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하일모라는 조용한 복도를 저벅저벅 걸었다.
저녁 식사 시간을 넘기고 자정이 되어 가는 시간이지만 테너는 이제 막 일을 마치고 돌아왔기에 잠들지는 않았을 거다. 요즘 들어 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황제의 직속 기관이라던 센텐인가 뭔가 때문일까.
이내 그런 걱정은 쓸모없다는 걸 깨달은 하일모라가 머리를 털어 사념을 지웠다. 테너의 방 앞에서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뒤따라온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눈치 빠르게 방문 앞으로 가 그녀 대신 노크를 하고 방문을 알렸다.
“하일모라?”
막 옷을 갈아입은 테너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굳을 얼굴을 유지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이 시간에요?”
“네.”
테너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리에 앉으라며 권했다.
“아니요. 할 말만 하고 나갈 거예요.”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무슨 일은 앞으로 우리 둘에게 있겠죠.”
독을 이겨 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그 시간이 하일모라에게 지옥이었음을 남자는 알고 있을까.
테너는 열이 펄펄 끓는 하일모라를 단 하루도 밤새워 지킨 적이 없었다.
“우리 이혼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보지 말아요.
하일모라의 뒤에 서 있던 하녀들도, 테너를 돕던 다른 하인들도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테너도 이번만큼은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는지 어색한 얼굴로 다가왔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이혼이라고요?”
“네. 이번에 제가 중요한 걸 알았거든요.”
“중요한 거요?”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요.”
테너가 하일모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달래려는 듯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다정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하일모라는 지금 그의 모습 덕에 더욱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나오는 저 연기가 자신을 얼마나 길들여 왔는지.
“누가 그래요? 혹시 대공비 전하께서 그래요?”
“나엘라요? 나엘라가 여기서 왜 나오죠?”
“아니 그게…….”
“당신 설마 내 친구에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가요? 대공비 전하를 얘기한 건 전하께서 조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아서…….”
“나엘라는 상관없어요. 난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말하는 거니까.”
하일모라는 제 어깨에서 테너의 손을 떼어 냈다.
“이혼 서류는 사람을 통해서 보낼게요.”
그러고는 바로 뒤를 돌았다.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여자가 있다면 그건 자신이 아닐까. 이렇게 당해 놓고도 여전히 그를 절절히 사랑하고 있으니까.
하일모라는 눈물을 참고 또 참으며 걸었다.
*
“하일모라 님의 도주로를 확보했습니다. 저희 쪽 말고 오언과 말리가 힘을 보탰어요. 톨레로 상단 쪽으로 향한다고 합니다.”
나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제 직속 기사단이었던 오언과 말리라면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하일모라의 대역은?”
“구했습니다. 당분간 인적이 드문 수도 외곽 지역에서 이혼을 준비하며 두문불출하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마호세르디로 보내. 거기 지엘라 부인이 있으니 하일모라도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네.”
테너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그래도 하일모라가 큰 결심을 내려 줘서 다행이었다. 같이 있어 주고 싶었으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그래도 지엘라 부인과 함께 있다면 기분 전환에 좋을 것이다.
“지엘라 부인을 호위했던 황궁 기사들은 황제의 명이 떨어지면 주기적으로 보고해야 해. 첩자는 막아도 그것까진 막지 못할 거야.”
“공작님께서 알아서 처리한다고 하시네요.”
“그건 다행이네. 베르에티 영애는?”
“본인의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나엘라 님께서 말해 주신 대로 루부스 후작가를 대체할 가문이 있는지, 황제와 손을 잡은 자가 누군지 알아본다고 하네요.”
나엘라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라면 수도에 남아 있는 자 중 위험한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준비를 해 두라고 말해 뒀으니 각자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거나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길 예정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아버지랑 나랑 톨레로 상단 정도인가?”
“톨레로 상단은 남아 있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황태자님을 남겨 둔 채 완전히 철수하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만에 하나 데테로아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톨레로가 나서서 황태자를 빼내야겠지.”
코더 우부라는 체드란과 데테로아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였다. 체드란뿐만 아니라 데테로아의 안전까지도 전부 챙겨야 한다.
더군다나 누군가는 수도에 남아 상황을 살피며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니, 나엘라로서는 그의 희생이 고마웠다.
“대신 코더 우부라 님에게 신변의 문제가 생기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면, 사피오 님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겠다는 임명장을 써 주었다고 합니다.”
“상단의 다음 상단주를 사피오로 내정하고 있었나 보네.”
“애정이 각별한 것 같기도 하고, 능력이 출중하니 그만큼 대우받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피오는 오늘 새벽에 바로 노헤스카 대공령으로 떠나라 전해.”
“네. 이미 준비도 마친 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과 아버지.
지금까지 공작이 만나고 다닌 이들은 내전이 일어나면 행동하기로 약속했다. 혹여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가 들고 일어나 수도로 진격하는 순간, 편을 들어주기로.
“그런데 나엘라 님.”
“응?”
“단제 경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안 그래도 지금 단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고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라버니의 결정을 따라야지.”
황제의 압박에서 조금이라도 가문을 벗어나게 하고자 본인이 희생해 지키려 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황실 근위대의 단장 자리까지 올라간 건 단제가 이뤄 낸 것들이었다.
“마지막에 적으로 만나지만 않기를 바라야지.”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그 전에 기절이라도 시켜서 납치하긴 할 거야.”
다만 단제가 마호세르디에 반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존중할 거다.
마호세르디의 그 누구도 단제를 탓할 수 없다. 또한 그의 결정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었다. 많은 것을 포기한 그에게 어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황태자가 단제 오라버니와 계속 얘기해 보겠다고 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
데테로아가 단제를 제 사람으로 회유할 수 있는지는 오로지 그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과연 안쓰러운 제 오라버니는 다른 사람의 강요가 아닌 오롯이 본인이 결정하게 된 지금, 어떤 선택을 할까.
“마리즈 부인에게는 편지 보냈지?”
“네, 직접 전달했습니다. 단제 경을 설득해 달라고도 말했고요. 이미 계속 시도 중인 모양이더라고요.”
기사들은 외골수인 경우가 많다. 처음 검을 잡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방향의 검로를 수백 번씩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신념으로 검을 잡고, 그 신념을 위해 사는 사람이 고작 누군가의 회유로 마음을 쉬이 돌릴 리가 없다.
“그래도 오라버니는 결국 옳은 것을 선택할 거야.”
자신의 오라버니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자. 시간이 늦었다.”
곧 단제를 만나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 상황은 안 될 것이다. 그러니 그저 믿어야지.
나엘라와 지안은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막 자정을 넘어 달이 훤히 세상을 비추었다.
*
시녀장은 새벽 시간까지 황제의 잠자리를 확인하고 아침을 준비했다.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야 하는 자리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본래 시녀라면 이런 일까지 하진 않지만 믿는 이가 아니라면 제 털끝 하나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는 황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 심기가 매우 좋지 않으니 더욱 완벽을 기할 수밖에.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던 그녀는 어두운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형상을 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늦추고 정체를 확인하니 단제 경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단제가 그녀에게 황제의 상태를 비롯하여 많은 것을 전달해 왔기에 두 사람의 사이는 어색하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이라고 하나 황제에게 이상이 생기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녀를 깨워서라도 전달하는 편이었다.
단장인 그가 직접 올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 비밀리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직접 그녀를 찾아오곤 했다. 대부분 황제가 야행을 나가 외출복을 준비한다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겼거나 할 경우였다.
“시녀장님께서 황궁에 계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황제의 시녀장이라는 직위는 근위대 단장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황제의 의복부터 그의 일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소관하는 사람이 시녀장이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건 무슨 질문일까.
“글쎄요……. 제가 갓 성인이 됐을 때 황제 폐하의 어머니셨던 후궁님의 시녀로 들어왔었지요. 벌써 30년을 훌쩍 넘겼을 겁니다.”
“그럼 폐하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시겠군요.”
“처음 뵈었을 때 황제 폐하는 이미 성인이셨습니다. 유모도 아니었고, 어쩌다 황제 폐하의 시녀가 되었지만 그리 애정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죠.”
“아이까지 낳으셨잖습니까.”
시녀장의 얼굴에 바로 반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단제를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평상시 단제라면 이런 얘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그를 노려보는 사이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던 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야 누군가가 더 있었음을 깨달은 것에 놀라 시녀장이 한 걸음 뒤로 더 물러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가오던 이가 후드를 벗자 단제 경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사르륵 흩어져 내렸다.
“설마 대공비…….”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라고 합니다. 프리야의 소꿉친구이자 주군이기도 하고요.”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일이 올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더군다나 수도에 왔던 프리야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은 뒤로는 더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꽁꽁 숨겨 둔 딸이 수도에 왔음을 황제에게 들킨다면 자신은 어떡해야 할까.
그래서 모진 말로 인연을 끊자 했건만 제 딸은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매달려 왔다.
“그럼 잘되었군요. 프리야에게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시녀장은 두려움에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가다듬었다. 그들과 엮여서는 절대 안 된다. 혹시라도 그들 사이에 인연이 있음을 의심받기 시작하면 프리야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님.”
그래서 시녀장은 나엘라의 부름에도 무시로 일관하며 숙소를 향해 걸었다.
“제가 황제를 적대하고 반란을 일으키면 프리야라고 무사할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금 프리야를 이용해 저를 협박하겠다는 겁니까?”
“언제까지 딸을 외면하며 사시려고요? 프리야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모녀라고 꼭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죠.”
“당신의 바람과 다르게 프리야는 같이 사는 미래를 꿈꾸고 있거든요.”
가슴에 돌이 들어앉은 것 같았다. 프리야를 생각하면 늘 그랬다. 키운 적도, 지금껏 애정 한 번도 준 적 없는 아이가 왜 자신을 그리 그리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제발 서로 모르는 사이로, 각자 제 삶을 살길 시녀장은 간절히 바랐다. 아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모른 체하려 노력하면서도 끝까지 외면하지는 못하는 시녀장을 보며 나엘라는 제 요구를 털어놓았다.
“황궁 지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도움 또한.”
단제와 시녀장이 손을 잡아야만 얻을 수 있는 잠시의 틈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