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황제와 감시자 중에서도 단 몇 명 빼고는 알려지지 않은 채 은밀하게 유지됐던 ‘센텐티아’.
속칭 센텐은 사실 기관으로 자리한 것이 아니라 주축이 되는 6명의 인원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들의 만남은 매번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들이 바로 황제의 모든 것을 처리하는 자들이었다. 지금의 황제를 뒷받침하여 이 자리를 공고히 만든 것도 이들이었다.
그런 센텐이 오늘 갑작스럽게 모임을 가졌다. 급한 안건이라 계획에 없던 모임이 생겨 기분이 언짢은 자도 있었다.
“이런 무분별한 만남은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내뱉은 질타에 센텐의 우두머리이자 센텐의 의견을 황제에게 보고하는 헤르만이 표정을 굳혔다.
이들 중 누구도 그를 우두머리로 대우하는 이가 없었다. 그는 그저 황제에게 보고하는 센텐의 일원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불타 없어졌는데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헤르만에 뾰족한 음성에도 상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헤르만 님이 하는 행동은 오히려 센텐을 위험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번엔 황제 폐하께 대공비가 보고하는 걸 직접 봐야겠다고 우기셨다면서요?”
상대는 나엘라와 직접 마주한 헤르만의 생각이 짧았다고 질타했다.
이전부터 센텐에서는 나엘라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 그러던 와중 황제가 그녀를 써먹겠다 밝혀 와 어떤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고자 헤르만이 강력하게 주장해 따라간 것이다.
그녀가 요반나 협상 건의 대책을 보고할 때 함께해야겠다고.
“우기다? 지금 내가 황제 폐하께 떼를 썼다는 말인가?”
“그리 저급하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요. 대공비가 헤르만 님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센텐을 의심받을지도 모릅니다.”
“하! 대공비는 센텐의 존재조차 모르네!”
“하지만 대공비의 보고서를 헤르만 님께서 직접 받아 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센텐은 몰라도 헤르만 님은 의심하겠죠.”
헤르만의 얼굴이 붉어지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다른 이들이 말렸다. 갑작스러운 모임으로 오밤중에 다급히 빠져나와 빨리 돌아가야 하는 이도 있었다. 둘의 말다툼으로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만하시지요. 헤르만 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다들 아시잖습니까? 더군다나 오늘 만남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급히 모인 것은 감시자들의 은신처 문제 탓이었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감시자들의 리더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 많습니다. 새로운 리더도 뽑아야 하고, 은신처도 다시 구해야 합니다.”
어디 그것뿐인가. 매번 신중하게 약속을 잡는 탓에 밀린 안건들도 있었다. 특히, 근위대 내에서 첩자가 나온 일은 아주 심각한 사항이었다.
“이번 일은 잊지 않을 걸세.”
마지막까지 이를 갈던 헤르만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기에 넘어갔다. 여전히 상대를 노려보는 눈에 힘을 풀진 않았지만 중요한 걸 잊지는 않았다.
“우선 황제 폐하께서 추가로 확인하라는 사안부터 전달하네. 데테로아 황태자 건일세.”
“데테로아 황태자라면…… 이번 한 번 황태자의 자리에 밀어준 것으로 끝난 것 아닙니까?”
“중요한 건 의도지. 파르로시 황녀와 혼인할 상대도 정해야 하고.”
“요반나 왕국에서 협의 후 답신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약혼 상대 목록이 오면 저희가 정하기로 했고요.”
“그래도 우리 쪽에서도 목록을 추려 보라는 명이네.”
몇 명은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요반나 건은 솔직히 이들에게 껄끄러운 일이었다. 협상에 대한 모든 것을 나엘라가 짜 두었고, 방향이나 세세한 것들도 그녀의 보고서대로 행동했다.
그런 와중에 협상 목록에 갑자기 포함된 파르로시의 결혼 상대는 센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 이거라도 하라는 질타같이 들렸다.
파르로시의 결혼조차 황제가 마음대로 정한 것이니 더더욱.
하지만 일은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조사했던 것들을 얘기하며 몇 명의 후보를 정했다.
왕족 중에서도 서열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좋을지도 생각해서 얼추 정리하자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황태자의 이후 행보는 어떻습니까?”
“얌전합니다. 본인의 후계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황제 폐하를 한 번 찔러본 것일 수도 있지요.”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체드란이 파르로시 편을 든 서신, 파티장에서 대공비와 황태자가 나눴던 대화, 파르로시 황녀와 대공비의 관계 등 복잡하게 얽힌 것들이 많으니 더 두고 봐야 했다.
과연 황태자와 체드란은 서로 등을 돌린 것일까?
이전에도 겉으로만 험악한 사이라고 예상한 이들이 많았으나, 확실한 것도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했다. 그것이 황제가 원한 일이자 센텐의 존재 의의였다.
“다음 문제는 근위대 내 첩자 문제입니다.”
“황후의 첩자이고, 시기상으로 본다면 이해는 됩니다. 마음이 급한 황후가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겠지요.”
“문제는 그 정보 제공자가 마호세르디라는 겁니다.”
“마호세르디는 지금까지 황후의 행적을 계속 추적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호세르디 공작이 그러더군요. 본인은 파르로시 황녀를 믿지 않는다고.”
“대체…….”
어떤 이는 혀를 차며 인상을 쓰기도 했다.
“체드란 대공과 대공비만 관련되면 관계가 모호해지는군요. 체드란 대공과 데테로아 황태자, 대공비와 파르로시 황녀뿐만 아니라 그 부부와 관련된 이들은 아군인지 협력 관계인지 확실히 드러나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이들은 나엘라의 과거에 대해 온갖 방면으로 알아보려 애써 왔다. 감시자들을 수없이 들여보내려 했었으나 알 수 있는 거라곤 어렸을 적 유달리 똑똑했다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대공비가 우리 6명을 합친 것보다 똑똑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황제 폐하께서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억지를 부려서라도 어린 대공비를 데려왔었어야 합니다. 가족의 유대감을 진작 끊어 버리고 제대로 키웠어야 했어요.”
“그럼 마호세르디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때는 마호세르디의 힘이 필요할 때였어요.”
황제가 완전히 제 사람들로 채워 넣기 전, 마호세르디가 가진 힘은 대외적으로 훌륭한 무기였다. 황제의 최종 목적을 위해서 마호세르디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마호세르디를 등질 수 없어 나엘라를 잠시 포기했었지만, 그게 지금에 와 독이 되었다.
“이참에 근위대를 대대적으로 조사해 봐야 합니다. 또 다른 첩자는 없는지 확인해야 해요.”
“단제 단장에 대한 감시도 강화해야겠습니다. 그가 마호세르디에게 정보를 얻었다는 건 아직 가족과의 끈이 강하다는 거지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엔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집조차 제대로 가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센텐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이런 식이면 어느 문제도 끝이 나질 않는다.
그때 누군가가 열심히 의견을 나누던 이들을 단숨에 조용하게 만들었다.
“저는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불탄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얘기하고 나머지 안건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센텐의 일원 중 비록 나이는 제일 어리지만, 가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답을 내놓는 자였다. 그런 이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입을 다물고 있던 헤르만도 흥미가 일었는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센텐 내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지만, 결국 황제에게 목줄을 스스로 쥐여 주고 센텐이 된 자들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센텐 내에 첩자라니.
“첩자라니? 센텐에 말인가?”
“첩자가 아니라면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어떻게 발각되었겠습니까?”
감시자들의 은신처는 확실히 습격으로 인해 불탄 것이었다. 우체국 역시 은신처의 급습을 위한 미끼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지만, 첩자까지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첩자가 아니라도 다른 이유로 은신처를 들켰을 수 있네.”
“하지만 첩자일 가능성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헤르만은 낮은 신음을 뱉었다.
센텐에서 나오는 의견은 모두 황제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그런데 센텐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찌 보고하란 말인가. 황제의 성정을 아는 만큼 어떻게 불똥이 튈지 몰랐다.
모였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자, 끄응 신음을 흘린 헤르만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한 말의 무게를 알고 있으리라 믿네. 황제 폐하께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도.”
“늘 하던 일을 했을 뿐입니다.”
“또한, 이 의견의 발언자로 보고서에 자네의 이름이 올라갈 것이네.”
이미 한 번 뱉은 이상 취하할 수도 없다. 나왔던 의견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서에 적어야 한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실지도 모르니 대기하고 있게나, 세레노피 백작.”
상대는 고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클로에는 황궁에 들어와 하녀로 일하고 난 뒤로도 황제가 거주하는 본궁 근처엔 가 본 적이 없었다.
본궁에서 일하는 하녀들은 모두 다른 궁에서 경력을 쌓아야 했으며, 신원이 확실한 것은 물론 온갖 검사 역시 받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클로에 역시 황궁의 수많은 궁 중 한 곳에서 일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시녀장의 눈에 들어 얼마 전부터 본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배울 것도 너무 많고 고되지만 성실한 태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이건 여기다 둬야 하죠?”
클로에가 함께 일하는 하녀에게 조심히 물었다. 하녀들은 대화도 함부로 할 수 없고, 무언가를 묻는 것조차 소리 죽여 물어야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딱딱한 대답이 들려왔지만, 클로에는 열심히 일했다. 이들 모두 이리 행동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운이 좋게도 시녀장의 힘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다행히도 다른 이들이 고깝게 보지 않은 덕도 컸다.
뚜벅뚜벅, 일정히 들리는 누군가의 발소리에 하녀들은 일제히 하던 것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본궁에 누가 왔다 갔다 하는지 보지 않기 위해 고개까지 숙였다.
그저 지나가는 것 같던 발걸음은 하녀들의 앞에서 멈추었다.
“곧 손님이 오시니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물러가거라.”
갑작스러운 명에도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손님이 방문하는 시간에는 그 길목에 아무도 자리할 수 없다는 명이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갑자기 찾아오시는 경우에 많이 발생했다.
주위의 청소 물건들을 챙겨 몸을 일으킨 클로에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앞에 서 있던 단제 경과 눈이 마주쳤다.
몇 초간 시선을 맞춘 두 사람은 곧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서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