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81)화 (181/220)

180화

에스토는 표정을 재빨리 수습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거칠게 마른세수한 그가 말을 이었다.

“만약 다른 가신 가문 중에서 배신자가 있다면 빨리 공작님께 알려야 해.”

“젠장, 마호세르디를 몰아낸다면 지금이 적기야. 전쟁 때문에 안이 비었으니까.”

빠르게 배신자를 찾아야 했다.

나엘라는 크게 소리쳐 1층에 있던 하녀들과 클루아조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한 명이라도 머리 맞댈 사람이 늘어나는 게 좋았다.

“일단 제니는 지금 당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급히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

나엘라가 에스토와의 대화를 전하자 제니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당장 다녀올게요.”

제니가 약방을 뛰어나가려고 하자 나엘라가 급히 불렀다.

“의심받으니까 약재나 몇 개 들고 가.”

하일모라의 약재를 사며 겸사겸사 아버지 것도 샀다고 말하면 의심을 사진 않으리라.

그렇게 제니가 약방을 나선 이후, 2층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루부스 후작가는 감도 오지 않아. 동부는 잘 모르는데 어쩌지.”

자신에게 무릎을 꿇던 베르에티가 스쳐 지나갔다. 지켜 주겠다 약속했는데 사태가 심각했다.

다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이들이라고 명확한 해답을 아는 건 아니었던 탓이다.

“가린, 일단 가서 이 이야기를 전해. 사교계가 잠잠한 시기니까 원래 영지로 휴양을 간다고 하고 돌아가라 전해. 루부스 후작이 이 이야기를 알아야 해.”

클루아조가 거기에 덧붙였다.

“황제도 아무런 명분 없이 가문을 없앨 순 없네. 아이안 공작가는 북부를 휘어잡을 힘을 잃었고 황후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분이 있으니 더 쉽게 움직였겠지. 그러니 루부스 후작에게 문제가 될 일은 절대 일으키지 말고, 그런 일이 생겨도 증거를 확실히 모으라고 전하게. 재판을 해서라도 시간은 끌어야 하지 않겠나.”

좋은 의견이었다.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얹었다.

“베르에티 영애에게도 약재를 가져가. 루부스와 마호세르디만 전해 주면 이상하니까 돌아오는 길에 줄리 부인이랑 황제 쪽에도 몇 곳 들러서 약재를 전해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베르에티 영애에게 루부스 후작을 대신할 만한 가문을 찾아보라 해. 적어도 후보는 나올 거야.”

가린까지 내려가자 남은 것은 지안과 세 사람뿐이었다.

“이제 노헤스카가 문제군.”

클루아조의 말에 나엘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사람들을 모으고 다니던 게 걸렸다.

제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다나한과 알아서 하겠지만 이미 증거가 넘어가 있으면 큰일이다. 그건 황제에게 좋은 명분이 될 터였다.

무엇보다 노헤스카는 두칸과의 협상이 걸렸다. 체드란이 두칸과 손을 잡은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건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패란 의미다.

황제에게 있어 가장 손쉬운 방법은 타국으로 핑계를 대는 것일 테니까.

“대공비 전하께선 남부에서 의심 가는 가문이 없나?”

“의심 가는 가문이라…….”

남부 역시 노헤스카를 대신할 만한 가문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줄리 부인의 도이네 백작가, 타국 출신 사업가인 아가산 백작가, 가신 가문 페즈몽레 백작가.

아가산 백작가는 망명한 때를 따지면 황제의 손이 닿았다고 보기에 시기가 맞지 않는다. 도이네 백작가는 줄리 부인 때문이라도 믿고 싶긴 하지만 의심은 해 두는 상태로 두면…….

잠깐, 페즈몽레라면?

“내가 체드란과 결혼할 때쯤 페즈몽레 부인이 아프기 시작했지. 수도에 있는 노헤스카 저택에서 파티를 열었을 때 백작을 뒤로한 채 혼자서라도 올라와 인사를 했고.”

가신 가문이라 올라왔다고 생각했다. 아파서 소개조차 못 했으니 첫인사를 하러 왔다고.

올라오는 길에 아가산 백작 부부가 도움을 줬다고 기뻐하며 인사하길래 무의식적으로 선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페즈몽레 부인의 수도행이 황제의 서신을 주고받기 위한 것이었다면?

페즈몽레 백작은 체드란이 수도에 와 있는 동안 대신 남부의 일을 대신하기도 했었다.

“그럼 아프다고 했던 이유는 뭐지?”

나엘라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왜 자신을 만나지 않으려 했을까. 백작이 배신자라면 백작 부인은 오히려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했어야 맞지 않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엘라에게 깍듯하게 굴었던 백작과 달리 부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페즈몽레 백작 부인이라면 나도 기억나는군.”

줄리 부인에게 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클루아조가 의외의 얘기를 꺼냈다.

“대공 전하께서 수도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기에 페즈몽레 가문이 가신으로서 대신 참석한 적이 꽤 많았지.”

“그럼 페즈몽레 백작 부인이 사교계에서 남부 대표 역할을 맡았다는 소리인가? 줄리 부인이 아니라?”

“줄리 부인은 남편 때문인지 대공비를 만나기 전에는 자주 나서지 않았네. 그래서인지 마치 자신이 노헤스카 안주인이라도 되는 양 굴더군.”

“그럼…….”

“그런데 대공비 전하께서 나타난 거지. 진짜 노헤스카 안주인 말이야. 질투로 인한 꾀병이었겠지.”

나엘라가 없을 적엔 자신이 남부의 대표인 양 굴었었다면 갑자기 나타난 대공비가 좋아 보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첫 만남이 예정됐을 때 고개를 숙이기 싫어 아프다고 했을 수도 있다.

나엘라는 허탈한 심정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원래 얌전하게 생긴 사람이 더한 법이네.”

당해도 제대로 당했다. 어디 가서 마호세르디 참모였다고 말도 못 꺼낼 판이다. 사교계가 전쟁터보다 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둘 다 겪어 본 경험자로서 이번만큼은 전적으로 동감했다.

“지금 페즈몽레 백작 부부는 어떻게 하고 있지?”

무심코 대답하려던 나엘라는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언제까지 반말할 건가?”

“이런, 이번엔 오래 갔는데 아쉽군.”

“아쉽군?”

“아쉽습니다. 그래서 백작 부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부인은 아직 수도에 있고 백작은 비어 있는 노헤스카 대공령을 지키고 있지.”

“그럼 위험한 상황이군요.”

체드란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나엘라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을 것이다. 두칸과 전쟁 중인 지금 페즈몽레 백작이 체드란의 뒤를 친다면 돌아올 파장이 엄청날 터였다.

목숨 걸고 제국을 지키던 대공을 배신한 셈이니까.

그러니 두칸과 전쟁을 멈춰서는 안 된다. 전쟁을 멈추는 즉시 두칸과 밀약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씌울 가능성이 커졌다.

“절대 안 돼.”

나엘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스토, 나 좀 도와줘.”

나엘라와 이야기한 후 감시자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클루아조 공자는 알아서 하시게. 그 정도 능력은 있겠지.”

“정말 너무하십니다.”

“일단 단제 오라버니를 만나야 해.”

상황을 파악한 나엘라의 머리가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아, 세레노피 백작의 부탁은 못 들어주겠네.”

세레노피 백작은 하일모라를 자주 만나러 와 달라, 혹은 노헤스카 저택으로 데려가 달라 요청해 왔다. 하일모라를 보러 온다는 핑계로 정보를 빼내거나 나엘라의 주변을 캐내려 하는 술수가 뻔히 보였지만 나쁘지 않기에 승낙했다.

거기다 테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하일모라가 확인한 걸 모르는 것 같기에 그냥 두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된 이상 하일모라를 그곳에 둘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클루아조 공자, 더 할 말이 있는가?”

“할 말은 없지만 지금 대공비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 작전을 좀 듣고 싶습니다.”

“금방 알게 될 걸세.”

지금 클루아조마저 움직인다면 곤란해진다. 미안하지만 그는 수도에 남아 있는 편이 다른 사람에게 편했다.

“나엘라, 너 지금 표정이 딱 사고 치기 직전 같은데…….”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에스토에게 나엘라는 정확하게 봤다며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역시나 친구는 친구인지 속내를 파악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가, 에스토. 마호세르디로.”

물론 혼자 가라는 말은 아니니 걱정은 안 했으면 좋겠다.

*

오랜만에 만난 다나한이 마호세르디로 돌아간 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그 이후 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지엘라는 이제 식음까지 전폐했다.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하녀 하나가 몰래 두고 간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가볍고 최대한 티가 나지 않는 음식만 먹어야 하다 보니 내내 이런 것만 간신히 먹었다. 따뜻한 비프 스튜가 아른거렸으나 다나한 생각에 곧바로 사라졌다.

이렇게 간편식으로 식사를 대신한 지 딱 다섯 끼째.

지엘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다.”

궁인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엘라는 말리는 그들을 가르고 본궁을 향해 걸었다. 자신보다 훨씬 앞서 뛰어간 시종이 말을 전했을 테니 황제의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정 안 된다 하면 황제 집무실 창문으로 콱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그리 높지 않으니 끽해야 다리나 부러지는 정도일 터다.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시종에게 눈을 부릅떴다. 어서 고하라는 눈빛이었다.

“지엘라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답한 황제의 음색에는 언짢은 기색이 다분했으나 지엘라는 상관없었다. 문이 열리자 쳐다도 보지 않는 황제가 보였다.

“마호세르디를 다녀올까 합니다.”

“아비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구나.”

“잠깐만 다나한 경을 보고 오겠습니다.”

물론 그 잠깐이 지엘라의 기준이라 황제는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몸도 성치 않은데 궁에서 요양하거라.”

“상사병입니다. 제 몸은 제가 가장 잘 압니다.”

“다나한 경을 보기 전부터 아팠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 한 번만이라도 제 청을 들어주실 순 없으십니까. 이미 황도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인데 어찌 폐하께서 제 맘을 더 모르십니까.”

아비라 하였으니 딸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황제는 지금 누구보다 시선에 신경 써야 하는 시기였다.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나엘라가 말했으니 지엘라는 믿었다.

“후환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인내심이 다했는지 황제가 펜을 탁 내려놓았다. 두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얼핏 살기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엘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다나한 경을 못 보면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후환은 두렵지 않다. 지엘라가 가장 두려운 것은 다나한을 못 보는 것이다.

노기에 찬 황제는 결국 어디 한번 해 보라며 지엘라의 청을 허락했다. 그는 그저 돌아온 지엘라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이미 늦었다는 것도 모른 채.

“감사합니다. 폐하.”

집무실을 빠져나온 지엘라는 마차에 짐을 잔뜩 실으라 명했다. 그래야 파르로시를 납치해 온 에스토가 잘 숨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걸 동행이라 부를 수 있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당시 나엘라는 엄연히 납치라고 주장했다.

아니, 사실 따지자면 지엘라가 그 둘을 납치하는 게 아닐까.

그래도 다나한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그런 사소한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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