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깊은 어둠 속이라고 해야 할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을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분명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거늘 자꾸만 몸에서 힘이 빠졌다.
목적지까지 가면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잃을까.
소중한 사람들을 한 명도 잃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지난날이 우습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이라도 하지 말걸.
“다나한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다나한 공자님?
제 근처엔 다나한을 그리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호칭에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하녀가 눈에 들어왔다.
“지안이나 다른 이들은?”
제 전담 하녀들은 그녀들일 텐데 갑자기 낯선 하녀라니.
“라르바 집사님께서 잠시 심부름을 보내셨습니다.”
“뭐?”
프리야는 체드란을 따라 대공령으로 갔고, 가린은 자신이 심부름을 보냈다.
지안과 제니가 남아 있었을 텐데 두 사람 모두 심부름을 시켰다? 라르바가 시킨대도 안 따라갔을 텐데?
무력이 있었을까, 아님 함정일까. 라르바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불길한 예감을 참을 수 없었다.
나엘라는 금세 흉흉한 기세를 뿜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검을 찾으니 방 안에 잘 보관된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제 방과 체드란 방 사이 거실 소파에 자리해 있었다. 검을 가져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때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니는 공작님께서 선물을 가져가라 하셨기에 보낸 것이고 지안은 다나한 공자를 마중하러 나갔습니다.”
제니와 아버지는 꽤 친하다. 제 일을 매번 보고받고 있기도 하고 제게 문제가 생기면 제니를 붙잡고 늘어지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제니가 아버지께 갔다는 것까진 이해가 됐다. 선물이라고 하지만 정보를 전해 받으러 갔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안이 자신을 혼자 두고 다나한을 마중하러 갔을까. 말도 없이 말이다.
“라르바가 다른 말은 없던가.”
나엘라는 기세를 가라앉히며 자연스럽게 방으로 향했다. 그저 단장하러 간다고 생각했는지 하녀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다나한 공자님을 응접실에 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설핏 인상이 찡그려졌다. 소파 옆에 검을 들어 하녀를 바라봐도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뜰 뿐 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대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나엘라의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하녀는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들어왔습니다. 노크해도 못 들으셔서……. 다나한 공자님이 응접실에 도착하셔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지안이 마중을 나갔다면서?”
“지안은 지금 공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노크해도 못 들었다고?
그럼 지안이 잠시 다녀온다고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다나한이 제 상태를 확인하려 지안을 붙잡았을 수도 있고.
검을 잡아 본 적 없는 손과 평범한 하녀와 다를 것이 없는 걸음걸이가 시야에 걸렸다. 나엘라는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하녀의 물음에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 같았다.
그래도 짚고 넘어갈 것은 짚어야 했다.
“라르바에게 내 하녀를 함부로 건들지 말라고 전하라.”
손님을 응접실로 모시는 건 응당 집사의 본분이었다. 지안을 마중 보냈다는 건 일종의 항의와 같았다.
체드란의 집무실 앞에서 라르바를 쫓아낸 것 때문에 이리 행동하는 모양이었다. 나엘라가 거칠게 태도를 보였으니 본인도 협조적으로 굴지 않겠다는.
“그리고 집사의 본분을 똑바로 지키라고도 전해. 주인을 누르겠다는 심보를 가지면 마땅히 잘라 내야 하지 않겠나.”
“예.”
애꿎은 하녀에게 불똥이 튀었지만, 나엘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하녀를 지나쳐 가 방문을 열었다.
검을 놓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
탁, 테이블에 놓인 검에 다나한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자는 얘기더냐?”
“말투가 큰 오라버니 닮아 가네.”
단제에게는 경어를 쓰지만, 다나한과는 거리낌이 없었다.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우던 때도 있었기에 더더욱.
하긴 그때는 나엘라가 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 때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는 게 억울해 다나한을 꺾겠다고 온갖 난리를 쳤었지. 과거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황제랑 지엘라 부인은 만나고 왔어?”
“그래. 황제는 딱히 별말 없었고 지엘라 황녀님께서는 마호세르디에 가시기로 했어.”
“지엘라 황녀님? 오라버니는 그렇게 불러도 되나 보네.”
“황녀님이라 부르면 안 돼? 그러고 보니 너는 부인이라 부르는구나.”
“오빠가 그렇게 안 부르는 게 지엘라 부인도 더 좋을 거야. 신경 쓰지 마.”
나엘라는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자세를 편히 바꿨다.
“그리고 지안.”
“네.”
응접실에 먼저 와 대기 중이던 지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만약 내가 불러도 대답 없으면 대답할 때까지 얘기해.”
“어…… 아까 마중을 대신 나가라던 라르바 집사의 말을 듣고는 나엘라 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엘라 님께서 다녀오라고 하셨는데…….”
“내가? 정말?”
전혀 기억에 없어 당황스러웠다.
가만히 생각을 더듬어 보니 아주 희끄무레하게 그런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어지간히 정신을 팔고 다닌 모양이었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자 더는 안 되겠다며 다나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일어나. 나가자.”
“나가자고? 어디를?”
“식당에 가 밥이라도 먹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당장 일어나라며 다나한이 테이블 위의 검까지 챙겨 들고는 나엘라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별로 나가서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수도에 아는 곳 없잖아.”
수도에는 올라오지도 않는 다나한이 뭘 믿고 나가서 먹자고 하는 걸까.
“아는 곳은 많아.”
“어떻게?”
“예전에 수도에 오면 같이 가서 먹자고 지엘라 황녀님이 자주 말했었으니까. 아직 그 가게가 있다면 분명 맛있겠지.”
다나한이 지안에게 몇 군데 식당 이름을 알려 주었다. 워낙 예전에 들었던 장소들이라 없어진 곳도 있었고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가자. 바람이라도 쐬자.”
“그럼, 말 타고 가야 하는데?”
“대공비가 돼서 말은 좀 그렇지 않겠어?”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달리는 것은 더더욱 말이다.
“마차에 창문 열자.”
“그래.”
나엘라는 다나한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속이 어떻든 밥은 먹어야 했다.
*
다나한이 안내한 식당은 주 고객층이 귀족이라는 걸 티 내듯 내부 꾸밈이 고급스러웠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 의자에 덮어져 있는 벨벳 천 장식, 마호가니 테이블까지 모두.
하긴 황녀가 데려오려 했던 식당인데 외간이나 내부가 허름하면 더 이상할 터다.
다나한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알아서 시키겠노라 말한 사람은 어딜 갔는지 벌써 몇 분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언제 시키는데?”
“여기는 해산물이 맛있다고 황녀님께 들었는데 메인이 해산물인 게 없네.”
그 와중에 나엘라가 좋아하는 해산물을 먹겠다고 온 모양이었다.
“고기도 상관없어.”
“그래도 해산물이었으면 좋겠는데.”
없는 메뉴와 씨름하는 다나한을 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자리한 방은 개인실이라 넓지 않았다. 다만 답답하지 않게 조성하려 한 건지 식당 안이 훤히 보이도록 창이 뚫려 있었다.
개인실 밖에도 테이블과 의자는 놓여 있었는데, 건물 밖을 구경할 수 있도록 창가에 자리했다. 대부분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그때 나엘라의 시야에 익숙한 누군가가 걸렸다.
“하필….”
지안이 낮게 읊조린 소리에 다나한도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하일모라와 테너가 팔짱을 낀 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커튼 치자.”
다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둬.”
하필 이곳에서 만날 건 뭐란 말인가.
자리에 다시 착석하던 다나한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속이 어떻게 문드러지고 있는지 알기에 위로할 겸 데리고 나왔더니만 여기서 저 두 사람을 마주칠 줄이야.
“나엘라.”
“괜찮아. 그리고 내 생각은 변함없어.”
무슨 일이 생기면 강압적으로라도 하일모라를 데리고 나올 것이다. 그녀에게 어떤 원망을 듣더라도 말이다.
“그걸 말리려는 게 아니야. 나도 그 부분만큼은 같은 생각이니까.”
하일모라의 선택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으로 흐르게 된다면 말려야 옳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로 어떻게 손 놓고 볼 수만 있겠는가.
하지만 다나한의 걱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너를 걱정하는 거야.”
“하일모라에게 어떤 원망을 들어도 상관없어.”
“그래. 그 원망을 들었을 때가 문제야. 겉만 멀쩡하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렇다고 하일모라가 위험해지도록 둘 수도 없잖아.”
“하지만 원망을 들었을 때 네가 버틸 수는 있어야지.”
그 원망을 버티고 친구를 잃어도 이겨 낼 최소한의 힘.
그런 힘들은 나엘라의 내면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다나한은 더욱 걱정이 되었다.
“……네가 자신을 탓하면 안 된다는 얘기야. 하일모라가 위험해진 것에 네 잘못은 없어.”
“하일모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돼.”
“어떻게?”
“너라면 정말 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와 위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한없이 갉아먹지 않도록.
“하일모라의 선택을 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하일모라가 원하는 걸 들어주기 위해서.”
최선으로 노력해도 상황이 최악으로 흐른다면 결국 나엘라는 무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상황에서 하일모라를 설득하고 빼내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어느 시선에서 보아도 나엘라가 하일모라를 위해 노력했음을 보인다면 하일모라도 마냥 원망할 순 없을 터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노력이고 뭐고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네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엘라의 원동력을 아는 만큼 말릴 수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이야말로 동생을 지탱하고 이끄는 힘이었다.
그러니 나엘라가 조금이라도 본인을 탓하지 않고 버티려면 이 방법이 좋았다.
“내 마음이야 그렇지만…… 넌 널 위해 노력해 봐. 하일모라의 안전이나 그런 거 말고, 하일모라의 마음을 위해.”
잠시 머뭇거리던 나엘라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나한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하일모라의 편이 되어 지지하기엔 테너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일의 결말이 뻔히 보이는데 테너에게 떨어지지 않으려는 하일모라를 지지해 주라고? 자신의 말을 믿지도 않는 하일모라에게?
나엘라가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정말 싫었지만 하일모라를 위해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도록 나서 줄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어떤 원망을 듣든 하일모라를 빼내 올 것인가.
“사랑을 확인하는 거면 쉽잖아.”
나엘라는 그리 말했다.
자신이 전해 준 독을 먹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둘 사이에 어떤 위험도 생긴 적이 없으니 독과 함께 테너를 흔들어 보면 된다.
“하지만 하일모라는 사랑이길 바라잖아.”
그게 어려운 거다.
사랑이길 바라니 억지로 믿으려 들고 의심하지 않으려 하고. 그러니 독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런 하일모라를 지지해 줘야 하는 거다.
“쉬운 게 없어.”
지친 나엘라를 보며 다나한은 작게 웃었다. 그는 메뉴판을 치워 버리고 대기하던 이를 불렀다.
“요리사에게 해산물 위주로 코스를 내어 달라 하게. 메뉴판에 없어도 가능하겠지?”
갑자기 들려온 뜻밖의 권력 남용에 나엘라는 잠시 놀란 눈을 했으나 결국 말리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