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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75)화 (175/220)

174화

나엘라는 식사하는 내내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다나한이 주꾸미 머리로 된 요리에 깜짝 놀랐을 때도, 랍스터 회가 아직 살아 있다며 호들갑을 떨 때도 그저 건성으로 대꾸만 해 줬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제 행동으로 벌어질 파급력과 잃을 수 있는 것도 따져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그것들이 하일모라를 잃는 것보단 낫다는 판단이 섰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

랍스터 집게를 들고 있던 다나한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려.”

“식사 중인데 그런 말은 좀…….”

무슨 의미로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나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뒤이어 ‘우리가 아무리 전장에서 함께 뒹굴며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친남매라도 지킬 건 지키자’는 소리나 해 댔다.

분명 마호세르디에선 이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닌데 왜 동생 앞에서만 이리 망가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올 때 손 잘 씻고 와라.”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개인실을 나서자 식당 화장실로 가는 통로가 보였다. 여자 화장실은 오른쪽 끝에 있고 단장을 할 수 있는 휴게실도 따로 있었지만, 나엘라는 왼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흡연실과 남자 화장실밖에 없음에도 당당한 걸음이었다.

망설임 없이 걸어가 흡연실 문을 연 나엘라는 안에 있던 남자 둘과 눈이 마주쳤다. 떨어져 앉아 있지만, 서로 안면이 있는 듯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낯선 얼굴의 사내에게 나엘라는 부탁 겸 협박을 전했다.

“세레노피 백작과 단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남자는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시가를 커터로 잘라 내고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로써 흡연실에는 테너와 나엘라, 둘만 남았다.

“담배를 피우시는지는 몰랐습니다.”

“술은 마셔도 담배는 피지 않네.”

갑작스러운 만남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테너는 시종일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이제 보니 따뜻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에 가까웠다.

고작 신흥 귀족인 그가 대공비이자 마호세르디의 막내딸 앞에서 여유 있을 이유가 무엇일까.

“세레노피 저택으로 오셨으면 제대로 대접이라도 해 드렸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런 잡담이나 하려고 들어온 것 아니네.”

테너가 들고 있던 담배를 끄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배를 피우는지도 몰랐는데, 귀족들이 애용한다는 시가는 취향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평민들이 사용하는 싸구려 담배였다.

“무슨 말씀을 하러 오셨습니까.”

“부탁하러 왔네.”

“부탁…… 말입니까?”

“그대가 센텐의 일원인 건 알고 있어.”

마리즈의 쪽지를 받고 테너를 감시하기 시작했을 때, 다름 아닌 감시자들과 만나는 그를 보았다.

테너가 들어간 장소는 감시자들의 은신처가 불타며 임시로 사용하는 은신처 같았다. 그곳에서 그는 이때까지 본 모습과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시자들의 은신처에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며 일을 처리하고는 저택으로 돌아가던 테너.

아무래도 감시자들의 은신처이기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정확한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정황이 너무나 명백했다. 애초에 나엘라도 감시자들의 리더가 사라지면 잠깐은 센텐이 도와주리라 생각했었다.

전보다 보안이 더 엄중해져 알아 올 수 있는 다른 정보는 없었다. 센텐의 다른 일원이라도 확인했으면 좋았을 것을 나머지는 전부 대리자를 보내거나, 테너 혼자서 전담하는 모양이다.

지안은 감시자들과 관련된 사람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엘라의 감은 그가 센텐이 맞다며 경고했다.

“별 볼 일 없던 세레노피 가문을 단숨에 신흥 귀족으로 만들 만큼 야망이 있다면 거기서 멈출 생각은 아니겠지.”

나엘라는 하일모라를 위해서 테너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너가 어떤 성향의 자인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테너에 대해 잘 모르기에 어려웠고 알아볼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세레노피 가문에 심어 두었던 마호세르디 첩자가 조금 도움이 된 정도다.

“백작은 하일모라와 어쩔 생각인가?”

내내 대답이 없던 테너는 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고는 하나 펴도 되냐고 물어 왔다. 고개를 끄덕이자 성냥이 탁 그어지며 불이 올라왔다.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그가 가볍게 재를 털어 내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아무리 제 부인과 친하다고 하지만 부부 사이의 일에 관여하는 건 달갑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의 일이라면 관여하지 않을 걸세.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세레노피 백작 부부에게 사랑이 있었는가네. 그리고 나와 정말 관련이 없는지도.”

“하일모라는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공비 전하께서 우리 부부와 관련이 있을 리가요. 아, 제 부인과 친하시니 관련이 있으시군요.”

테너가 하일모라를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무너질 하일모라가 떠올랐다.

이어진 말들은 전부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말장난일 뿐이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돌려 말하고 있었다.

“그대가 하일모라를 진심으로 부인이라 생각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전제 조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부인이라고 생각한다면─.

“하일모라는 이용하지 말아 주게.”

“제가 제 부인을 이용할 리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협박할까, 아니면 약점이라도 잡아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하일모라가 테너를 사랑하니까, 친구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능한 선에서 모두 들어주겠네.”

무엇을 잃게 되든 그것이 하일모라보다 값질 리 없다. 또, 테너가 마호세르디나 체드란을 포기하라는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능한 선에서라고 얘기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내어 줄 생각이 있었다.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실 겁니까.”

테너는 오로지 나엘라의 자존심을 깎기 위한 목적으로 그리 물었다. 자존심이 하일모라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한 것 같기도 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기꺼이.”

자존심 따위가 하일모라보다 중요할 리가 없다. 더러운 흡연실 바닥임에도 당장 나엘라가 무릎을 꿇을 것처럼 굴자 테너는 되었다며 손을 저었다.

“정말 그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말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물론 센텐에 이 일을 말하지 않겠다며 가볍게 웃었다.

“아, 마침 대공비 전하를 만난 김에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테너는 마지막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어렸을 때부터 굉장히 똑똑하셨다던데, 대공비 전하의 눈에는 제가 어떻습니까?”

“그대가 대단한지 묻는 건가?”

나엘라와 자신을 비교해 보고 싶은 것일까.

센텐에 들어가 황제에게 조언하고 제국을 제 손바닥에 굴렸다는 자만심이 엿보였다. 센텐이 했을 일을 생각해 보면 그런 자만심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서 유달리 마호세르디 사람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기에 저도 궁금했습니다. 대체 어떤 자들이길래 그럴까. 그런데 이때까지는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고요. 물론 대공비 전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공작과 다른 이들을 말하는 것일까.

단제나 공작을 보면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속에서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나엘라는 표정에 미동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족을 건드렸다고 해도 순간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가만히 호흡하며 테너를 바라보았다.

“은신처랑 몇 가지 다른 일들은 정말 놀랐습니다. 요반나 때도 좋았고요.”

테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자신이 완벽하게 우위에 있기라도 한 양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센텐에서 만났으면 제가 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졌다? 그들 사이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있었던가.

나엘라의 행동과 센텐의 대응이 테너에겐 그저 이기고 지는 게임일 뿐이었을까.

활짝 웃는 하일모라의 표정이 나엘라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너는 나엘라를 남겨 둔 채 흡연실을 빠져나갔다.

타인에게 이처럼 자존심을 상해 본 적은 없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하일모라에게는 더 조심하고 잘 대해 줄 테니.

이제는 하일모라가 나엘라의 약점임을 제대로 인식할 테니까.

*

주르륵, 화장실 벽을 타고 하일모라가 주저앉았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테너가 너무 돌아오지 않아 그를 찾으러 왔을 뿐인데.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오랜 친구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채자마자 붙잡았던 흡연실 문고리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문을 타고 들려왔다.

‘하일모라는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 사랑받는 대상이 테너뿐일까. 보통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나.

아니다. 그래도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대화의 일부분만 들린 걸 수도 있었다.

하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들을수록 구렁텅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외면했던 일들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실 겁니까.’

테너가 정말 이리 얘기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상대는 자신의 친구인 데다, 심지어 대공비였다.

이야기를 듣다가 누군가의 발소리에 도망치듯 여자 화장실로 숨었다. 들어오자마자 힘이 풀려 주저앉았지만, 드레스가 더러워질 거란 걱정은 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바로 앞에서 모든 걸 들었으면서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귀족 간의 알력 싸움일 수도 있지 않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나엘라에게 질 수 없어서,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어서……. 그런데 테너가 왜? 나엘라와 척을 져야 하는 일이 뭐길래?

그가 정말 센텐이라서……?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이 아직도 생생했다. 누군가에게 부딪혀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그의 모습이.

‘날씨가 아직 춥습니다.’

계절은 봄이었으나 여름이 다가오고 있던 그런 날이었다. 누구든 설레하는 봄에 시작된 사랑이었다.

그와 만난 뒤 자연스레 함께 잠들고 눈을 뜨는 상상을 했고, 그 꿈이 이루어졌을 땐 날 듯이 기뻤다.

에스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와 너무 친하기에 나엘라는 생각을 못 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테너의 뒷조사는 한번 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때 뒷조사를 했다면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즈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하일모라, 안에 있습니까?”

순간, 번쩍 정신을 차린 하일모라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네. 잠시 손을 씻고 있어요.”

“자리에 없기에 혹시나 해서 와 봤습니다. 자리에서 기다릴게요.”

여전히 다정한 그의 음색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서둘러 손을 씻은 하일모라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나엘라가 건네준 독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서랍에 고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일모라는 입술을 꾹 깨물곤 표정을 정리했다. 밖으로 나가 자리로 돌아가니 이미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오늘 식사는 어땠습니까?”

하일모라는 평소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굴을 감쌌다.

“오랜만에 외출이잖아요. 너무 좋았어요.”

“다행입니다. 저번에 이 식당에 와 보고 싶다고 한 게 생각나서요.”

“고마워요. 그리고…….”

평소와 같은 테너를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 사랑해요.”

“저도요.”

별다를 것 없는 대답 속에서 하일모라는 한없이 밑바닥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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