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무너지는 것들
170화
“나엘라! 여기야!”
먼저 와 있던 하일모라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직원들은 이미 모두 내보냈기에 볼 사람은 없었다. 대공비와 백작 부인이 오롯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안.”
나엘라가 눈짓으로 명령하자 지안과 노헤스카 기사들이 움직였다. 지안은 하일모라의 시중을 드는 이들에게, 기사들은 세레노피 호위 기사들에게 다가가 말을 전했다.
그들이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나엘라는 하일모라의 앞에 앉았다. 볕도 좋고 여름의 풀 냄새, 청아함이 느껴지는 한낮이었다.
하일모라는 세레노피 백작가의 사람들이 하나씩 사라져도 한번 흘깃 바라보고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유가 있겠거니, 또는 다른 이들이 들어서 안 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겠거니.
하일모라의 순진무구한 표정에서 나엘라가 제게 해를 끼칠 리 없다는 믿음이 느껴졌다. 나엘라는 그 표정 하나하나에 안심하고 다시 불안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일모라.”
“응? 그러고 보니 너 얼굴이 왜 이리 수척해? 무슨 일 있는 거야?”
나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다는 걸 확신한 하일모라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마치 제 일인 것처럼 당장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어렸을 때처럼 여전히 감정에 솔직하고 누군가에게 잘 공감하는 하일모라. 가장 순수했던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
그 의미가 나엘라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데 하일모라에게는 어떨까.
“하일모라.”
“응? 무슨 일 있는 거지? 얼른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보며 나엘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자신은 이런 친구를 잃을 수 있을까. 하일모라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보지 않겠다고 하면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네게 어떤 친구야?”
“나엘라, 너?”
하일모라의 얼굴에 영문 모를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오늘 이 시간이 지나도 우리는 계속 친구일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당연히 제일 친한 친구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친구.”
나엘라도 마찬가지다. 하일모라를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었다.
“그럼 내가 하는 말 어디까지 믿어?”
“왜 그래? 당연히 전부 믿어.”
그 누구보다 푸른 하늘처럼 화사한 친구는 나엘라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너의 남편을 의심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누구보다 사랑에 불같은 하일모라. 그 사랑이 흔들리는 순간,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오래 알았기에 조금 예상이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황제의 뒤에서 황제의 머리가 되어 주는 기관이 있어. 센텐티아라고, 아는 이들이 극히 적어서 나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알게 됐어. 내가 황제를 상대하기 위해서 제일 없애야 하는 곳이야.”
“그래서……?”
“테너 세레노피 백작, 그가 센텐의 일원이야.”
“내 남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똑똑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 남편은…….”
“현재 그 정보를 교차 확인 중이야. 너에겐 미안하지만 요 며칠 세레노피 백작을 감시했어.”
나엘라가 하일모라를 아는 만큼 하일모라도 나엘라를 잘 안다. 확실한 것이 없다면 나엘라는 말을 꺼낼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증거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증거가 있으니 하는 말일 터였다.
“그, 그냥 보좌하는 기관일 수도 있잖아. 센텐은 또 뭐고,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도 이해 안 돼. 그는 얼마 전까지 황후의 사람이었어.”
“대외적인 가면이겠지. 황후의 사람이었다는 편견이 생기면 의심에서 멀어질 테니까. 그리고 센텐은…….”
테너의 뒤를 밟는 며칠간 나엘라가 무엇보다 집중해 파악한 것은 센텐이 영향을 끼치는 범위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뻗었는지, 황제가 행하는 일 중 어느 수준까지 손을 대는지를 알아보는 거였다.
그것 때문에 오밤중에 마리즈의 침실에 방문하기도 했었고, 클루아조를 붙잡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센텐은 황제가 다른 이들의 약점을 잡고 망설임 없이 비인간적인 일을 행하도록 도운 이들이야. 황제의 생각은 대부분 센텐에서 나온 것들이고.”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바라보던 하일모라는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란스러운 그녀를 알면서도 나엘라는 일부러 바라보지 않았다. 바라보고 있으면 끝까지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네가 나에 대해 세레노피 백작에게 말했다면 그것도 센텐에 전해졌을 거라고 보고 있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테너의 첩자가 된 셈이다. 하일모라가 수다를 떨며 제 하루를 공유하는 동안 테너는 조용히 정보를 얻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나엘라와 체드란에 대한 정보, 마호세르디에 대한 정보, 베르에티에 대한 정보까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하일모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멍한 눈동자에선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없었다.
“하일모라 혹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
혹시 너도 알고 있었는지, 그걸 자신에게 묵인했는지, 우리는 아직 친구가 맞는지, 이후로도 친구일 수 있는지.
나엘라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사이는 예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하일모라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엘라.”
하일모라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으로 가득 찼으나 차갑고 단호했다.
무심결에 그 눈빛을 마주하고 만 나엘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거로 할게. 내 남편이 황제의 뭐라고? 그리고 내가 정보를 줬을 수도 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부정과 외면.
하일모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의자를 밀치고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를 나엘라가 붙잡았다.
“하일모라.”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나엘라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를 향했다.
“세레노피 백작이 네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수도 있어.”
휘청, 넘어지려는 하일모라를 다급히 붙잡았지만, 그 손길은 탁, 소리와 함께 내쳐졌다.
“테너가…… 테너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왜? 뭐 때문에?”
하일모라의 목소리가 점점 크기를 키웠다. 화가 난 듯 그녀의 눈동자는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네가 마호세르디를 들락거린 데다 나와 친해 보이니까.”
마호세르디를 감시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들이라면 누구보다 하일모라가 눈에 띄었을 거다. 공작가 막내딸과 같은 나이의 귀족 영애가 마호세르디를 들락거리고 있었으니까.
지엘라는 황녀라는 높은 계급을 가진 것은 물론, 다나한과의 로맨스 때문에 온갖 시선을 받았었다. 자연히 그들이 생각하는 대상에서 벗어났으리라.
그러니 하일모라가 조용히 다녔다고 한들, 때를 노리던 이들에겐 아주 먹음직스런 대상이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테너의 눈에 띄었다면, 그래서 정보를 얻으려 의도적인 접근을 한 것이라면…….
“너는 지금…… 내 남편이 날 속이고 거짓 사랑을 연기했다고 말하는 거야……?”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을 수도 있고, 의도적이었을 수도 있다. 처음엔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사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며칠 동안 테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센텐의 일원이라는 걸 확신한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센텐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모든 가정은 부정적인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야.”
“테너가…… 내 남편이…….”
힘이 풀린 듯 하일모라는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났다.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모든 것을 부정했다.
“하! 말도 안 돼. 아니야, 거짓말이야.”
하일모라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손가방을 주워 들고는 나엘라를 지나쳐 걸었다.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걷는 그녀는 혼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이번엔 그녀를 붙드는 대신 나엘라가 지안을 불렀다.
“지안, 그걸 하일모라에게 전해 줘.”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하일모라를 붙잡고 지안이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뭐야……?”
나엘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일모라를 볼 자신이 없었다.
“독이야.”
“독? 독이라고? 지금 테너에게 독이라도 먹이라는 거야?”
“아니. 네가 먹을 독이야.”
하일모라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르는 독이었다.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다면 사용해. 테너 세레노피 백작이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다면 말이야.”
황제가 두 번째로 건네줬던 독처럼 일주일 정도 앓으면 멀쩡히 회복할 것이다. 독을 먹고 쓰러진 후 의원을 불러 검사를 해 보면 중독 반응도 나온다.
대신 해독제는 없다. 그저 일주일을 꼬박 앓을 수밖에.
테너가 하일모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걱정하며 범인을 찾으려 할 터다. 적어도 의심이 시작된 하일모라는 그 모습이 진실로 사랑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걸 쓰는 일은 없을 거야.”
단언하듯 하일모라가 말했다.
“그래도 가져가. 나중에라도 쓸 곳이 있을 거야.”
사람의 마음속에 의심을 심는 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 잔인한 일이 아닐까.
의심이 똬리를 틀었으니 하일모라는 결국 테너의 사랑을 확인해 보려 할 터다. 독을 먹기 전까지 고민하고 의심하는 과정이 지옥일 뿐.
“나엘라, 오늘 우리는 만나지 않은 거야.”
하일모라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다급해 보이는 구두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그녀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나엘라는 의자에 등을 깊이 기댔다.
말을 해야 할지도 고민하던 며칠 밤이 무색할 만큼 강하게, 또는 너무 잔인하게 하일모라에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온갖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녀가 겪게 될 수많은 고민이 피부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답이 나오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의심하게 된 하일모라는 지옥 속을 걷기 시작할 거다. 제 손으로 그녀를 밀어 넣지 않았나.
자신은 오늘 오랜 친구를 잃었을까.
아니면 계속 친구일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는 에스토도 하일모라도, 예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갈 순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엘라 님…….”
지안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런 상황에 얘기하기는 정말 싫지만…….”
나엘라의 눈동자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저택에 다나한 경과 공작님께서 와계신다고 합니다.”
수도에 잠시 들를 거라던 다나한의 문구가 기억이 났다. 올라오면 자신을 만나러 오라던 제 말에 아버지와 식사라도 할 겸 함께 온 모양이었다.
제스라 왕국과의 전쟁에 관해서도 얘기해야 하고 앞으로 진행할 일도 공유해야 한다. 다나한은 심지어 지엘라를 설득해 줘야 했다. 그녀가 마호세르디로 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커다란 무언가를 잃고 있는 기분인데도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넘쳤다.
또 일어나서 나아가야 했다. 멈춰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 가자…….”
스르륵 일어나는 나엘라의 모습을 보며 지안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