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오랜만이구나.”
설핏 웃는 미소가 정말로 오랜만이라 나엘라도 겨우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 부자연스러움을 눈치챘는지 단번에 다나한의 얼굴이 굳었다. 옆에 있던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다정한 아버지의 물음에 나엘라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체드란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말이 체드란의 집무실이지 그곳에 놓여 있는 동그란 회의 테이블, 벽에 붙은 지도까지 모두 나엘라의 오랜 방식이라 공작과 다나한에게는 익숙하게 다가왔다.
라르바가 손님을 응대하겠다며 따라 들어오려 했다.
“그대는 물러가 있게.”
“하지만 차라도 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누구인지 아는데 내가 어찌 시중을 편히 받겠나. 그만 가 보게.”
안에 들어가 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를 대하는 나엘라의 눈빛은 싸늘한 축객령이었다. 평상시라면 라르바를 이리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겠으나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의 거절에 잠시 바라보던 라르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집무실 문 앞에 서 있는 하녀들까지 모두 보내 버리고, 그 자리에 지안과 제니를 대기시켰다. 문을 닫고 들어와 창문까지 확인하자 앉아 있던 이들의 눈빛도 가라앉았다.
“그리 신중하게 해야 할 얘기라면 이곳에서 하지 않는 게 좋겠구나.”
공작의 걱정에도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는 최소한으로 황제의 눈치를 봤으나 앞으로는 그럴 생각이 없던 탓이다.
그렇다고 계획까지 바꾸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황제의 눈에 들어 센텐에 대한 정보를 얻겠다는 건 유효했다.
방식이 좀 더 과격해질 뿐.
“하일모라의 남편 테너 세레노피 백작이 센텐의 일원이었습니다.”
“센텐?”
방금 막 수도로 올라온 다나한은 아예 처음 듣는 이야기일 테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엘라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공작은 깊은 탄식을 뱉었다.
“센텐의 정식 명칭은 ‘센텐티아’. 지금의 황제를 만들었고, 황제가 행한 일들은 대부분 그들에게서 나왔어.”
클루아조에게 듣기론 감시자들이 만들어진 이후 센텐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시기상으로 마호세르디에 한 짓은 그들과 연관이 없지만, 나엘라를 노리고 기다려왔던 건 센텐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관련이 없지만, 관련이 있기도 했던 곳.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나엘라를 분노하게 만든 곳이기도 했다.
그 감정은 설명하는 목소리에서도 드러났다. 나엘라는 센텐에 대해 알아본 것을 모두 다나한에게 설명했다.
오래 떨어져 가끔가다 얼굴만 봤던 단제보다 다나한이 훨씬 편했다. 검을 맞댄 것도 수차례니 나엘라에게는 가족 중 가장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분노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만약 센텐에서 의도적으로 하일모라에게 접근한 거라면…….”
어금니가 맞물려 빠득 갈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황제도 내 성격이 어떤지 겪게 될 거야.”
밀고 당기기? 수면 밑의 암투?
그딴 거 다 소용없었다. 나엘라는 적이라고 생각되면 돌진하며 남기지 않고 쓸어 버리는 사람이었다. 그 기반이 확실한 정보와 치밀한 전략이라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엘라가 성격대로 하려는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아직은 이르다.”
공작이 나엘라를 달래려 했다.
“지금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우리 편이 되어 줄 사람들 말이다.”
“너무 늦습니다. 그사이에 누군가 희생되면요?”
“그럼 지금 당장 하일모라는 어쩔 것이냐? 하일모라가 세레노피 백작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면 나엘라의 약점이 고스란히 센텐에 넘어가는 셈이다. 하일모라와 나엘라의 사이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며 정보도 어느 정도 얻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하일모라가 계속 테너를 믿겠다고 한다면…….
“강압적으로라도 끌고 나올 겁니다.”
“그때도 친구일 것 같으냐.”
“친구가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일모라가 멀쩡히 살아 있다면요.”
“나엘라……!”
공작이 정말 놀랐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옛날의 나엘라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친구인 하일모라의 생각을 존중할 테고 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아 나섰겠지.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있고 소중한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 역시 강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너무 조급한 데다 과격하기까지 했다.
“에스토 때문이냐?”
“지금 에스토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죠. 혹시 압니까? 황제에 의해 이미 처단됐을지.”
다나한의 감시자로 쓰려 했으나 이제 와서 마호세르디로 돌려보낼 순 없는 상황이다. 황후의 감시자로 썼으나 그녀는 이미 죽어 버렸다.
황제가 쓸모없어진 에스토를 그냥 뒀을까? 더군다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는데?
“괜찮을 거다.”
“확실한 정보 없이는 못 믿겠습니다.”
재판 이후로 에스토의 얼굴 한 번 못 봤다. 불안했지만 잘하고 있으리라 믿고 눌러 왔던 감정들이 하일모라의 상황을 알자마자 터져 버렸다.
만약 하일모라마저 잘못되면? 그녀는 제대로 도주조차 못 할 텐데?
나엘라는 제 행동이 타당하고 합당하다 믿었다.
“하일모라를 어떻게 해서든 빼 올 거예요.”
사랑 앞에서만큼은 어느 기사 못지않게 강하여 누구보다 멋지다고 생각했던 친구다.
그녀마저 잃는다면 자신에겐 무엇이 남는가.
체드란도, 가족도 함께하겠지만 온전히 자신을 믿고 나아가던 나엘라 마호세르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밑바탕은 지금까지 그녀를 믿어 주던 친구들의 ‘나엘라 마호세르디’였으니까.
“오라버니는 지엘라 부인을 마호세르디로 가게끔 설득해 줘.”
조금이라도 소중한 사람은 모두 안전한 곳에 두면 된다. 그럼 약점 잡힐 것 없이 마음껏 날뛸 수 있으리라.
“나엘라.”
자꾸만 들려오는 제 이름에 나엘라는 고개를 돌렸다. 공작은 다정한 아버지의 눈이 아닌, 오랜 세월 가문을 지켜왔던 마호세르디 공작의 눈을 하고 있었다.
“네 눈에는 내가 황제와의 싸움을 피하며 안전을 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왜 그랬을 것 같으냐.”
“잃어 봤으니 무서워서 그런 것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너도 별반 다를 거 없구나.”
나엘라가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불만을 담고 있었다.
“꼬리를 만 것과 무섭다고 짖어 대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다만 짖어 대는 개가 더 빨리 죽을 뿐이다.”
이곳에 체드란이 있었다면 독설 또한 유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족임에도 냉정하게 말하는 모습이 똑 닮았으니까.
“네가 무섭다고 짖어 대면 황제가 너를 볼 것이다. 아 이놈이 이빨을 보이는구나, 깨닫게 되겠지. 그런데 너만 보겠느냐? 네 옆에 서 있는 다른 개들은 보이지 않을까? 짖는 놈 때문에 옆에 있는 개들도 다 죽는 법이다.”
꼬리를 말고 충성하는 개가 있는데 짖는 개의 무리를 살려 둘 필요가 있겠는가. 특히나 황제는 제게 위해를 가할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싹을 잘라 내는 인물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하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다만 좀 더 침착해지는 게 좋을 거다.”
공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리자 다나한도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엘라는 가만히 앉아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후…… 나엘라.”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어떤 자인지는 아버지께서 가장 잘 알고 계셔. 네가 보는 황제가 전부가 아닐 거야. 그러니까 아버지 말씀은…….”
나엘라에게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에스토를 잃은 지금, 하일모라까지 위험한 상황이니 제 동생의 절박함은 하늘을 찔렀으리라.
다만, 그저 이대로 들이받기에는 위험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엘라의 눈에 황제가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쉬운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감시자들과 센텐을 유지할 인재를 찾아내는 것만 보아도 보통은 아닐 테니까.
황제만큼 비열하고 음습한 인간상을 이해하기엔 나엘라는 아직 어렸다.
“네 행동이 옳을 수도 있고 아버지 행동이 옳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성을 잃은 채로 행동하지는 마.”
다나한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집무실을 벗어났다. 식사하며 안부를 물을 겸 왔더니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덩달아 제 마음도 가라앉아서 다나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다나한이 깊게 고개 숙이자 황제가 일어나라며 손짓했다.
“다음에 볼 때는 마호세르디 공작으로 볼지도 모르겠군.”
승계를 위한 세부 사항을 조절하기 위해 황제를 알현했지만 다나한은 달갑지 않았다. 아니, 마호세르디의 누구든 황실이 달가울 일은 없으리라.
슬쩍 황제의 옆으로 눈길을 보내자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는 형제가 보였다.
“그대를 보면 꼭 묻고 싶던 것이 있네.”
황제와 단둘이 만나 본 적은 없었다. 오늘도 원래대로라면 공작과 함께 셋이서 만날 예정이었으나 황제가 잠시 다나한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들어오기 전 공작이 계속 당부했다. 다나한을 흔들려 할 것이라고.
다나한은 곧 마호세르디가의 주인이 될 예정이다. 그것은 곧 황제파의 수장이라는 말과 같았다.
그런 다나한을 계속 확인하고 흔들어 속내를 보려 유도할 터였다.
가장 만나 본 적 없는 자가 가주의 자격이 있는지, 혹은 전대처럼 자신에게 꼬리를 말고 수그릴지.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겉으로는 얌전한 척 고개를 숙이자 황제가 거리낌 없이 물었다.
“형과 동생은 남다르게 뛰어난데, 혼자 범인과 다를 바 없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슬쩍 고개를 드니 다나한의 시야에 움찔거리는 단제의 모습이 걸렸다.
하지만 그의 형은 말릴 수도, 끼어들 수도 없다. 그렇게 교육되었고, 그 선까지가 단제의 권한이자 구역이었다.
“어찌 그런 걸 물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너무 고깝게 듣지 말게. 나 또한 뛰어난 형제들 속 범인이었지. 하지만 결국 황제는 내가 되었고 말일세.”
똑같이 가장 평범했던 다나한이 가주가 되었으니 어떤 기분인지를 묻는 것일까.
공작은 솔직하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황제가 다나한 자신을 파악하게 두지 말라고, 누군가의 약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사람이니 틈을 주면 안 된다고.
다나한은 공작의 그 말이 떠올라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하지만 결국 뱉을 수 있는 건 이때까지 자신이 생각해 왔던 솔직한 이야기였다.
마호세르디의 자식 중 어디 공작의 말을 듣는 이가 있던가. 그것만큼은 다나한도 형과 동생을 닮았다.
“형님과 동생은 가문의 수장 따위에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더 먼 곳을, 더 넓은 곳을 나아갈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은 언제든 돌아올 그들을 기다리며 집을 지킬 사람이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들이 가주를 맡으면 결국 족쇄가 될 테니까.
“수장 따위라…….”
황제가 퍽 유감이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래전부터 느꼈지만 자네 형제들은 나와 많이 다르단 말이지. 그대는 그나마 비슷하길 바랐거늘.”
다나한이 공작 앞에서 나엘라의 편을 들어주거나 도움을 줄 순 없어도 이것만은 확실했다.
동생에게 적이면 자신에게도 적이다.
그래서 황제의 말에도 죄송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유감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