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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73)화 (173/220)

172화

황제는 다나한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중간부터는 공작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지만, 애초에 황제는 질질 끌 생각이 없었기에 오늘 만남은 금방 마무리되었다.

세부적으로 조율할 것도 전부 마호세르디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게끔 내버려 두었다. 거의 손대지 않겠다는 황제의 말에 잠시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둘 다 반문하는 법 없이 넘어갔다.

왜 마호세르디의 편의를 봐주는지 물어볼 법도 하거늘.

“폐하, 헤르만 반쇼 후작이 뵙고자 합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말에도 황제는 조금 기다리라 명하고는 생각을 이어 갔다.

웬만한 일이야 센텐에 맡겨 두는 편이지만 마호세르디에 관한 사안만큼은 황제가 직접 판단을 내렸다. 센텐에게는 조언만 듣는 정도로 끝냈다.

그는 방금 나눈 이야기를 되새겼다. 바로 돌아갈 거냐는 질문에 다나한은 지엘라의 병문안을 언급했다. 공작은 뒤이어 그런 다나한을 기다렸다가 함께 궁을 나갈 예정이라고 답했다.

지엘라와 다나한의 사이야 익히 아는 사실이기에 병문안 정도야 이해되는 범주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는 쉬이 마음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분명 끊어졌었으나 속단할 일은 아니다. 마호세르디의 충성을 완전히 믿지 않는 만큼 지엘라를 이용해 어떤 것을 얻으려 들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공작의 속내는 무엇일까.

자식 둘을 결혼시켰으니 나머지 자식 하나도 바로 세워 주고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마음? 겨우 그런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단제 마호세르디 경.”

황제의 부름에 단제가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하명하십시오.”

“마호세르디 국경 지역의 전투가 거세다지?”

조금 전까지 있던 공작과 다나한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황제는 굳이 단제에게 물었다. 며칠 전까지 전선에 있던 다나한에조차 묻지 않았던 것을 말이다.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다나한 경이 전선을 비운 지금도 소규모 전투는 계속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스라 국경 근처 영지 하나가 함락되었으니까요.”

“다나한 경에게는 따로 들은 것이 없는가?”

“죄송합니다. 며칠 동안 폐하 곁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정보 확인이 늦어졌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떠보는 것임을 뻔히 알면서 단제는 죄송하다고 답했다. 오랜 세월 동안 교육된 번견의 자세였다. 실제로 단제는 집조차 들어가지 않은 채 황제를 호위 중이었다.

그렇기에 황제 또한 단제에 대해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민할 것이다. 의심 따윈 들지 않도록 행동하고 늘 충성하는 번견은 어떻게 처리할지.

마호세르디가 무너져도 번견은 계속 충성할 것인가.

호랑이조차 물어 죽일 수 있는 것이 번견인데 기르기를 집 지키는 개로 키웠다. 본능은 얼마나 억누를 수 있을까. 놓기엔 아쉽고 잡기엔 물릴까 겁이 나니, 이거 원.

황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대는 형제와의 우애가 어떤 편인가?”

“다나한 경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나엘라 대공비를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

“가족이니 아끼는 것은 당연하나 공사 구분을 못 할 정도는 아닙니다.”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작을 가장 닮은 건 단제라고 말이다. 꼬리를 말고 충성을 바치겠다 하여 옆에 두니 이 오랜 시간 곁을 지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아무래도 단제는 공작을, 다나한은 공작 부부를 딱 반씩, 나엘라는 공작부인을 닮은 모양이다.

조용한 분위기에 미동 없이 앉아 생각을 이어 가던 황제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헤르만 후작에게 들어오라 하라.”

문이 열리고, 헤르만이 입실하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하다는 듯 집무실을 지키던 기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자리를 떠나자 헤르만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약속되지 않은 만남은 기피하는 줄 알았더니 요즘 들어 얼굴을 자주 보는군.”

“폐하…….”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무너지고 리더도 사라지는 바람에 센텐의 일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각자 사람을 뽑아 급한 대로 임시 은신처를 만들고 들어오는 정보를 분류하고 확인해야 하는 덕에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들었는데.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과 두칸의 전사가 만났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확실한 정보인가?”

“예. 노헤스카 병사들 사이에 감시자들을 심어 놨는데 두칸에서 직접 찾아왔다고 합니다.”

“정보를 알아낼 정도로 높은 급의 감시자들은 없는 건가?”

“그게…… 나엘라 대공비와 결혼 후 기사단의 첩자가 모두 씨가 말랐습니다. 그녀가 한바탕 뒤엎은 모양입니다.”

“하……!”

황제에게서 노기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호세르디의 보안도 뒤집어 놓았던 나엘라가 노헤스카에서 가만있었을 리 없다.

그때 당시에도 뭔가 움직임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었다. 센텐의 의견도 같았다.

그런데 일단 지켜보자는 의견에 내버려 두었던 것이 결국 확인이 불가한 상황으로 돌아왔다.

“그때 자네들이 그냥 두자고 하지 않았나?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왔구나. 어찌할 생각이지?”

헤르만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읍소했다.

“센텐 내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는지라 항상 조율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몇몇 강한 주장에 그렇게 말씀드렸을 뿐 제 의견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대도 결국 그 의견에 손을 들지 않았나? 몇 년 동안 가려져 있던 나엘라 마호세르디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일단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봐야 한다면서?”

실제로 그녀의 행보는 황제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 주기도 했다. 잠시 정보를 얻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충분히 성장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통제 불가한 상황으로 돌아왔으니 어찌해야 할까.

“센텐티아를 모두 불러라. 회의하는 걸 직접 봐야겠군.”

그동안 자유를 주었던 센텐을 모두 불러들이라는 말이었다. 또한 어떤 자가 어떤 편에 서서 의견을 내는지 봐야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황제의 머릿속에 나엘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마주했던 마호세르디의 다른 사람들도.

누구보다 쓸모 있고 일 잘하는 마호세르디.

하지만 그 속에 든 것은 주인도 잡아먹을 수 있는 송곳니들이 가득했다.

과연 그 송곳니를 뽑을 것인가, 두고 볼 것인가.

황제는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이미 결정 내려진 것을 괜한 의심과 고민으로 번복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상념을 모두 지우고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

지엘라는 벌써 세 번째 차를 새로 받았다. 목이 마르는 기분에 찻잔에 손을 댔던 그녀는 손을 도로 테이블 아래로 감췄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점점 시간이 다가오는 까닭이었다.

그녀는 이런 모습으론 다나한을 마주할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몸가짐을 정돈했다.

“화장은?”

머리, 화장, 장신구, 드레스. 벌써 몇 번째 묻는 것인지도 잊었다.

“뵀던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고저 없는 시녀의 말에도 진정이 안 됐다.

사실 시녀들에게 묻는 것은 그녀에게 의미가 없었다. 잘 보이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는데 다른 이들에게 아름답다 칭찬을 듣는 것이 무슨 상관일까.

지엘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다시 천천히 내뱉었다.

“당당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할 수 있어.”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그리 중얼거렸다. 그녀가 가장 빛났던 시절의 순간과 같은 느낌이길 바라며.

“걱정하지 마세요. 지엘라 황녀님께서 여전히 황실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모두 감탄했습니다.”

“다나한 경 주변에도 아름다운 사람은 많았어.”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다나한의 주변엔 예쁜 사람이 많았다. 마호세르디 가문이나 가신 가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랬기에 수도에서는 첫 손에 꼽힌다 자신하던 지엘라였으나 언제나 자신이 없었다. 아니,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기다리던, 아니 기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왔다.

“다나한 마호세르디 경께서 오셨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지엘라는 들어오라 전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다나한이 들어왔다.

어색한 듯 그러나 기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살짝 웃고 있는 입매, 검을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잡힌 손가락, 기사라는 걸 보여 주듯 바르고 딱딱한 걸음걸이까지.

그 무엇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지엘라 황녀님.”

그때와 똑같은 호칭과 눈빛.

지엘라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이 울컥 차오를 것 같았다.

“다나한 경…….”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 지엘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속했었다. 다음 주에 다시 놀러 오겠다고.

그를 뒤로하고 수도로 올라간 그녀는 청천벽력처럼 결혼 이야기를 들었다. 구설수를 일으키지 말라며 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막는 황제 때문에 끌려가듯 요반나로 가야 했다.

편지도 쓰지 못했다. 온몸으로 좋아하노라 표현하던 상대에게 결혼을 하게 되어 앞으로 만나지 못할 거란 말을 차마 전할 수 없었다.

그저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오랫동안 오지 않으시기에 데리러 왔습니다.”

지엘라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막아 놨던 댐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는데 어찌나 숨을 참는지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처연해 보이고 가슴이 저리단 것을 알고 있을까.

“저는…….”

자신은 그때의 지엘라가 아니라고, 이제는 마호세르디로 가지 못한다고.

그런 말은 입에서만 맴돌았다. 제 모든 것을 버리고서 단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나한일 테니까.

염치? 자존심? 그런 것들은 다나한 앞에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저는…… 다나한 경이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나엘라 앞에서는 그리 큰소리를 쳤지만, 다나한이 온다는 걸 들은 순간 알았다. 그의 입에서 제안이 나온다면 자신은 결국 마호세르디로 가게 되리란 것을.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제가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다나한이 지엘라의 앞에 무릎 꿇으며 하얗고 여린 손을 잡았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다. 이제야 터놓는 속마음이 단번에 지엘라를 함락시키는 듯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제가 당신을 데리러 간 적이 한 번도 없더군요.”

그래서 만나자마자 데리러 왔다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지엘라에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는데.

“나엘라에게 들었습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마호세르디를 오지 않으려 하시는지요.”

지엘라는 이미 한 번 결혼을 한 몸이니까.

이제는 이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지엘라가 아니니까.

나엘라에게 그런 말도 들었을까. 제대로 얘기해본 적은 없었다. 허나 나엘라라면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이 제게 수없이 와 줬던 것처럼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황궁은 위험해서 말입니다.”

다나한이 장난스럽게 살짝 웃었다.

예전에 그를 졸라 함께 승마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말의 속도에 놀란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웃음이었다.

“그러니 마호세르디에서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언제고, 수없이 찾아가겠습니다.”

지엘라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계절로 순식간에 데려가는 웃음이었다. 그 앞에서만큼은 다시 어릴 적의 지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일하게 저를 그 시간 속으로 이끄는 사람.

지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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