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황제는 생각보다 흔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언의 말에 나엘라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짙은 어둠 사이로 어렴풋하게 보라색 눈이 보이자 옆에 있던 말리가 대신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부터는 안 흔들리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될걸.”
근위대 속 첩자의 존재, 데테로아의 심기 불편한 행동에도 흔들리지 않던 황제가 지금부터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기사단이 모였네요.”
큰 살롱의 직원으로 있던 미아도 오랜만에 검을 쓸 일이 생겼다는 데 설레는지 웃음을 지었다.
귀족 가문의 기사로 위장해 있던 오언과 말리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나엘라와 함께 일한다는 것에 상기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서튼 놈은요?”
“그러게요. 그 배신자 놈은 어딨습니까?”
체드란에게 일러바친 일로 한동안 배신자로 불린 서튼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톨레로 상단의 일을 하고 있어. 한동안 바쁠 거야.”
나엘라 대신 말한 지안은 허리춤에 걸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프리야도 없고 황실 하녀 일을 하는 클로에도 없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죠. 그렇죠, 로엔 단장님?”
옛날에 부르던 호칭으로 나엘라를 부르자 향수를 느꼈는지 저들끼리 작게 웃었다. 당장 큰일을 앞둔 시점이나 작은 기분 전환은 긴장을 풀기에 좋아 나엘라도 그냥 두었다.
그렇게 잡담을 조금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시간이 되었음을 확인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엘라가 검은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로브 안으로 감췄다. 가지고 나온 복면까지 꼼꼼하게 착용하자 다른 이들도 뒤따라 준비를 마쳤다.
그들을 둘러본 나엘라는 마지막으로 작전을 설명했다.
“가린의 신호가 오면 인원을 둘로 나눈다. 미아와 제니, 말리는 가린에게 가고 나랑 지안, 오언은 뒤편으로 향할 거야.”
잘 잠입하고 있는 다른 기사단원들을 부를 수도 없고 톨레로의 인원을 끌어올 수도 없다.
그들의 인원은 7명밖에 안 되지만 상관없었다. 인원은 적을수록 좋고, 인원이 적은 만큼 믿을 수 있는 자들만 있기에 좋았다.
더군다나 실력조차 확실한 이들이니까.
나엘라의 설명을 듣던 미아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은신처로 세 명만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은신처를 가리고 있는 위장 건물, 그곳엔 사람 한 명 없을 텐데 차라리 위험한 은신처에 더 많은 사람이 가는 게 낫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아니. 너희가 할 일이 더 중요해. 도주로를 확보해 줘야 하니까. 우리의 목숨은 너희에게 달린 거야.”
은신처에 잠입했는지 모른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안전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면 은신처의 보안을 더 단단히 할 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틴다면 이후의 도주로가 더 문제였다.
“가린과 합류한 뒤 목적을 달성하면 내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기다려.”
“그 뒤에는 도주로 확보. 맞죠?”
“맞아. 일이 끝나면 곧장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중간에 한 명이 떨어져 나가도 뒤돌아보지 말고.”
만일 누군가가 붙잡혔을 때 그자를 구하겠다고 발이 묶이면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진다.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그들은 나중에 보자며 뒤돌았다.
적진 한복판에서도 살아 돌아왔던 이들이니 괜찮을 것이다. 이런 작전은 뼈에 새긴 듯 익숙했다.
*
황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당연히 상가 거리였다.
귀족들이 가는 상가 구역과 평민들이 가는 상가 구역은 나뉘어 있었지만, 규모만큼은 엇비슷할 정도로 두 곳 다 발전되어 있었다.
그만큼 커다랗고 복잡한 상가 구역 중 평민들이 사용하는 구역에는 우체국이 있었다. 귀족들이야 가문마다 서신을 전하는 사람이 항시 대기 중이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못하니 모두 우체국을 이용했다.
그만큼 오가는 편지의 양도 많고 사람도 많이 드나드는 우체국 건물에 이상이 생긴 것은 자정이 막 지난 새벽이었다.
서서히 퍼져 나가는 기름 냄새에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인가 주변도 아니고, 퇴근과 함께 사람이 빠지는 상가 지역이기에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어두운 밤, 우체국 1층에서 작은 불길이 피어올랐다. 온갖 편지들이 쌓여 있던 공간이었다.
작게 피어오르던 불길은 편지들을 집어삼키고 기름을 따라 번졌다. 4층 건물이 전부 불에 잡아먹힌 건 순식간이었다.
땡! 땡! 땡!
위험을 알리는 벨이 사방에 울리자 멀리 떨어진 인가에서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하나둘씩 창문을 열어본 이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한밤에도 훤히 보일 정도로 거세게 불길이 치솟아 있었다.
“우체국에 불이 났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많은 이들이 소란에 휩싸였다.
*
“그런데 왜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우체국이었을까요?”
오언은 언제나처럼 진중한 태도로 고심했다. 나엘라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궁금한 것은 나중에라도 묻곤 했다.
“귀족들은 우체국을 이용하지 않지만, 귀족의 하녀, 하인들까지 이용하지 않는 건 아니지.”
“어떻게 보면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겠군요.”
조금씩 기름 냄새가 짙어졌다. 가린과 함께 다른 이들이 기름을 뿌리고 있었다.
“우체국 바로 뒤에 은신처를 만드는 건 좋은 생각이야. 워낙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곳이니 의심도 없을 테고.”
“밤에는 인적이 드무니까 더 오가기 쉬울 테고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엘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우체국의 뒤편으로 가자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상가 뒤편이 나왔다.
우체국은 뒤 건물과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양새로, 건물 사이에 허리 높이의 담 하나만 존재했다.
“단장님.”
오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우체국 뒷문과 이어져 있는 발자국이 보였다.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흔적이 뒷문을 나와 한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네요.”
담에서 뚝 끊긴 발자국이 담을 너머 등을 맞댄 건물로 다시 이어졌다.
“클루아조 공자의 말이 맞았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엘라는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클루아조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도 전체 건물을 오랜 시간 동안 하나하나 확인했단다. 가장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알아냈으니 마지막까지 쉬이 알려 주지 않았던 것도 이해되고.
“가자.”
나엘라가 훌쩍 담을 넘어 건물 사이에 몸을 숨기자 지안과 오언도 그녀를 따랐다.
잠시 숨을 죽이고 시간을 보내니, 곧이어 우체국이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작게 시작된 불은 금세 건물 전체로 번져 은신처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얼마 후 은신처의 문이 열리고 상황을 확인하러 몇 명이 나왔다.
“젠장! 우체국에 불이 났다!”
우체국 건물의 불이 은신처로 옮겨붙을 가능성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은신처의 노출이었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수도방위군이 몰려올 테니까.
“당장 수도 방위군에게 알리고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해!”
본인들이 이 시간에 상가에 있었다는 걸 들켜도 문제가 없는 걸까.
어쩌면 감시자들이니 황제가 조용히 넘어가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나엘라가 움직였다. 은신처 문에 바짝 붙어 안을 확인하니 적당히 어둡지 않은 내부가 보였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은신처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간다.”
겉에서 보면 1층, 2층에 빵집이 있는 평범한 상가지만 어디까지나 위장일 뿐 안쪽에는 은신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나엘라가 먼저 외워 둔 내부구조도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중간중간 계속 인기척을 확인했지만 조용하기만 했다. 아까 뛰쳐나간 이들이 말단이고, 다른 이들은 자리를 지키는 것 같았다.
2층에서도 가장 구석진 방, 그곳이 은신처를 관리하고 감시자들을 총괄하는 리더의 방이었다.
계단에 몸을 숨긴 나엘라는 지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비 독은?”
“여기 있습니다.”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따자 약간은 비릿한 냄새가 났다.
나엘라는 그걸 단검과 장검에 꼼꼼히 발랐다. 지안과 오언은 이미 발라 놓은 터라 주변을 경계했다.
“오언, 계단 아래부터 뛰어 올라와. 우리는 먼저 대기할게.”
“예.”
작게 심호흡한 오언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나엘라와 지안은 허리춤에 매어 뒀던 기름병을 꺼냈다. 건네받은 오언의 기름까지 각 방 문 앞에 뿌렸다.
기름 뿌리는 일을 끝내고 신호를 보내자 오언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급한 척 굴었다. 가장 끝 방으로 뛰어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나엘라와 지안은 문 옆으로 바짝 붙었다.
“큰일 났습니다! 불이 옮겨붙었습니다!”
문에 귀를 바짝 붙이니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들리던 발소리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대신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순간 오언과 다른 이들의 눈이 마주쳤다.
나엘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경계심이 많을 감시자들의 은신처이니 애초에 쉽게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다.
지안이 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자마자 오언은 엄청난 힘으로 문을 부쉈다.
*
수도방위군이 화재를 진압하려 했지만 우체국 전체를 삼켜 버린 화마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주변 상가에서 늦게까지 일하던 몇 명이 뛰쳐나와 도왔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때 멀리서 구경하던 한 여자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머! 불이 옮겨붙었나 봐요! 저 건물에도 불이 나요!”
여자의 외침에 물을 옮기던 병사들은 더 다급해졌다. 실제로 우체국과 등을 맞대고 있던 건물에서도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 중 몇 명의 표정이 굳었지만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불타는 건물만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렀다.
“당장 지원을 요청해라! 불이 번지고 있다!”
땡! 땡! 땡!
위험을 알리는 벨이 더 격렬하게 울리고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던 그 즈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가 주변을 조금 돌아가 불이 번진 건물 1층에 있는 빵집 유리를 가차 없이 깨버리곤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뒤 우체국에서 병사들이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기에 쨍그랑 소리는 크지 않았다. 다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시자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단숨에 검을 꺼내 든 이들은 그대로 2층까지 돌진했다. 자신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사이 나엘라와 다른 이들이 창문으로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