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한 대 더 때려 줄 걸 그랬어.”
나엘라는 돌아가는 마차에서도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테너와 이야기를 끝내고 하일모라를 다시 보러 갔다. 약을 먹고 잠든 그녀를 보니 다시금 분노가 솟구쳤지만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두고 봐. 황제만 처리하면 테너를 아주 그냥……. 그럼 하일모라가 힘들어할 테고, 역시 몰래…….”
나엘라가 온갖 계획을 세우는 사이, 마차는 시내에 도착했다. 평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상가 구역이라 대로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곧 저녁 시간이니 외식을 하러 나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나엘라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가린이 안내하는 대로 길을 요리조리 걸어가자 허름한 약방이 나타났다.
“여기가 그렇게 솜씨가 좋다고?”
“네. 기사단 사람들은 모두 이곳을 이용합니다.”
나엘라가 라엘 기사단장이었을 당시 이름 없는 기사단이었던 수하들이 수도에서 일을 하다 다치면 주로 이곳을 이용했다는 의미다.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주인장에게 요구 사항을 늘어놓았다.
“독을 마셔서 장기가 상한 환자가 있다. 기력을 회복할 약재를 얻고 싶은데.”
나엘라 뒤로 줄줄이 서 있는 하녀들과 호위 기사들에 혼비백산한 주인장은 서둘러 약재를 챙겼다.
“2층에서 기다리지.”
마치 와 본 것처럼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간 그녀는 먼저 와 있던 손님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안 좋으니 공자께서 양해해 주시지요.”
클루아조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보든 말든 나엘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어찌 보든 상관없었다.
평민들이 이용하는 곳이라 의자는 딱딱하고 허름했다. 조금도 개의치 않고 털썩 앉은 그녀는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몰래 만나자는 건 줄 알았는데, 저렇게 기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올 줄은 몰랐네.”
“말이 아주 짧군.”
“대공비의 말투가 시정잡배 같습니다.”
“어차피 의심받을 거 사람을 주렁주렁 달고 와야 덜 받네만.”
“당당하게 굴어 의심을 덜 받겠다? 확실히 몰래 누군가를 만날 것 같지 않은 모습이긴 하군요.”
오늘 만남은 나엘라가 제안한 것이었다. 일이 이상하게 틀어졌으니 몇 가지 공유할 게 있었다. 정보도 더 뜯어내야 했고.
애초에 하일모라를 위해서 이 약방을 들를 생각이었기에 아예 이곳으로 약속을 잡았지만,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언짢으시니 다행입니다. 오늘 선물이 마음에 드시겠지요.”
“선물? 그대가 나에게? 뭘 가진 게 없지 않은가?”
황제에게 다 뺏겨 알거지가 됐으면서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대놓고 무시했음에도 클루아조는 마음에 들 거라며 되레 웃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불렀다.
“이제 나오시지요, 후작님.”
후작님? 클루아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2층 창고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아주 익숙하지만 한순간 낯설어진 얼굴이 보였다.
“에스토…….”
특유의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가 조금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나엘라가 뭐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클루아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만나자마자 검부터 휘두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군.”
그러고 보니 에스토도 살짝 긴장한 기색이었다.
클루아조와 에스토는 나엘라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 당연한 일이다. 아직 적이라고 여길 거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나엘라는 그런 상황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 에스토가 살아 있었다. 에스토가 무엇을 감당했고 무엇을 짊어졌는지 너무 잘 아는 지금, 어떻게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나엘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발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우리가 아직 많은 것을 되돌릴 수 있기를.
다시 눈을 떴을 땐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
클루아조와 다른 이들을 모두 1층으로 쫓아 보냈다. 두 사람만 남은 공간에서 에스토와 마주 앉은 나엘라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왜 황제에게 갔는지 이야기 들었어.”
나엘라의 태도와 황제를 언급하는 말에 에스토는 상황을 짐작했다.
“누구에게 들었어?”
“기사들에게.”
“이런……. 네가 가르친 첩자들은 입조심시켰는데 기사들을 생각 못 했네.”
프리야가 듣고 온 이야기는 어쩌면 기사들이 일부러 흘린 것이 아닐까. 그들도 듣는 귀가 있으니 틀어진 에스토와 나엘라의 사이를 알았을 거다. 함께 검을 나누고 훈련받았던 이들이니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으리라.
“나는 에스토 너한테…….”
자신이 어떤 모진 말을 했더라. 그 말들을 에스토는 어떻게 버텨 냈을까. 조금만 더 에스토를 믿었다면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아무 소용 없을지도 모르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이 너무 커, 어디서부터 사과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에스토의 목소리라 들려왔다.
“나엘라, 아무 말도 하지 마.”
“하지만…….”
“그런 말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모든 일이 끝나고 나중에. 물론 안 하는 게 더 좋긴 해. 내 각오는 네게 사과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야.
짧게 덧붙이는 에스토는 누구보다 단단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고, 한없이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나엘라는 그를 꺾을 수 없었다.
“둘 다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던 거야.”
“난…….”
“설마 나한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
덧붙인 말로 그는 아무런 용서도 못 구하게 만들었다. 나엘라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에스토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오늘 너를 만나러 온 건 전해 줄 정보가 있어서였어. 사실 클루아조 공자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해서 수도에 온 거야. 마호세르디 관련 정보는 네가 가장 잘 알 테니 전해 달라 했는데…… 그대로 끌려왔네.”
에스토가 클루아조를 찾아온 것은 북부 지역의 관한 의문과 그의 의도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클루아조가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만 알 뿐,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었기에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확신했다.
“무슨 정보인데?”
“황제의 감시자들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어?”
“은신처를 불태운 사람이 나라는 거, 클루아조가 말 안 해 줬어?”
그런 소리는 못 들었다며 에스토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동안 감시자로 활동했어. 황제가 시키는 대로 주로 북부를 오갔지.”
“북부? 거기서 뭘 했는데?”
“아이안 공작가가 사라지면 그 지역을 새로 차지할 가문이 있었어. 그 가문과 황제와의 연락책이었고.”
“뭐?”
원래라면 그저 연락책 노릇만 했을 에스토기에 이런 정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초에 오가는 비밀 서신은 황제와 그 가문 사람 외에는 열 수 없도록 몇 중으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호기심에 안을 열어 보면 흔적이 남는 구조였다.
가장 겉의 잠금장치만 알고 안의 구조는 모르니 그저 북부와 황도를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가문에서 나에 대해 오해를 한 거야. 황제가 믿는 자 중 하나라고.”
오해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마호세르디와 에스토, 그리고 황제의 관계를 모를 테니까.
“황제의 권유에 넘어가 마호세르디를 배신하고 그의 첩자가 되어 황후를 감시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상황을 모르니 할 수 있는 오해였다. 에스토는 그 가문에서 무엇을 물어도 적당히 맞장구치는 것을 택했고, 조금씩 마음을 놓은 그들은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침내 에스토는 중요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황제는 아이안 공작가를 없애 버리려고 해.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사람을 채워 넣을 계획이야.”
아이안 공작령을 다른 이에게 내어 준 후 권력도 쥐여 줄 생각이었다. 북부의 대표가 바뀌는 것이다.
나엘라가 제 무릎을 톡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에스토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조금 전보다 무언가를 열중하여 머리를 굴리는 지금이 더 나엘라다웠다.
이제야 에스토가 아는 제 친구의 모습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돼서 클루아조 공자를 만나러 온 거야. 그를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리고 만난 클루아조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북부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엘라를 납치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고. 벌써 거래 중이라며 가감 없이 밝혔다.
그제야 에스토는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꺼내 놓았다. 가만 이야기를 듣던 클루아조는 나엘라에게 직접 전하는 게 좋겠다며 이곳까지 그를 끌고 온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논의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빨리 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어.”
“어떤 거?”
“그쪽에서 그러더라고. 북부만 대표 가문을 바꾸는 게 아니라고.”
“그럼 설마…….”
“맞아. 황제는 서부의 마호세르디, 남부의 노헤스카, 동부의 루부스도 없애려 해. 모두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려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나, 한편으로는 지금껏 해 온 황제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호세르디의 청도, 체드란의 청도 전부 들어준 거야. 안 좋은 사이처럼 보이면 그들이 없어졌을 때 황제를 가장 먼저 의심할 테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황제에게 무조건 충성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귀족들도 모르게 동서남북의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가문들을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거기다 나엘라를 이용해 앞으로 귀족들을 무리 없이 계속 다룰 수 있는 체계가 완성되면 더 좋고.
“그래서 베르에티 영애랑 내가 친해도 상관없었던 거구나. 어차피 둘 다 사라질 테니까.”
중앙에는 대표라고 할 만큼 큰 권력을 가진 귀족이 없었다. 그러니 네 가문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넣으면 중부는 알아서 휘두를 수 있겠다 판단했을 것이다.
“클루아조를 수도에서 못 움직이게 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거야. 황제는 그를 버리려 했으니까.”
아이안 공작가를 치워야 하는데 클루아조의 반발이 없을 리가 없다.
문득 클루아조가 감시자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음에도 손을 뗐다는 말이 떠올랐다. 혹시 황제는 그때부터 이 일을 계획했던 걸까. 그래서 클루아조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으려 한 걸까.
귀족들을 의심하다 못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가문들을 모두 지워 버릴 생각이라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마호세르디, 노헤스카, 루부스를 어떻게 없앤단 말인가? 아이안 공작가는 지금 대부분의 힘을 잃었으니 가능하다고 쳐도 다른 곳들은 아니었다.
나엘라의 의문을 눈치챈 에스토가 그것까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안 공작가를 대신할 다른 가문은 옛날부터 준비했던 것 같아. 다른 곳도 그런 식이 아닐까?”
“하지만 서부에서 마호세르디를 견줄 만한 가문은 없어. 마호세르디를 대신하려면 적어도 엇비슷하긴 해야 할 거 아냐.”
“가신 가문이라면 마호세르디만큼은 아니어도 그나마 가능하지 않겠어?”
“설마 시론 후작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그 제안을 거절했거나, 다른 가신 가문이 그 제안을 받은 것을 아셨거나.
황제가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추측이 맞다면, 시론 후작님은 분명 제안을 받은 가신 가문을 눈치챘을 것이다.
“후작님은 우리 아버지보다 가신 가문들을 자주 만났으니 아셨을 가능성이 커. 후작님의 성정상 바로 처단하기보단 먼저 설득하려 했을 거야.”
그런 와중에 황제에게 말이 새어 나간 거다. 확신할 순 없지만, 설득력 있는 추측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무너지는 에스토의 표정을 보며 나엘라는 이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