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우선 상황 파악을 해야 했다. 하일모라가 왜 독을 마셨는지가 중요했다.
단순한 의심으로 그를 시험하기 위해 마셨을까. 아니면 무언가 직접적인 원인이 있어서?
어쩌면 테너와 문제가 생겨 홧김에 마셨을 수도 있다.
하일모라가 테너에게 무언가를 흘렸다면 지금 당장 만날 수는 없었다. 최소한의 정보도 없이 만난다면, 테너의 술수에 이끌려 다니기만 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하일모라의 의식이 어서 돌아와야 하는데…….
“보통 하루면 돌아올 거야. 물론 고열도 있고 정신이 온전치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의식이 있을 때 가야 해.”
나엘라가 방 안을 서성였다.
“테너가 왜 보자고 했을까. 그것도 하일모라가 쓰러지자마자.”
자신이 독을 건네줬다는 걸 들켰을까? 하일모라가 잘 숨겼더라도 대화 내용에서 유추했을 수도 있다. 의도치 않게 걸렸을 수도 있고.
“하일모라가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아마 쓰러지자마자 의원을 불러 중독 반응 검사를 해 봤을 거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 앓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독을 의심할 테니까.
“그나저나 하일모라 님은 괜찮으실까요?”
옆에 있던 지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 왔다. 일주일을 앓게 되는 독이라는 건 알고 있어 몸보단 마음에 대한 걱정이 컸다.
분명 며칠 전에 식당에서 봤을 때까지만 해도 행복해 보였다. 어떤 감정으로 독을 마셨든 지금 하일모라는 마음이 힘들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더 서성였을까,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 들려왔다.
“하일모라 님께서 의식을 차리셨답니다. 고열로 제정신을 유지하시지는 못하나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한 모양입니다.”
나엘라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테너를 어떻게 상대할지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하일모라가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어떤 마음으로 독을 먹었을까. 몸은 얼마나 아플까.
“당장 세레노피 백작저로.”
그녀의 명에 마부는 세차게 채찍을 내리쳤다.
*
“오셨습니까. 백작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집사의 정중한 말에도 나엘라는 그를 무시한 채 지나쳤다.
“됐네. 하일모라부터 볼 것이네.”
“하지만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니…….”
“그대는─.”
반 바퀴를 빙글 돈 나엘라는 차가운 시선으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가 되어서 주인의 상태를 외부인에게 쉽게 알려서 되겠는가.”
한마디를 쏘아붙인 나엘라는 머뭇거림 없이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하일모라의 방이야 어딨는지 알고 있었다.
나엘라와 그녀의 하녀들, 호위 기사들이 저택 복도를 가르고, 하일모라의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었다. 안에 있던 의원과 시종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하일모라.”
쌕쌕, 가느다란 숨을 내뱉던 그녀가 벌건 얼굴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아픈 것인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나엘…….”
하루 만에 쉬어 버린 목소리가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모두 나가 있게.”
“하, 하지만…….”
“해독제는 먹였을 테고, 그저 옆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닌가? 모두 나가 있게.”
나엘라의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이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그 어이없는 광경에 나엘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대공비가 명했다손 방에 한 명도 남지 않다니.
테너는 진짜 망할 새끼였다. 부인이 독에 당했다. 믿을 만한 이들 말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어야 옳다.
설사 오래된 친구라도 그건 하일모라가 나엘라를 믿는 것이지, 테너가 나엘라를 믿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나엘라가 준 독임을 알아챈 걸까.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보면 될 터.
“하일모라, 괜찮은 거야? 아니, 내가 이렇게 묻는 것도 웃긴 일이지.”
나엘라는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누워 울긋불긋 열꽃이 올라온 친구의 모습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건지를 깨달았다.
땀에 푹 젖은 하늘색 머리카락과 정신없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엘라….”
하일모라는 잔뜩 터 버린 입술을 억지로 벌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말할 힘도 없는 그녀를 마주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일모라는 그런 나엘라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미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 때문에…….”
그 소리가 너무 작아 나엘라는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하일모라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무릎 꿇지 마…….”
무릎을 꿇지 말라고?
식당에서 테너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그 대화를 듣기라도 한 걸까.
“우리가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 버렸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가녀린 손가락이 이불을 더듬거리며 나엘라를 향해 다가왔다. 후끈거릴 정도로 열이 올라 뜨거운 손이 나엘라를 감쌌다.
“그 사람은 내가 안다는 걸 몰라…. 그러니까…….”
하일모라의 손을 마주 잡자 미소가 희미해졌다. 하늘색 눈동자에서 차오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 대 때려 주고 와…. 나는 사랑이 아니란 걸 알아도… 그 사람 못 때리니까…….”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해 줘.
참으려 했지만 끝내 터져 버린 친구의 눈물에 나엘라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는 하일모라가 식당에서 본 이후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저 테너를 시험해 보기 위해 독을 준 것이지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일모라가 그 대화를 들은 것은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그녀의 결심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안쓰러움이 차올랐다. 자신의 친구가 앞으로도 꽤 아플 테니까.
얼마나 더 울게 될까. 이 이후로는 어떻게 될까. 그녀가 이런 식으로 지옥을 걸을 줄은 몰랐는데.
전쟁터에선 누구보다 빛을 발했던 제 계획들이 사람을 상대할 때는 자꾸만 엇나갔다.
아직도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저 자신이 사람을 잘 모르는 걸까.
“대공비 전하.”
문밖에서 실랑이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나엘라의 하녀들과 세레노피 측 시종들이 말씨름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
“세레노피 백작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하일모라의 손을 꼬옥 한번 잡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어.”
제대로 한 대 때려 주고 올 테니까.
때릴 명목은 충분했다. 아니, 없다 해도 만들 거다. 자신은 하일모라의 친구가 아닌가.
*
문이 거칠게 열리고, 나엘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테너가 몸을 전부 일으키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쿠당탕탕, 나엘라의 주먹에 테너가 쓰러지자 놀란 시종들이 달려왔다.
“지금 내게 경고를 하겠다고 하일모라를 이렇게 만들었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소리에 테너는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시종들부터 먼저 내보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엘라가 거칠게 말을 쏟아 냈다.
“백작이 센텐임을 알고 있다고 이리 행동했나? 그래서 하일모라에게 독을 먹였어? 내 약점을 잡고 있다 경고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황제를 닮아 약점을 잡고 협박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겨우 바닥에서 일어난 테너는 욱신거리는 볼을 붙잡았다. 혀로 입안을 쓸어 보니 피 맛이 짙게 배어났다.
그녀의 말에 하일모라의 침대 아래서 찾았던 병이 떠올랐다. 그녀가 쓰러지자마자 침실부터 뒤졌으니까.
하일모라의 시중을 들던 이들도 전부 잡아 놓은 상태였다. 병이 떡하니 침대 아래에 있는 것이 이상했다.
독을 쓴 자가 미처 처리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보여 주려 했을까.
테너는 이 일이 자신을 향한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하일모라뿐만 아니라 자신도 건드릴 수 있다는 무언의 암시. 증거를 남기고 가는 것은 그만큼 대범하고 언제든 노릴 수 있다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증이었다.
이 와중에도 테너는 하일모라가 직접 독을 먹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감히 하일모라를 건드려? 그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했나?”
나엘라가 내비치는 분노는 거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용의자 중 하나라 생각했지만, 크게 신빙성이 있진 않았다. 하일모라에게 들었던 그녀는 친구에게 독을 쓸 만한 자가 아니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오해? 하!”
테너는 단숨에 멱살이 잡혔다. 대공비의 검술 실력이 출중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줄은 몰랐다.
“내가 하일모라를 아낀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그대에게 무릎을 꿇겠다고 할 정도로.”
씹어뱉듯 나지막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테너는 진정하라며 두 손을 들었다.
“제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를 도발하기 위함이겠지.”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는가?”
“오늘 만남을 청한 건 대공비 전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저택 보안이 뚫린 것이다. 범인은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다.
“범인은 제가 센텐인 걸 아는 것 같습니다.”
다만 자신과 하일모라의 사이는 모르는 듯했다. 그러니 하일모라 이용해 자신에게 경고했겠지.
“그대가 센텐인 걸 아는 사람? 그럼 지금 내가 범인이라는 건가?”
나엘라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지자 테너는 살짝 겁을 집어먹고는 고개를 저었다.
“대공비 전하께서는 하일모라를 건드려 봤자 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범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 말했던 부탁을 하겠다?”
“예.”
“내가 왜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했을까? 하일모라를 건들지 말라는 뜻이었음을 진정 모르나 보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들어주고 싶지 않네만.”
“하일모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센텐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게 경고하려 하일모라를 건든 거고요.”
나엘라에게 자신이 센텐임을 어찌 알았느냐고는 묻지 않았었다. 물어본다고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요즘 들어 만남이 잦았으니 우연히 알게 됐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적대하는 누군가가 또 나타났다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하일모라를 건드렸다면 나엘라와도 적대 관계일 수 있었다. 그녀가 하일모라를 아낀다는 건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니까.
“그리고…… 아니, 아닙니다.”
센텐 내부에 첩자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사실을 나엘라에게 언급하는 것은 자살 시도나 마찬가지기에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따로 황제를 만나 전해야 할 사안이었다.
테너는 여전히 저를 적대저인 눈초리로 바라보며 똑바로 말하라 윽박지르는 나엘라를 응시했다.
“혹시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나 해서 말입니다.”
나엘라의 의도와는 다르게, 테너는 잘못된 의심으로 센텐 내부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그조차 첩자의 존재를 의심하면 황제의 흔들림은 배가 될 것이다. 의도와는 달랐지만, 상황은 그녀에게 유리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눈치채지 못한 나엘라가 다른 핑계로 테너의 멱살을 쥐고는 가차없이 흔들었다.
“그 부탁이 하일모라에게 도움되기를 바라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엔 검을 쥐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될 테니.”
테너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