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폐하, 체드란 대공이 또 두칸과 접선했다고 합니다. 의견을 조율 중인 것 같은데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습니다.”
“또 접선을 했다, 라…….”
황제는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을 따랐다. 쪼르륵 잔 안으로 들어간 와인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그래서 자정이 가까운 시기에 가져온 정보가 고작 그것인가?”
“죄송합니다.”
헤르만은 마음이 급해 그랬다며 두서없는 변명을 뱉었다. 이 변명 역시 황제의 마음엔 들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센텐 내에 첩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센텐의 다른 이들이 없을 때, 자신과 황제 단둘만 자리한 순간에 말해야 했다.
누군가가 들었을 때의 파장을 걱정한 것이 아니다.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중책을 맡았으니 내부 고발을 입에 담는 몫도 제 일이라 여겼다.
예상대로 첩자라는 말이 나오자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확증이 있는가?”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철저하게 관리하고 감시하던 근위대에 갑자기 첩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감시자들의 은신처는 불탔으며 리더도 사라졌습니다.”
“감시자들 쪽에 배신자가 있을 수 있지.”
“그렇다면 은신처가 불타진 않았을 겁니다.”
감시자들에 배신자가 생겼다고 한들 은신처를 불태우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의미였다.
“오히려 은신처를 내버려 두고 그곳의 정보를 빼내는 게 낫습니다. 은신처를 불태웠다는 건 접근이 어렵거나 자주 들락거리면 의심을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유동될 정보를 차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헤르만의 그릇이 크지 않다는 건 황제도 알고 있었다.
욕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뺏길까 전전긍긍하고 남보다 우월한 사람임을 확인받고자 하는 편이었다.
그런 성격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황제에게 보고’라는 임무를 부여한 것은 자신과 닮았기 때문이었다.
제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자. 그럼에도 센텐의 일원이 될 만큼 머리는 똑똑한 자.
“확실히 불을 낸 건 정보 차단용이 맞겠지.”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정확한 의도 파악이 어려웠다.
센텐 내에서 너무 많은 의견이 나와 어떤 의견이 맞는지 확언할 수가 없었다. 의견 대부분이 일리가 있었고, 그것을 가려내어 진짜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확실한 정보가 없다.”
의견이 이렇게 갈리는 이유는 모두 확실한 증거, 또는 정보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를 위해 감시자들을 키워 냈거늘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현재 감시자들은 어떻지?”
“임시 리더를 정하여 새로운 은신처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각 가문에 심어 둔 감시자들은?”
“폐하 측의 큰 움직임은 없습니다. 황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체드란만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어떻게 체드란만 움직이고 있단 말인가.
감시자들의 보고가 사실이라면 체드란이 혼자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그는 정말 반란을 생각하고 있을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감시자들의 정보가 틀렸을 리는 없고.”
최종 계획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 만들어 놓은 감시자들이다. 무슨 문제가 생겼을 리 없다. 하지만…….
황제는 와인을 들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쌉싸름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입안에 가득 찼다.
“푸르텐가에 연락해서 감시자들을 한 번 확인하라고 전하라.”
최대한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으려 웅크려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그대는 센텐 내의 첩자를 확인하도록.”
아무래도 최종 계획을 앞당겨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감시자들을 더 늘려라. 특히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중점적으로.”
“예. 알겠습니다.”
헤르만이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마호세르디가 보안이 강해 쉽지 않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다만 노헤스카는 가능할 것이다.
*
하일모라는 비어 버린 병을 침대 아래로 숨겼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이제 찻잔으로 옮겨졌다. 차를 마실지 안 마실지는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될 터였다.
“여기 있었군요.”
정원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 그곳까지 하일모라를 찾으러 온 테너는 자연스레 앞자리를 차지했다. 늘 있는 일이니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물론 이상하게 볼 시종조차 이곳에는 한 명도 없었다. 하일모라가 혼자 사색을 즐기겠다고 사람을 물렸으니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가장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말이다.
“혹시 제가 방해했습니까.”
“아니에요. 이곳에서 우리 자주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당신이 왔어요.”
그때는 행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예전과 조금 달랐다. 어딘가 불안해 보였고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오늘은 어디 안 나가시나 봅니다.”
테너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항상 보던 모습인데 오늘따라 저 자세가 꾸며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의심하기 시작해서일까. 평상시라면 절대 몰랐을 미묘한 어색함이 눈에 들어왔다.
“네. 날씨가 상당히 더워지는 바람에 사교계도 조금 잠잠해져서요.”
“휴양지에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쯤이면 귀부인들도 북쪽으로 여행을 떠날 텐데.”
“아직은 별생각이 없네요.”
“다녀오세요. 이번 사교 시즌엔 아주 바빴잖아요.”
나엘라가 부탁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신흥 귀족들의 부인과 영애들을 만나고, 그들을 끌어모아 대표가 되기 위해서.
이미 그 기반은 다 만든 데다, 하일모라의 영향력이 가장 커지기도 했다.
혹시 그것도 테너 덕분이었을까.
자신이 나엘라의 그 계획을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 전에 나엘라가 관련이 있는지 말했던가?
“한번 생각해 볼게요. 이왕이면 당신도 같이 가요. 당신도 아주 바빴잖아요.”
하일모라는 테너와 늘 함께하기를 바랐다. 함께 여행을 가고 데이트를 하고.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테너는 아주 바빠 함께하지 못하는 일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를 이해했고, 동시에 사랑이 아니라고 의심한 적은 없었다.
“미안해요. 아직은 힘들 것 같아요. 하일모라도 내 사정 알잖아요.”
황후의 편이었다가 처형 이후 갑자기 떨어져 나왔으니 그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인맥을 단단히 해 놔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 저도 안 갈래요.”
“하일모라라도 다녀와요.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래요. 정 그렇다면 대공비 전하와 베르에티 영애도 있잖아요.”
그래. 테너는 하일모라가 베르에티와 친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황후를 대적할 때는 베르에티와 함께했으나, 그 이후로는 크게 접점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테너가 진짜 센텐이라면 황제에게 그 이야기도 들어갔을까.
루부스 후작가가 나엘라의 편임을 눈치챘을까.
“다들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요. 알다시피 나엘라는 대공 전하께서 전쟁 중이시라 함부로 못 돌아다니거든요.”
테너를 믿는다면 나엘라의 이야기를 계속 꺼내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굳이 나엘라를 입에 올렸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짝 내민 미끼처럼.
“아, 그러셨죠. 대공비 전하께서도 마음이 안 좋으시겠어요. 이럴 때야말로 친구인 당신이 힘이 되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어떤 위로를 해 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워낙 강한 아이이기도 하고요.”
하일모라는 손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일상적인 대화일 뿐이었다. 테너는 그저 부인의 친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릴까.
“그래도 당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를 겁니다.”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대공 전하께서 무탈하신지 물어봐도 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겠죠. 대공비께서는 다른 사람과도 만날 거 아니에요. 기분 전환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물어봐요.”
“나엘라는 딱히 만나는 사람이 없어요.”
“그때 누구랑 친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누구더라.”
손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무심코 찻잔을 잡은 하일모라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깨닫곤 번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미소를 지은 후 그를 바라보았다. 제 표정을 가만히 훑던 시선과 마주친 순간 피가 식은 듯 전신에 한기가 들었다.
“저나 베르에티 영애 아니에요?”
문득 적을 상대할 적의 나엘라가 떠올랐다. 그녀의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또 사교계에서 배우고 행해 왔던 태도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그것도 아니면…… 음, 나엘라는 친한 사람이 정말 별로 없어서요.”
“그래요?”
이 시선 속에 담긴 것을 왜 몰랐을까. 분명 그는 다정하게 웃고 있지만, 안에 담긴 것의 온도는 차가웠다.
이번에는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아니면 한 번도 사랑이었던 적이 없어서?
하일모라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를 시험하고 확인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차라리 정신없이 아프길 바랐다. 그러면 베인 것처럼, 찢어질 것처럼 아픈 속이 조금 덜해질 것만 같았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물밀 듯이 두려움이 솟아났다.
진짜 사랑이 아닌 것만 같아서.
“나엘라가 요즘 정신이 없는 것 같기는 했어요. 한번 방문하긴 해야 할까 봐요.”
테너가 만족스럽다는 듯, 더 환하게 웃었다.
“가서 이야기 좀 들어드리고 와요. 속내를 터놓는 친구는 하일모라뿐이잖아요.”
“그럴게요.”
하일모라는 잔에 있는 것을 삼켜 내었다. 가득 차 있는 잔이 아니었기에 두 모금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
나엘라는 문득 드는 이상한 예감에 어두운 밖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체드란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다. 제 발로 들어온 두칸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의논이었다.
“두칸이 확실하게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지 확인부터 해야겠지.”
나엘라의 중얼거림에 사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만 가능하다면 좋은 협상이 될 겁니다.”
“전쟁을 크게 벌이는 척해도 좋아. 노헤스카 기사 중에는 첩자를 가려냈지만, 병사들이나 주변 영지들 지원 병력에는 첩자가 없다고 할 수 없어.”
“그러니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첩자가 정보를 빼낼 수 없도록 해야겠죠.”
“고립된 곳에서 전쟁을 벌이는 게 좋겠지. 그사이 체드란은 기사들을 이끌고 빠져나올 수 있다면 좋겠는데.”
“병사들과 기사들을 나눠서 움직이면 좋겠지만 누가 봐도 이상할 겁니다.”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황제의 눈도 속이고 첩자를 고립시켜 정보를 빼돌릴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두칸과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라면 체드란은 당연히 그곳에 있다고 생각할 테니 시간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이상하네.”
나엘라는 창밖을 보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한 날이었다. 꼭 뭔가 벌어질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