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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78)화 (178/220)

177화

잠시 일이 있어 저택으로 돌아왔던 단제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서 있는 누군가 때문에 발을 멈췄다.

“드디어 오셨네요?”

씹어 뱉는 듯한 음성으로 단제를 반긴 마리즈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잠시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일이 많아서 금방 돌아가야 하네.”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이러다 다른 이들이 우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오해하겠군요.”

좋다고 생각할 사람도 없을 텐데 말이다. 같이 식사도 하지 않는 부부를 누가 사이좋다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이렇게 마주한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서재로 가지.”

단제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마리즈도 그 뒤를 따랐다. 요즘 그녀를 보고 있으면 몇 년 동안 조용히 살았던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 이상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은 거둬 주세요.”

심지어 반항적이고 과격하다. 한마디 한마디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고 제 뜻을 관철할 때까지 훼방을 놓는다.

어린 시절이 어땠길래 이런 성격이 됐을까.

“차가 필요한가?”

단제는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본론을 꺼내라고 압박했다. 그들이 단란하게 차를 마실 사이는 아니었던 탓이다.

괜한 걱정이었다는 듯 문이 닫히고 자리에 착석하자마자 본론이 나왔다.

“당신도 이제 선택해야 하지 않아요?”

“무엇을?”

“정말 이렇게 목석같고 뻣뻣한 사람일 줄 몰랐어요.”

난데없는 비난에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단제도 제 성격을 모르진 않으나 이렇게 대놓고 들을 줄은 몰랐다.

“황제가 감시자들을 늘렸습니다. 주로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상대로요.”

“감시자들에서 손을 뗐다고 하지 않았나?”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연줄들은 남아 있습니다. 제가 장남보다 능력이 좋았거든요.”

“그랬군.”

그저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듯 단제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즈는 그 모습에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능력이 어느 정도로 좋았는지 들려드려요?”

“굳이…….”

“마호세르디 공작님께서 사람을 모으고 계시죠. 그 정보가 황제에게 가는 걸 차단했어요. 마호세르디의 보안은 좋을지 모르나 상대도 그런 건 아니니까요.”

단제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사람을 모은다’는 말은 절대 긍정적으로 들을 법한 뜻이 아니었다. 공작이 갑자기 움직이는 이유를 단제가 모를 리 없었다.

“능력이…… 상당히 좋군.”

이것만큼은 진심이었다.

가문에서 나온 지가 한참 되었음에도 아직 정보를 차단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의미이니. 따르는 이들도 많았던 것 같고 구조와 체계도 바꿀 수 있는 듯했다.

“은신처가 불타 버리는 바람에 제가 끼어들기 쉬웠죠. 그래서 은신처는 누가 불태운 거예요?”

“그건 모르나?”

“감시자들도 모르는 건 저도 당연히 모르죠. 당신도 몰라요?”

“모르는데…….”

“하긴 당신이 알 리가 없지.”

뭔가 원색적인 비난이 따라왔다.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흘려들을 사항이 아님에도 단제는 자꾸만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감시자들의 은신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기껏해야 센텐 정도?”

마리즈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홀로 중얼거렸다.

“클루아조, 그 인간도 모를 텐데. 진짜 센텐에 첩자라도 있나…….”

나엘라에게 은신처에 대한 정보를 내어 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센텐에 대해 듣고는 무언가 생각하더니 나중에 따로 묻겠다고 말해 왔다. 아마 마리즈를 완전히 믿을 수 없고 리더의 정보도 알지 못하기에 혼선이 생길 법한 정보는 미뤄 둔 것 같았다.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으니 나엘라는 아직 은신처의 정보를 모를 것이다.

“아니면 그 망나니가…….”

푸르텐가의 첫째이자 집안의 수치와 다름없는 놈을 떠올렸다. 저절로 이가 갈리는 기분에 그녀는 휙 고개를 돌려 단제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제는 진짜 당신도 선택해야 해요.”

“그것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군.”

“어떤 거요?”

“이제는 푸르텐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삶이 더 나아지길 바랐다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대는 아직 푸르텐이군.”

정보를 차단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푸르텐이 아니라고,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기엔 어폐가 있었다.

능력이 좋은 것은 인정하지만 마리즈에 대한 믿음은 하락했다. 그녀가 아무리 마호세르디와 나엘라를 도와준다고 한들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그러니까 제가 진작에 얘기 좀 하자고 말했잖아요. 나도 당신과 얘기가 끝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고요.”

“무슨 얘기를?”

마리즈, 본인의 이야기를 말이다. 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단제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해해야 믿음이 생길 게 아닌가.

“저는 당신을 선택했어요.”

마리즈의 확언에 단제는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우리 둘의 결혼을 추진했지.”

“그 과정에 제 입김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군요.”

“그대가 황제 폐하에게?”

“아니요. 당신 혼인 상대의 적임자는 저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죠. 정보를 더 얹고 차단하면서요.”

단제에게 감시가 필요할 것이다, 푸르텐의 마리즈가 마땅할 것 같다, 그렇게.

푸르텐으로 살지 않기 위해 가장 푸르텐 같은 짓을 저질렀다. 제 욕심으로 끌어들였기에 마리즈는 항상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몇 년을 단제에게 다가가지 않은 채 얌전히 기다렸다. 두 번 다신 푸르텐의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제 삶과 가장 다른 길을 걸으며 묵묵히 인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참을성도 결국 끝을 맞이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사람, 선택한 방식이 맞다고 확인받고 싶었어요. 이제는 푸르텐의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했죠.”

자신에 대한 확신 말이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살아온 방식을 모두 버렸다. 전과 같은 방법을 쓴다면 단제와 결혼해서도 여전히 푸르텐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당신이 내 선택을 망쳐 놓으려 하잖아요.”

이대로 마호세르디가 몰락하고 단제가 추락하면 자신의 선택은 곧 틀린 선택이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초조해하던 차에 단제가 처음으로 먼저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마치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초연하기만 했다.

“당신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예요. 내 선택이 틀린 것이 되면 나 자신도 잃는 거라고요.”

더 나은 삶, 평범한 삶.

그런 것들을 위한 선택의 끝이 죽음이라면 결국 푸르텐이 옳았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가.

그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나엘라를 도왔다. 하나, 초조한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푸르텐의 방식을 사용하고 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이라고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당장 마호세르디 공작이나 나엘라만 보아도 온갖 짐을 진 채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코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단제를 보며 마리즈는 혼란스러워졌다.

제 아버지, 제 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일까? 자신이 단제 마호세르디를 잘못 본 걸까.

“나는 그대를 모르고, 그대는 나를 모르지.”

단제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가문의 족쇄이자 약점일세.”

단제가 마리즈를 모르는 것처럼 마리즈라고 단제를 알지 못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왜 우유부단하게 굴 수밖에 없는지, 왜 선택하지 않는지와 같은 행동들을 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일세.”

그가 이뤄 놓은 것, 그의 주변 사람들, 그가 걸어왔던 길.

어떤 것도 단제 본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제 것이 아니니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다.

“황실 근위대 단장은 황제가 준 것일세.”

그러니 그에 따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

“진짜……!”

마리즈가 이를 악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제 것이 하나도 없는 삶,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던 삶.

모든 것을 조작해 그와 결혼까지 한 마리즈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그래서 마음이 자꾸 아팠다.

그 기분을 알 것 같아서, 그리고 결혼조차 선택할 수 없던 일에 자신이 일조했기에.

“그러니까…… 이번엔 당신이 선택해요.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 된다 한들 그 이후는 당신의 것이에요.”

마리즈는 제발 자신이 도울 수 있게 해 달라며 단제에게 간절히 빌었다.

*

집무실 벽에 커다랗게 붙여진 지도.

나엘라는 그것을 계속 바라봤다.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두칸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노헤스카 병사들을 움직일 것인가.

“황제에게 두칸과의 접선이 들어갔을까요?”

노헤스카 병사들 사이에 첩자가 있다는 것을 가정한 뒤 움직여야 한다.

기사들과 다르게 훨씬 수가 많은 데다 추가로 그때그때 징집되기도 하는 병사들은 건드릴 수 없었다. 병사들 사이에 있는 첩자를 잡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다. 색출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들어갔을 거야.”

“그럼 황제가 의심하겠군요.”

“아마 체드란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

“그럼 나엘라 님께 일을 맡기지 않을 것 같아요.”

원래 계획은 황제를 흔들어 자신을 믿게 한 뒤 센텐에 접촉하는 거였다. 또는 센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하지만 테너가 센텐임을 확인하고, 체드란과 두칸이 접선하며 일이 틀어졌다. 황제는 나엘라를 믿지 않을 것이고 센텐에 접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린 탓에 쉽사리 황제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숙제도 해결은 물론, 잘 흔들리고 있는지도 확인하러 갈 생각이었지만 지금 움직여서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할 게 뻔했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상관없어. 그런데 아직 이해 안 되는 게 있긴 해.”

“어떤 거요?”ㄴ

“황제가 마호세르디와 체드란에게 유하다는 거?”

“유하다고요?”

“대충 표현하면 그런 거고, 황제가 이상하게 우리의 청을 다 들어주었잖아. 체드란이 반란군을 진압하겠다며 사령관 자리를 달라고 했을 때도 그렇고.”

다나한의 승계와 관련해서도 웬만한 것은 전부 들어주었다. 심지어 마호세르디에서 알아서 하라며 밀어주기까지 했다.

“황제, 대체 무슨 생각일까.”

하일모라에게서 자신에 대한 정보를 빼 갔다면 베르에티와의 관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황후를 상대하느라 벌인 일들이야 황권에 도움이 되니까 내버려 두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동부, 서부, 남부가 손을 잡은 꼴이다.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왜 내버려 두고 있을까.

그나마 클루아조와 저의 사이는 모를 테니 다행이었다. 그건 하일모라도 잘 모르는 일이니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다.

혹시 클루아조를 수도에 억류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일까.

북부까지 손을 잡으면 감당이 안 되니까?

복잡한 상황에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집무실 문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앞에 서 있던 지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뒤를 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대도 발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것이 원칙인데 무슨 일이지.

곧이어 문이 열리고, 가린이 다급히 서재로 들어왔다.

“나엘라 님, 하일모라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나엘라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테너 세레노피 백작이 만나 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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