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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69)화 (169/220)

168화

“감시자들의 리더는 어떻게 할까요?”

하일모라의 저택으로 향하는 사이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나엘라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죽여도 상관없어. 이왕이면 정보를 빼내는 게 좋으니까 협박을 하든 달래 보든 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며칠 전 잡아 왔던 감시자 측 수장 때문에 가린은 여러모로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 그놈은 죽여도 되는지라 험하게 끌고 와 숨만 붙여 놓았다.

중요한 건 황제의 눈에서 그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도망쳤는지 납치를 당했는지 불안해하고 있을지 터였다.

정황상 습격이라고 판단하겠지만 의심 많은 황제는 자작극이라 생각할지도.

황제를 최우선으로 지키는 근위대에 첩자가 생긴 데다 손과 발, 눈과 귀가 되는 감시자들이 지내는 은신처가 불탔다. 수장까지 사라졌으니 더 혼란스러워할 테지.

이왕이면 데테로아가 한 번 더 사고를 쳐 주면 좋겠지만 그가 위험해질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에는 체드란으로 흔들 수밖에.

사방에 불안 요소가 가득해지면 황제는 바람 부는 갈대숲처럼 흔들릴 터. 그 성격이니 증폭된 온갖 의심과 불안에 떨 것이다.

나엘라가 그 틈을 얼마나 파고들 수 있을까.

“불안한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이지.”

“그때 센텐을 집어삼켜야겠네요?”

“정보도 잘 얻어 내고 말이야.”

저택을 나와 열심히 달리던 마차는 어느새 하일모라의 저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하일모라가 주도하여 주요 신흥 가문들을 초대한 파티였다. 그간 하일모라의 저택에서도 파티는 열렸지만, 황제와 황태자의 주요 세력까지 참석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이 가장 큰 파티가 아닐까.

“도착했습니다.”

옆이 트인 드레스를 입은 나엘라가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대기하던 이의 안내를 받아 파티가 열리고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아마 나엘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했을 것이다. 신분이 가장 높다는 건 이럴 땐 편했다. 마지막에 나타나도 되고 가장 먼저 사라져도 되고.

안내를 따라 도착한 별관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걷던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어왔다.

“에스코트할 기사가 없어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기사의 물음은 파티장에 입장할 때를 말했다.

“부군이 전쟁 중이신데 파티하러 다니는 것을 민망해해야 할 일이지. 다른 남자와 참석하는 건 더더욱.”

그리고 굳이 누군가와 함께 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엘라는 혼자서도 빛날 자신이 있었다. 체드란이 없다는 건 쓸쓸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샹들리에 아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체드란이 그리웠다.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 전하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입장한 나엘라는 주변을 살며시 둘러보았다. 오늘 주최자는 하일모라이니 그녀를 찾았다.

“대공비 전하.”

다른 이들과 이야기 중이었는지 하일모라가 저 끝에서 걸어왔다. 옆에 있던 제 남편을 이끌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초대해 줘서 고맙네.”

등장만으로도 하일모라의 위치를 공고히 만들고 면을 세워 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참석할 것이다. 나엘라와 하일모라는 남들 보라는 듯 살뜰한 모습을 보이며 연신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대공비 전하께서 참석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가벼운 인사말에 이어 하일모라의 남편이 인사를 건네왔다. 긴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몇 번 봤던 대로 여전히 단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테너 세레노피입니다. 이렇게 뵙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전에 파티에서도 몇 번 보지 않았던가. 제대로 식사라도 한 번 할 걸 그랬군.”

예전 하일모라의 취향은 한눈에도 눈에 띄는 미남에 차가운 분위기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테너 세레노피 백작을 처음 봤을 때는 꽤 놀라기도 했었다.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오늘 파티에 편안히 지내시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테너의 인사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마호세르디 가문이 가진 수많은 상징과 명예, 그것을 자신의 대에서 놓을 수 있을까.

공작은 의미 없는 고민에 자조적인 미소를 짓고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레노피 백작가에서 꽤 큰 파티가 열린다고 들었는데, 어느새 날씨가 우중충해져 있었다. 낮에도 볕이 흐리더니 곧 비가 올 모양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기다리던 이의 인사에 공작은 반가움을 내비쳤다.

“자네도 일찍일찍 다니지 그러나.”

“손주 녀석 재롱에 저택을 나올 수가 있어야지요.”

분명 결혼은 공작이 더 빨리했거늘 손주를 먼저 본 것은 상대방이었다. 저쪽은 외동아들이고 공작은 자식이 셋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첫째는 결혼했어도 수도승 생활 중이고 둘째는 평생 혼자 늙어 죽을 것 같은 데다 막내는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해 대고 있다. 괜히 진 기분에 괜히 배가 아파 공작은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내가 말한 것은 생각해 보았는가.”

상대방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사이이니만큼 재고 따질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을 모으겠다고 하셨습니까?”

“꽤 많은 사람이 모였네. 주요 대귀족은 다 모였다고 해도 되겠군.”

“대귀족이라고 하시면…… 루부스 후작가와 아이안 공작가까지 말씀입니까?”

노헤스카 대공이 공작의 편을 드는 건 어느 정도 수긍하고 넘어가겠지만 다른 곳은 의외였다. 동부와 북부를 지키는 두 가문까지 마호세르디와 손을 잡는다면 생각보다 큰 규모였다.

“다른 이들을 더 모을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나는 최대한 아군의 피해가 없길 바라네. 피를 흘리고 세대가 바뀌면 고통받는 건 아이들일 테니.”

그동안 마호세르디 공작을 따르고 신의를 나눴던 이들이 전부 황제 측에 속해 있진 않다. 같은 소속이 아니어도 공작의 신념이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냉철함을 존경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대귀족들과 손을 잡았다니.

“이미 끝난 전쟁이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그리 호락호락한 자면 나도 이리 살지 않았겠지.”

“공작님의 삶은 충분히 존경받으실 만합니다.”

아등바등 지키고자 했으나 제가 과연 옳게 산 것이 맞을까. 아내는 죽었고 자식 셋을 모두 위험에 몰아넣지 않았는가.

공작은 쓰리고 공허한 마음을 감추었다. 누군가의 존경이 왜 이리 씁쓸한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일일이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네. 자네가 대신 사람을 모아 주게나.”

“알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두를 위험하게 만들 테니.”

마지막까지 당부한 공작은 다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던 나엘라는 고개를 돌렸다. 멀리 있는 지인과 눈인사를 나누며 걷던 한 남자가 그녀와 툭 부딪히고 만 것이다.

“죄송합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나엘라는 한눈에 보아도 퍽 당황한 듯한 그를 살폈다. 얼굴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권력 있는 귀족은 아니었다.

괜찮다며 손을 내젓자, 남자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를 지나쳤다. 그 찰나의 순간, 나엘라의 손에 조그마한 쪽지가 쥐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나엘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부딪히며 옷도 살짝 흐트러졌겠다, 파티에 참석한 후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않았겠다, 나엘라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홀 양 끝에 연결된 계단을 올라 화장실로 향하며 나엘라는 복도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뒤를 돌아 자신이 걸어온 길에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쪽지를 슬쩍 보았다.

겉면에는 뜻밖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마리즈 마호세르디.

그녀가 급히 쪽지를 전해 줄 일이 뭐가 있을까. 심지어 지금은 파티 중이었다.

설마 오라버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마음이 급해졌으나 이곳에서 확인할 수는 없기에 발걸음을 빨리했다. 화장실에 들어선 그녀는 곧바로 문을 잠그고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테너 세레노피 백작은 센텐의 일원 중 하나.

싸아아─

온몸의 피가 한순간 멈춘 듯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테너 세레노피? 그가 센텐이라고?

마리즈의 쪽지를 얼마큼 믿을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다. 그녀의 의도가 무언지 정확히 모르는 데다 뭘 원하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는 쪽지였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이는 하일모라였다.

그녀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테너가 센텐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일모라는 그의 조력자인가?

나엘라와 나눴던 대화를 테너에게 전했을까.

만약 하일모라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테너가 하일모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면? 접근의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생각이 진전될수록 속이 메스꺼워졌다. 무슨 이유든 제가 하일모라를 의심하고 있지 않은가.

친구를 의심해야 한다는 사실과, 만일 친구가 결백하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에 대해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아니야, 거짓일지도 몰라.”

마리즈의 쪽지가 거짓일 수도 있었다. 진실 여부의 확인도 없이 처음부터 무조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엘라의 머릿속에 합당한 의심이 안착하기 시작했다.

테너가 신흥 귀족으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셈해 보았다.

그녀가 기억하기에 그는 하일모라와 결혼하기 전까지 그저 그런 귀족 중 하나였다. 황후와 손을 잡았다고 한들, 1년도 안 된 일이니 황후 덕분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기반을 다졌을까. 혹시 황제의 지원이 있었던 걸까.

어마어마한 정보를 물어 오는 감시자들과 권력의 중심인 황제의 지원이 있었다면 신흥 귀족으로 이리 빨리 자리 잡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거기다 신흥 귀족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격으로 중심이 된 것까지.

그 외에 의심할 만한 정황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엘라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뿌리를 내리는 법이었다.

그리고 더욱 빠르고 깊게 뻗어 간다.

하일모라와 테너가 만났던 시기, 하일모라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들.

하나하나 정리해 보던 나엘라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에스토의 일을 겪고 하일모라까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의심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또 친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결국 의심을 그치지 않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까지.

그리 믿는다고 해 놓고 결국 믿지 않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아닐까.

소중한 이들을 지키겠다 떵떵거리던 자만의 결과는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자신은 왜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지 알 수 없었다.

나엘라는 결국 변기를 붙잡곤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울컥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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