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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82)화 (182/220)

Chapter 22. 뒤통수치고 나르기

181화

다그닥다그닥.

“워워─!”

마부가 말을 다독이며 멈추자 텅 빈 거리 위 황궁 호위기사들이 함께 멈췄다.

“잠시 휴식!”

이번 호위의 책임자를 맡은 황실 기사가 휴식을 외쳤다. 마호세르디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지엘라의 체력을 고려해 잦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지엘라 역시 마차 안에서 계속 있는 건 고단하니 가끔 마차를 세워 바람을 쐬게 해 달라 요청한 터였다.

“황녀님, 앞으로 20분 정도 휴식하겠습니다.”

열린 작은 창을 통해 기사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와 지엘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이 닫히고, 마차 안에서 잠시 뻐근한 몸을 풀어 준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마호세르디가 코앞이었다.

황제는 지금쯤 파르로시가 사라진 걸 눈치챘을까. 지엘라를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때쯤 지엘라는 이미 마호세르디에 도착했을 텐데.

마호세르디에 자신을 보필한 황실 기사들이 남아 있긴 할 테지만 그만큼 보안을 강화할 예정이었다. 기사들과 접선할 첩자는 물론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드나들도록.

자리에서 일어난 지엘라는 마차를 나와 주변을 산책한다며 움직였다. 그녀를 도와줄 하녀들도 줄줄이 끌고 나왔지만 쉬겠다며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라 명했다.

나무도 많고 풀도 우거진 곳이니 화장실이나 갔다고 생각할 터다.

“황녀님.”

누군가의 부름에 지엘라는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지엘라 부인이라 부르라니까 기사들도 그렇고 죄다 황녀님이라 부른다.

며칠 전이였다면 진짜 한마디 했겠지만, 지금은 다나한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지엘라 부인보다는 황녀님이라 불리는 게 나으리라.

“이제부터는 따로 가려 합니다.”

“짐 마차에서 힘들게 이동했을 텐데 수고했어요.”

조금 허름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에스토와 파르로시가 숨어 있었다. 지엘라는 그들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어디로 가죠?”

“일단 다나한 단장님 대신 제가 배신자를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공작님께서도 적당한 새 신분과 위치를 만들어 두셨다고 하니 얼굴만 가리고 다니면 괜찮을 겁니다.”

“함께 생활했던 마호세르디 기사들은 알아볼 텐데요.”

“다들 전장에 있기도 하고, 안다고 한들 입이 가벼운 자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돌아왔다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네요.”

마호세르디 기사들끼리 가진 전우애나 가족 같은 감정을 지엘라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들의 세계가 있는 법이니 에스토의 생각이 더 옳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지엘라는 파르로시를 바라보았다. 로브를 꾹 뒤집어쓰고 얼굴을 숨기고 있기에 어떤 표정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실 지엘라는 아직 파르로시가 껄끄러웠다. 몇 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긴 했지만 끝내 못 하고 돌아서기도 했고.

“파르로시 황녀께서는…….”

어머니가 다를 뿐 같은 황실 사람임에도 남을 대하는 듯한 호칭이 익숙했다. 살짝 쓴웃음을 지은 지엘라가 말을 이었다.

“시론 경을 따라가실 겁니까?”

사실 황궁 안에 둬도 그리 타격이 없을 파르로시를 데리고 가라며 등 떠민 건 나엘라였다. 아직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토는 나엘라의 욕심 탓이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지엘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엘라와 파르로시 사이엔 어떤 감정도 없을 텐데.

아니면 미운 정인가?

“네, 당분간은요.”

“시론 경의 일을 함께하기엔 황녀께 고될 텐데요.”

지엘라의 말에도 파르로시는 그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으나 파르로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궁 밖의 삶은 어떤지, 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지엘라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 번도 파르로시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각자 살아남기 바빴을 뿐이다.

어미를 제 손으로 죽이고 황제의 손을 들어주며 황궁에 남아 있는 파르로시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역시 관심도 없었다.

“지엘라 부인을 보다 보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음…….”

“지금에 와서 관계 개선을 하자거나 잘 지내보자는 건 아닙니다. 그럴 생각도 잠깐 했었지만 사실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이렇게 차분히 말하는 파르로시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낯선 표정과 말투를 보며 지엘라는 제 표정을 가다듬었다. 놀란 기색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힘들더라도 당분간 에스토 경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배우려고 합니다. 더는 황녀라는 신분도 지겹고요.”

“그래요…….”

“지엘라 부인께서도 원하시는 걸 얻기를 바랍니다.”

지엘라는 한쪽 볼을 긁적거렸다. 뭔가 낯간지러웠다.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도 못 한 탓이다.

“파르로시 황녀께서도 답을 찾길 바랍니다.”

헤어짐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에스토와 파르로시는 발을 돌려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고, 잠시 서 있던 지엘라도 곧 마차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도 각자의 목표가 있는 만큼 지엘라도 자신의 목표가 먼저였다. 다나한의 공간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 마호세르디 저택으로 자주 편지한다고 했으니 금방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엘라는 그렇게 나중을 기다리며 마호세르디로 다시 출발했다.

*

“일단 마호세르디 첩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신들의 행적부터 확인할 예정입니다.”

에스토의 말에도 파르로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만 우십시오.”

파르로시가 움직이는 발자국 언저리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에스토로선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다. 그와 그녀의 사이가 좋을 리가 없으니까.

황후를 죽이기 위해 파르로시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들 다를 건 없었다. 황후의 명이라곤 하지만 어쨌든 에스토는 그녀에게 최악의 기억 중 하나를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나엘라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 왜 같이 보냈는지…….

그럼에도 에스토도 파르로시도 그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몰라.”

“지난날에 대한 후회입니까, 아니면 앞으로에 대한 원망입니까.”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그럼 오늘, 마지막으로 우세요. 한동안 울지도 못할 정도로 바쁠 테니까.”

묵묵히 걷는 에스토 뒤로 파르로시가 걷는다. 그 뒤로도 한참 눈물 자국이 바닥을 수놓았다.

*

“아버지는 뭐라셔?”

앞에 서 있던 제니는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노발대발 난리 나셨죠. 당장 뛰어오시려는 거 마호세르디 기사들이 겨우 말렸어요.”

에스토에게 들었던 정보를 전하자 공작은 배신자 찾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다. 더불어 일을 함께 도모하려던 사람들에게 정보가 새어 나가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증거들을 빨리 처리하라고 전했다. 공작이 어련히 믿을 만한 사람들로만 움직였을 테니 별 탈은 없겠지만 혹시 몰랐다.

황제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이고 있을 때 단제 오라버니에게 허탈한 말을 들었다. 마리즈가 정보를 중간에 막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엘라는 왜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냐며 공작에게 실컷 잔소리했다. 하지만 공작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네 남편이 시켰다, 이놈아!’

덕분에 공작과 전투 아닌 전투를 벌일 뻔했다. 체드란을 걸고넘어지지 말라며 따져묻는 나엘라와 아비만 몰아세운다며 혈압이 올라간 공작은 한참이나 말싸움을 했다. 결국, 체드란이 전해 준 종이까지 꺼내고 나서야 싸움은 일단락됐다.

“아버지도 성질 좀 죽이셔야 해.”

지금 공작이 노발대발 화를 내는 건 그런 이유가 아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성질은 죽여야 했다. 혈압이라도 올라서 쓰러지면 어쩌시려고 저러시나.

“어쨌든 공작님께선 절대 안 된다고 하시네요.”

“안전하다니까 그러네.”

“단제 경과 시녀장님을 건들지 말라는 명이세요.”

“우리 죽으면 그 둘은 멀쩡하대?”

“공작님께서 그 두 분을 걱정해서 그러시겠어요? 나엘라 님을 걱정하시는 거지요.”

“됐어. 황제는 만난 뒤에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아버지는 알아서 준비하시라 해.”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든 마호세르디는 내전을 각오해야 했다. 본격적인 내전은 아니더라도 그 불씨를 지피게 될 것이다.

“황태자는 뭐래?”

“입장 표명을 준비하겠답니다.”

“하일모라는?”

마침 하일모라를 만나고 온 지안이 얼굴을 요상하게 구기자 나엘라는 알 만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토랑 파르로시 황녀는?”

“공작님께서 알아서 하셨답니다. 마호세르디 첩자들과 함께 움직일 겁니다.”

“다행이네. 황제는 반응 없고?”

파르로시 황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에스토가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했으니 아마 잘 납치해 마호세르디로 갔을 거다.

황제의 관심 밖에 있기에 파르로시를 지키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감시의 눈길 역시 강하지 않았다. 덕분에 틈을 타 도주를 위해 침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던데, 많이 놀라진 않았을지 걱정이다.

“황제는 아직 반응이 없습니다. 센텐에서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범인이라는 걸 알았을 거야. 황궁을 빠져나가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그 시기에 밖을 나간 사람은 지엘라 황녀밖에 없으니까.”

심지어 지엘라는 마호세르디로 향하지 않았나.

과연 황제는 파르로시가 없어진 걸 공표하고 마호세르디를 수색할 것인가.

겨우 그런 이유로 마호세르디를 의심하기는 힘드리라는 걸 안다. 더군다나 지엘라의 이야기가 세간에 엄청난 러브스토리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젠 황제가 어떻게 나오든 신경 안 써. 계속 간 보고 상황을 대비하고 예상하고, 왜 이래야만 하는지 너무 화가 나니까.”

그냥 들이받아 버릴 거다. 

많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 놓으려 했지만, 어차피 그들도 목숨을 걸고 하는 행동이었다.

이제 와서 무서워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시간을 끄는 건 대비할 시간만 줄 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당장 체드란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페즈몽레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일단 체드란에게는 전쟁을 멈추지 말라고 전했다.

“나엘라 님.”

마침 가린이 화분 하나와 편지를 들고 다가왔다. 화분 위로 봉긋 솟아 있는 꽃만 보아도 반가운 이의 답장이라는 걸 알았다.

“노헤스카에서만 피는 꽃이랍니다.”

꽃잎이 길고 얇지만 빽빽하게 꽃봉오리를 이루고 있었다.

꽃다발로 보내기엔 시들까 봐 걱정했을까. 그래서 화분으로 보냈을까.

화분을 받아들여 꽃잎을 툭 건드려보고는 편지를 읽었다.

『꽃말은 소원해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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