만드는 정보의 장이었어요. 하지만 저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로열 중의 로열을 만들려는 생각이었으나 좀 더 이런 상태로 두어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베르에티가 동부의 대표로 인정받기 위해선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다. 하일모라도 마찬가지고.
“줄리 부인께서는요?”
“모르셨구나. 페즈몽레 백작 부인과 아가산 백작 부인이 저희 집에 매일 놀러 오고 있어요.”
남부를 꽉 잡았다는 이야기였다.
찡긋 윙크를 해 보이는 줄리 부인의 모습에 나엘라가 가볍게 웃었다.
“남은 건 마호세르디가 있는 서부랑 중앙인가요?”
“중앙 귀족들은 딱 세 분류죠. 황제 측 인사, 황태자 측 인사, 그리고 신흥 귀족들.”
“황제 쪽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거고 신흥 귀족들은 하일모라가 잡고 있으니 남은 건 황태자 쪽이군요.”
“적당한 사람이 있나 찾고 있어요.”
“저도 황태자 전하께 말해 놨어요.”
데테로아와 파르로시의 싸움을 만들 때 이 부분도 언질을 주었으니 괜찮으리라.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데테로아가 한 영애의 손을 잡고 등장했다.
“데테로아 황태자 전하와 루에나 자밀 영애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으로 나엘라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가 낯선 여인과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나엘라와 소문에 어두운 몇 명뿐이었다.
“모르셨구나. 루에나 자밀 영애는 황태자파의 가문 중 하나예요.”
“아…… 그래서 다들 놀라지 않았군요.”
“이전 파티에도 종종 황태자 전하께서 자밀 영애를 에스코트했거든요.”
줄리 부인의 설명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데테로아와 자밀 영애가 나엘라를 향해 다가왔다.
알 수 없는 행동에 다른 이들이 아닌 척 힐끗거리고 있었다. 황태자와 자밀 영애, 그리고 대공비의 만남이라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테로아의 인사에 나엘라도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이쪽은 루에나 자밀 영애입니다. 대공비께서 자밀 영애를 궁금해하셨죠?”
뚱딴지같은 말에 의문이 생긴 찰나, 데테로아에게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황태자 측 사람 중 사교계 대표가 될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던 말의 답인 듯했다.
나엘라는 자밀 영애를 살짝 살펴보았다.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에 곧은 눈을 한 사람이었다.
“네, 그랬죠. 대공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혼인을 걱정하고 계시니까요.”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긴 나엘라는 자밀 영애에게 살짝 미소 지었다.
소개를 끝낸 데테로아는 금방 화제를 넘겼다.
“대공께서 황제 폐하께 서신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파르로시에게 제가 과했다고 적어 보내신 것 같던데…… 저도 동생이거늘, 서운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자밀 영애를 소개하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 있을 표면적인 대립까지 화두를 열었다.
“자밀 영애가 주인공인 줄 알았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니 제게는 소개까지가 적당하지 않을까요? 황태자 전하와 마주하는 자리는 좋은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러고 싶어 자밀 영애를 소개해 드리는 겁니다. 대공비의 말이라면 대공께서도 들으시지 않습니까?”
근처에서 듣고 있던 이들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분명 데테로아와 나엘라 모두 웃고 있는데 분위기가 냉랭해 보이니 다들 계산을 굴릴 게 뻔했다.
체드란이 서신을 보냈다는 것도 처음 들었을 텐데 데테로아와 나엘라의 사이가 묘해 보이니 내일이면 사교계에 온갖 소문이 돌 것이다. 서로 손을 잡았던 둘이 다시 반목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가볍게 받아치려던 나엘라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필 그때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을 들은 까닭이었다.
“요반나 사신단과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 파르로시 황녀님 드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시오!”
파르로시 황녀?
빠르게 데테로아를 돌아보니 그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모두가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이고서야 모습을 드러낸 황제와 파르로시 황녀, 근위대가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제의 뒤에 선 요반나 사신단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오직 파르로시에게 있었다.
*
얌전히 궁 안에 갇혀 있던 파르로시는 이런 여유로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명 갇혀 있는 것인데 왜 이리 마음이 편한지,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몇 달은 더 있을 수 있을 듯했다.
“결국, 흉이 되어 버렸네요.”
볼에 상처를 보던 하녀 하나가 안타깝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황후가 죽고 재판이 끝나자 파르로시 궁의 사용인들은 모두 바뀌었다. 시녀들도 필요 없다며 물린 그녀는 새로 들어온 하녀들의 시중만 받았다.
그중 가장 어린 하녀 하나가 유독 파르로시를 살뜰히 아꼈다. 세상에 알려진 그녀의 사정이 안타까워 그러는 것일 테지만 파르로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둬. 어차피 상관없으니까.”
이제 와서 얼굴에 흉터가 생기든 말든 무슨 소용일까.
화장을 두껍게 해야 겨우 가려질 정도로 깊은 흉터였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는 잘 보여야 할 사람도, 누군가에게 잘 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밖에 있던 하녀 하나가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다.
“황녀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데테로아의 처벌에 어떤 말도 하지 않던 황제가 환영 파티가 열리는 오늘 갑자기 찾아오다니.
어쩐지 불안감이 치밀었지만 깊게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다.
문을 열자 이미 문밖에는 근위대가 서 있었다. 황제를 만나러 가기 전 몸단장을 새로 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근위대를 따라 반쯤 넋이 나간 채 움직였다.
파르로시의 머릿속이 온갖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찼다. 갑작스럽게 황제가 그녀를 부른 이유가 뭘까. 자신에게 일평생 관심 없던 그 황제가.
“이쪽입니다.”
본궁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황제의 집무실, 그 앞에서 멈춘 파르로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주변 이들은 그녀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문을 두드리고 파르로시의 방문을 알렸다.
“들라 해라.”
파르로시가 껄끄러워하는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 그녀는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문이 열리자 근위대 단장 단제의 얼굴이 보이고, 집무실 끝 커다란 책상에 황제가 앉아 있었다.
“늦었구나.”
부르자마자 바로 온 것인데도 황제는 그리 말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잠시 그녀를 훑어본 황제는 볼에서 시선을 멈췄다.
“흉이 꽤 크게 졌군.”
화장도 하지 못한 채 나온 것이니 선명히 보일 수밖에 없었다.
파르로시는 대답을 하기보다 황제의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슨 용건인지가 궁금했다.
“데테로아와 말싸움을 했다지?”
“제 실언인 것을 인지하고 황태자 전하의 처벌을 겸허히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
데테로아와 파르로시 사이에 중재하겠다는 걸까?
파르로시는 눈을 내리깐 채 잠시의 침묵을 견뎠다.
“이번 일은 데테로아의 편을 들어주려 했으나 파티의 주인공이 네가 될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불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파티의 목적은 사신단 환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주인공이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파르로시는 드레스를 꽉 쥐었다. 황제에게 불려올 적부터 뒤채던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너도 혼인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요반나와 이야기 중이니 그런 줄 알거라.”
휘청, 힘이 풀려 자세를 흐트러트린 파르로시는 절망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물건을 보는 듯 차갑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