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체드란은 임시 설치된 방벽 너머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바라보았다.
우기도 없이 1년 내내 오직 건기만 이어지는 척박한 땅, 두칸.
그곳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이들은 한평생 먹을 것과 정착할 곳을 찾아 헤매며 떠돈다. 오로지 사막으로만 이루어진 그 넓은 땅을.
“시기상 곧 두칸의 대이동이 시작될 겁니다. 두칸의 남쪽은 아예 사람도 살지 못할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함께 서 있던 론체가 두칸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체드란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생각을 정리할 겸 묵묵히 들었다.
“따라서 두칸의 대부분이 노헤스카와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제국과 전쟁이 일어났으니 두칸을 이끄는 족장과 장로들은 안달이 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안달 난 상황을 증명하듯 바로 어제 그들과 세 번의 전투가 있었다. 두칸의 사람들이 국경 근처로 올라와도 안전할 수 있도록 노헤스카와의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려는 눈치였다.
두칸의 수뇌부들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고 있었다. 이곳이 평화로워야 부족민들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 군의 상황은?”
“두칸이 더 덥다고는 하지만, 이곳도 1년 중 가장 더운 시기니 다들 빠르게 지쳐 가고 있습니다. 보급품을 늘리고 식사와 휴식에 신경을 쓰고 있어 다행히 사기가 저해될 정도는 아닙니다만…….”
론체는 말끝을 흐렸다. 잘 버티고 있다고 한들 두칸의 공세가 치열해지고 날씨가 더 더워지기 시작하면 필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체드란으로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좋지만 그럴 수 없으니 문제였다.
두칸의 대부분이 노헤스카와 맞닿아 있는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족장과 장로들이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섣부르게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인구가 몰려 있으니 한 번에 공세를 펼치기에도 좋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두칸이 하나로 모이는 시기니까.
특히 체드란과 노헤스카 기사단이 반란을 위해 수도로 간다면 더 위험해진다. 노헤스카는 텅 빈 상태에서 두칸이 코앞에 집결한 상황이 된다.
“노헤스카 기사단이 수도로 진격했을 때가 문제군.”
“뒤통수를 치려면 그때만큼 적기가 없으니까요. 그건 뭐, 마호세르디 쪽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호시탐탐 마호세르디 영지를 노리는 하이에나, 제스라 왕국 또한 마호세르디가 텅 빈 것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호세르디는 어떻게 한답니까?”
얼마 전 다나한에게 서신이 온 것을 아는 론체가 물었다.
“국경 근처를 힘으로 눌러 버릴 모양이야. 자리를 비우는 동안 반격할 생각조차 못 하도록.”
거기에 더해 제스라 왕국 근처의 다른 나라들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모양이었다.
제스라 왕국이 제국을 탐내는 만큼 제스라 왕국을 탐내는 다른 나라 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제국을 건들 정도의 힘은 없지만, 제스라 왕국은 건들 수 있는 나라들.
다나한은 마호세르디가 비어 있는 동안 제스라가 다른 생각을 못 하도록 그들을 이용하려는 듯했다.
“그렇다면 우리 쪽만 잘 해결하면 되겠군요.”
마호세르디의 첩보전이 가장 유명한 곳은 타국이었다. 첩보전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곳들이니 가장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마호세르디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알아서 잘할 테니까.
문제는 노헤스카였다.
“아직 고민 중입니까?”
론체의 물음은 두칸을 공격할 방식을 정하자고 묻는 게 아니었다. 이미 결정한 전술을 어느 정도로 진행할지 묻는 것이다.
“두칸이 야만인들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고 있나?”
“그야 그들의 문명 수준이 형편없어서가 아닙니까? 결혼에 대한 개념 없이 닥치는 대로 잠자리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반려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여자와 남자는 상대의 나이와 임신 여부조차 상관없이 무분별하게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체드란은 바로 그 점이 무서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생존력이 높다는 것이지. 아이가 자라기 힘든 환경이니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낳으려 하는 거다.”
“생존력이 높은 것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검만 들 수 있다면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나가서 싸우라고 할 정도니까요.”
“무기도, 갑옷도 형편없는 이들이 집념 하나만큼은 엄청 나서 이날 이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있다. 그런 이들을 힘으로 내리찍으려 들면 모든 걸 버리고서라도 복수하려 들겠지.”
잃을 것이 있어야 물러서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두칸은 날 때부터 가진 것이 없기에 마호세르디와 같은 전략을 취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뜨거운 사막에서 나고 자란 두칸 사람들의 육체는 강인하니 쉽게 볼 수 없다.
“일단은 계획대로 전선을 계속 민다.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니 두칸 사람들이 무작정 국경으로 올라올 수 없고, 그렇다고 내려갈 수도 없으니 중간에 고립될 것이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불타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고 들었다. 감히 이 시기에 남쪽으로 향하는 자들은 없을 터.
오도 가도 못하고 민족들이 중앙에 갇히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두칸 측 수뇌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보급품 중 식수의 양을 늘리는 걸 최우선으로 하도록. 우리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테니까.”
잔인하지만 식량난과 더위로 두칸의 인구를 줄여 놓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전투를 이어 나가며 전선을 밀어붙인다면 고립된 이들의 인구가 빠르게 줄 것이다. 노헤스카가 전선을 제국 쪽으로 당기고 자리를 비워도 당장 덤벼들지 못할 정도로.
“전선을 넓히는 도중에 보이는 모든 나무와 주거 지역을 태우도록.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도록 만들어야지.”
식량과 햇빛을 피할 최소한의 주거 지역도 없이 국경군과 싸움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국경의 성벽을 점점 높이고 있었다. 추후 수성전이 벌어지더라도 두칸은 절대 국경을 뚫지 못하리라.
“지난 겨울 내내 제대로 먹지 못했던 두칸의 민족들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겠군요.”
아이들과 노약자, 여자들의 목숨이 제일 먼저 위험해질 터. 그들이 사라진다면 더는 두칸에 미래가 없었다.
아이를 낳을 여자 없이, 자라나 전사가 될 아이들 없이 두칸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두칸이 살고자 총력전을 펼치는 때가 올 거다. 그때 한 번만 버티면 두칸의 몰락은 예정된 일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광.
적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잔인한 체드란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대공 전하!”
그때 누군가가 체드란을 향해 급히 뛰어왔다. 말단은 아니고 방벽을 감시하던 선임 기사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지?”
“두칸의 전사 몇 명이 대공 전하를 만나 뵙고자 요청해 왔습니다. 임시 방벽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론체와 체드란의 걸음이 동시에 속도를 높였다.
“갑자기 만나자고 했다고?”
허겁지겁 따라붙은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마든 경께서 그들을 상대하고 계십니다. 함께 온 두칸의 전사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족장의 아들입니다.”
체드란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노헤스카의 사령관이 자신이라면 두칸의 사령관은 족장의 아들이었다. 나이가 많은 족장 대신 전투는 늘 족장의 아들이 지휘해 왔다.
그만큼 중요한 자가 몇 명의 전사만을 데리고 적진 한복판에?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협상 의지와 항복 표시가 아닌가.
야만인들이 숙이고 들어오는 건 오랜 전쟁의 역사 중 처음 있는 일이다. 생살여탈권을 상대에게 내어 주고 시작할 만큼 그들도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이번 대의 족장이 야만인답지 않은 성격이라더니 진짜일 수도 있겠다.
체드란은 걸음을 느긋이 옮기며 방벽으로 향했다.
*
나엘라는 며칠째 지속되는 악몽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악몽을 꾸던 방식이 달라진 탓이다. 과거의 일을 보여 주던 예전과는 달리 미래에 생길 최악의 상황들을 연달아 꾸게 되었다.
체드란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 꽉 쥐고 있던 나엘라는 피곤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부딪히지 않고 저택에 처박혀 있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다. 누구보다 나엘라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준비가 덜된 상태였다. 하일모라를 의심하여 멀어지거나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 주어 지옥으로 밀어 넣을 준비가.
나엘라는 두려웠다. 하일모라와 테너가 한 편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진실이라는 지옥에 빠뜨려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그 과정을 모두 겪을 경우 과연 자신이 알던 하일모라가 남아 있을까.
진실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가정은 애초에 없었다. 그건 하일모라를 무시하고 기만하는 행위였다. 어떤 쪽이든 고통은 따라올 터다.
그랬다. 나엘라는 제 가장 소중한 친구를 또 잃을지 모른다는 상황이 두려웠다.
“준비한 건?”
나엘라의 힘없는 물음에 지안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여기 있어요.”
지안이 내민 작은 함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자. 하일모라에게.”
약속은 이미 잡아 두었다. 명목은 파티를 여느라 고생했을 하일모라의 기분 전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심받지 않도록 흔들려선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나 나엘라는 자꾸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엘라를 따라 저택을 나서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온갖 힘든 순간들을 이겨 낸 자신이 이렇게 나약해질지 누가 알았을까. 누군가 이 상황과 전쟁터 한복판을 택하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검을 택하리라.
나엘라는 어머니를 잃었던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약속 장소인 살롱 전체를 비워 놨습니다. 직원들도 모두 출입할 수 없도록 해 두었습니다. 오늘 모든 시중은 저희가 들겠습니다.”
“하일모라의 시중을 드는 자들도 모두 내보내.”
“세레노피 백작가의 호위 기사들은 쉽게 나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대공가의 기사가 호위하겠다 요구하는 것이니 그들도 계속 버티진 못할 거야. 대신 너무 억지를 쓰면 나중에 세레노피 백작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적당한 핑곗거리를 준비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자칫하면 다른 살롱에 잘 잠입하고 있던 미아까지 위험해질 판이었으나 나엘라는 명령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하일모라를 납치해서라도 안전을 확보해. 그녀가 반항하면 무력을 써도 돼.”
하일모라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바로 미아와 몇몇 이들을 보낼 생각이었다. 미아는 살롱 직원이니 세레노피 백작가에 들어갈 핑계는 많았다.
훗날 하일모라에게 어떤 원망을 듣게 된대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친구를 잃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