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자리에 앉은 황제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소식을 전하려 하네.”
사람들은 가장 높은 단상 위의 황제와 한 계단 아래에 있는 데테로아, 그리고 그 반대쪽에 있는 파르로시를 번갈아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제국의 우방국 요반나에 왕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외교 기관이 설치될 것이네. 새로 뽑힌 외교관은 요반나에서 거주하게 될 걸세.”
원래라면 정무 회의에서 발표했어야 할 협상 내용이었지만 황제는 파티에서 밝히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 목적이 훤히 보여 나엘라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 내었다. 황제는 아무래도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또한, 제국을 믿고 협력해 준 요반나를 위해 요반나의 왕실과 국혼을 맺을 걸세.”
황제의 시선이 데테로아를 향했다.
“황태자,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파르로시를 부른 것은 그 국혼을 알리기 위해 부른 것이니.”
이로써 황제는 황태자의 편을 한 번 들어주었고, 요반나와의 국혼을 빌미로 파르로시 또한 파티에 참석시켰다.
더불어 협상으로 기분이 상했을 요반나 측에도 황녀와의 국혼을 추진하여 안심할 수 있는 숨구멍까지 내어 주었다.
하지만 나엘라는 다르게 해석했다. 어떤 목적을 갖고 무언가를 꾸미고자 한다면 그것을 잃을 각오를 하라고.
그래서 지금 나엘라는 자신을 도왔던 파르로시를 잃게 된 것이다.
“황태자 전하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면서 파르로시 황녀님을 파티 주인공으로 만들었네요.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줄리 부인이 작게 속삭이자 나엘라는 결국 비웃음을 터뜨렸다.
파르로시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았을 곳에 그녀를 보내겠다니.
“잔인한 거죠. 파르로시 황녀에게 요반나가 어떤 의미일지 알면서.”
파르로시에게 요반나 왕족이란 황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파르로시 때문에 요반나 왕족이 황후와 손을 잡았다가 죽게 생긴 상황이다. 거기다 요반나 입장에선 치욕스러울 협상도 진행했다.
과연 그녀가 왕실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큰 문제 아닌가요?”
줄리 부인의 걱정스러운 얼굴에도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국혼이 진행된대도 금방 이행할 순 없잖아요. 어차피 몇 달은 기본으로 걸릴 거예요. 외교 기관도 설치해야 하고, 그와 관련된 사항도 준비해야 하니까. 아마 국혼은 그다음에 진행하겠죠.”
천만다행으로 파르로시에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지엘라가 국혼으로 요반나 왕족과 결혼할 적에도 반년은 걸렸었다. 그러니 그사이에 모든 일을 끝내고 협상을 뒤집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요반나 왕실과 두 번이나 국혼이 있을 줄 몰랐어요.”
지엘라와 파르로시. 벌써 요반나에 제국에 황녀가 가게 된 것이 두 번째다. 이 정도면 우방국이 아니라 거의 속국이라고 쳐도 될 판이었다.
“확실히 황제는 쉽지 않은 상대네요.”
나엘라가 그리 말하며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 황제는 말을 끝냈다.
모든 말의 요지는 요반나와 좋은 협상을 맺었고 파르로시가 국혼을 맺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아직 상대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보니 진행하기까지 시일이 좀 더 걸릴 듯했다.
“황녀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네요.”
데테로아의 반대쪽에 서 있는 파르로시는 한눈에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포로로 잡혀 있는 요반나 왕족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은 그저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한동안 사교계가 시끄럽겠네요.”
“중심을 잘 잡아 주세요. 아, 자밀 영애도 부탁해요.”
데테로아가 자밀 영애를 이곳에 두고 가는 바람에 아직도 조금 떨어진 나엘라 근처에 서 있었다. 영애도 데테로아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눈길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승낙을 받긴 했지만, 나엘라는 아직 자밀 영애를 잘 모르기에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저 데테로아가 알아서 사람을 잘 골랐겠거니 믿을 뿐이었다.
“오늘 파티는 난리가 나겠네요.”
좋은 화젯거리가 여러 가지 던져졌으니 다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으려 돌아다닐 것이다.
내일이면 온갖 소문 중 무엇이 가장 화제가 될지는 나엘라도 좀 궁금해졌다.
*
환영 파티가 끝나기 전, 먼저 자리를 뜬 황제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뒤로 근위대와 시녀들이 무수히 많이 따랐지만 발소리는 아무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척을 유별나게 싫어하는 황제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침실로 돌아가 쉬고 싶어 하는 황제에게 나타난 자가 있었다. 침실로 돌아올 황제를 기다리며 복도에 기대서 있던 에스토였다.
“보고할 것이 있나?”
재판 때 에스토를 변호한 것이 황제였다.
그 일 이후 아이안 공작가의 권리를 뺏는 바람에 황제 대신 북부까지 다녀온 터였다. 클루아조가 황제의 명으로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에 관련 문서는 에스토가 전부 처리했다.
“일을 모두 처리하고 이제 막 복귀했습니다. 폐하께서 시키신 일과 관련된 서류들을 모두 가져왔는데 직접 드리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녀장.”
황제의 부름에 뒤에 서 있던 시녀 중 나이 들어 보이는 여인이 나섰다.
“받아다가 침실에 올려놓거라.”
“예, 폐하.”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그가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어 넘겨 주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가.”
“예. 그렇습니다.”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군.”
황제가 에스토를 지나쳐 다시 걸음을 옮기자 에스토도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거절은 아니니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곧장 침실로 향한 황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에스토를 바라보았다. 등 뒤로 서둘러 문이 닫히고 에스토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처음에 저를 원하신 이유는 마호세르디의 감시자가 되라는 의미셨습니다.”
“그랬지. 그러나 그대는 거절했지.”
“그래서 바로 황도로 올라와 용서를 구했고 폐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황후의 옆에서 감시자가 되었고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제가 앞으로 어디에 필요하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황제의 표정이 한순간에 싸늘해졌다. 감히 황제에게 주제넘게 질문한 대가였다.
“이렇게 피곤한 날, 내 침실까지 따라와 한 말이 그것인가.”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이 앞으로 제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곧장 에스토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냉랭해진 분위기는 돌아올 줄 몰랐다.
“나는 아직 그대를 믿지 못하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대가 내게 충심을 보일지 어떻게 믿고?”
“폐하. 저는 마호세르디에 대한 복수, 그것을 위해 폐하의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건 에스토가 황제를 처음 만났을 때도 했던 말이었다.
시론 후작을 죽인 단제 마호세르디와 그것을 흐지부지 넘긴 마호세르디에 대한 복수. 일을 처리하던 중 감시자들이 모두 죽은 것이 의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황제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론 후작가의 사람들과 마호세르디의 사람 중에는 황제의 감시자가 없었다. 그렇게 침투하려 해 봐도 철옹성 같던 것이 마호세르디였다.
감시자들이 뚫지 못하다니, 마치 마호세르디의 보안이 더 높다는 의미처럼 들려 황제가 자존심 상해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이 나인데도?”
에스토가 용서를 구하러 왔을 때도 황제는 시험하듯이 이리 물었다.
“저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회유하려 하셨다면 제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려 두고 협박을 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단제 경이 왜 시론 후작을 죽였다고 생각하는가?”
“황제 폐하의 명처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아버지와 마호세르디 공작은 오래전부터 불화가 있었습니다. 공작이 하고자 했던 것을 제 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습니다.”
황제는 에스토의 오해가 마음에 든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마호세르디 내의 정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작용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진짜 불화가 있었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이때까지 해 왔던 것처럼 에스토를 믿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 덕에 침실 안의 분위기가 서서히 풀렸다.
“그대는 그저 지금처럼만 하면 되네.”
“지금처럼 말입니까?”
“그래. 비밀리에 내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면 충분하네. 그렇게만 한다면 시론가가 마호세르디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 문제 아니겠나.”
“저는 그들에게 복수가 하고 싶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다리게.”
황제는 이제 귀찮다는 듯 그만 나가 보라며 대화를 끝냈다.
에스토가 믿음직하든 그렇지 않든 센텐에서 이것저것 계산해 본 뒤 알려 줄 것이다. 자신은 그저 올라오는 보고를 받고 적재적소에 써먹으면 그만이었다.
“물러가겠습니다.”
에스토가 침실을 빠져나가고서야 황제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온 에스토는 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내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에스토.”
그런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 건 옛날처럼 친숙한 부름이었다.
“단제 경이 아닙니까. 폐하의 침실 근처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 주변 경계를 확인하고 오는 길이네.”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버린 둘이었다. 에스토는 시론 후작이 되었고, 단제는 근위대의 기사 단장이었다.
에스토에겐 어린 시절 처음으로 단제의 검을 봤던 그 순간이 생생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단제에게 하대를 하는 생각이나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검을 드는 자라면 질투보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단제에게도 에스토는 여전히 막냇동생의 소꿉친구였다. 시론 후작을 지키지 못한 그 날 이후로는 안타깝고 미안하기만 한.
“북부까지 다녀오느라 힘들었겠군.”
“보는 이들이 많아서 공작님과도 얘기를 안 하시지 않습니까.”
본궁은 늘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인 마호세르디 공작과도 말을 나누지 않는 사람이 저와 대화를 해도 괜찮은 걸까.
“사신단 때문에 본궁도 바빠서 괜찮네.”
“다행입니다.”
“자네를 보니 또 한 번 느끼는군.”
“무엇을 말입니까.”
단제의 얼굴 위로 씁쓸함이 피어 있어 에스토는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윗사람의 우유부단함과 무능이 아랫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말이야.”
“저는 단제 경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내게 그대는 나엘라와 같은 동생이지. 직급만 얘기하는 것이 아닐세.”
보기에도 에스토는 마호세르디 때의 분위기를 찾기 어려웠다. 어둡고, 삭막했다.
그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의 변화가 자신의 탓은 아닌지, 아직도 결심을 못 내렸기에 그런 것은 아닌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단제는 에스토의 어깨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드려 주었다.
“미안하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은 첫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에 비해 다나한은 전쟁을 치르는 중이고 나엘라는 황제를 상대하고 있다.
에스토는 스스로 황제의 밑으로 들어갔고.
얼마 전, 함께 생활하던 기사들을 사형시켰을 때보다 더욱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하는 걸까.
“정말 미안하네.”
단제는 그 말을 끝으로 에스토를 남겨 둔 채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