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나엘라는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나고 약속한 시각이 되자 황궁으로 향했다. 본궁에 도착해 방문을 알리자 이번에도 다른 곳으로 안내받기 시작했다.
본궁 앞뒤로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앞은 오로지 황실의 부유함을 나타내기 위한 정원이라면 뒤에는 미로 정원이 존재했다.
처음 온 자들은 출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미로.
시녀장과 단제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미로 정원이었음을 황제는 알고 있을까.
시종의 안내를 따라 정원을 들어간 나엘라는 이름 그대로 미로를 지나기 시작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홍가시나무들이 붉은빛을 뽐내며 가꿔져 있었다.
그 사이를 이리저리 걷던 시종이 이 앞에 황제가 있다며 나엘라를 안내했다.
“여기부턴 혼자 가셔야 합니다.”
애초에 하녀들도 데려오지 않았다. 그녀들은 마차에서 대기하는 척 이미 다른 이들과 교체해 지정된 장소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수도 노헤스카 저택에 있는 기사들도 일이 터진 후 각자 흩어지기로 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되겠지.
그나저나 단제 오라버니가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이번 일은 도와주기로 했지만, 아직 황제에게서 등을 돌릴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마는 단제의 결정이니 어쩔 수 없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엘라의 인사에 심기가 불편한 듯한 황제가 돌아보았다.
“요즘 내 심기를 어지르는 주범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엘라를 의심 중인 모양이었다.
아마 지엘라나 파르로시까지는 알고 있을 테고, 다른 이들에 대해선 눈치챘을까.
테너와 하일모라와의 이혼에 대해선 알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충직한 심복일 그가 보고했을 테니.
“폐하께서 내주신 숙제를 제때 끝내지 못하여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죗값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 죗값이 그대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죽음이라 하여도?”
나엘라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대답을 회피했다. 미로 한가운데 있는 정자인 만큼 주변 이들도 안 보이는데 예법이 대수랴.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나를 만나고자 하였나?”
“궁금한 것이 있어 여쭙고자 왔습니다.”
“내가 그대의 궁금함이나 풀어 주는 사람인가? 이 몸이 어지간히 우스웠나 보군.”
들고 있던 찻잔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는 것으로 보아 화가 차곡차곡 쌓이는 모양이다. 고개를 숙여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폐하, 폐하께 제 남편, 체드란 노헤스카 대공은 자식이 맞았습니까?”
“나는 그대에게 질문을 허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시잖습니까.”
“이렇게 막 나가다니, 진정으로 미쳤는가?”
“어찌 보이십니까. 계획적인 행동일까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요?”
요 몇 년간, 아니 황제가 즉위한 뒤로 그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대놓고 무례하게 군 자가 있었을까.
쌓인 분노를 풀 줄 알았던 황제는 의외로 근위대를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작의 말대로 그가 어떤 사람이건 멍청하거나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
나엘라를 파악하려는 듯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에 여백을 두었다.
“체드란을 아들로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는가?”
“예.”
대화라는 걸 해 보려는 모양이다. 나엘라의 질문에 답해 주는 것을 보니.
“아들로 생각하고 있지.”
“진정으로 말입니까.”
“그래. 아들이니 언제든 죽이려 하는 것이지. 나의 피를 이었기에 황제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다른 이들은 그런 상대를 아들이라 부르지 않았다. 같은 것을 두고 싸우거나, 호시탐탐 제 것을 뺏어 갈까 의심해야 하는 이를 누가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황제에게 가족이란, 또는 아들이란 오직 그런 존재인 걸까.
“내가 하나 대답했으니, 나도 묻지.”
일문일답하자는 걸까, 나엘라는 흔쾌히 응했다.
“그대는 내 자리가 탐나는가? 아니면 권력이?”
다행히 질문이 너무 쉬웠다. 나엘라가 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니요.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것 중 그 무엇도 탐나는 게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탐나는가.”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폐하.”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찻잔을 힘을 꽉 주어 잡았다. 군림하던 자이니 누군가에게 제지받는 일이 어색할 것이다. 머리 위로 오르려는 행태를 웬만한 평정심으론 참을 수 없는 거겠지.
이 대화가 끝난 뒤 엄벌을 내리면 그만이라도 말이다.
“자식 중 가장 사랑한 이는 누구입니까.”
이건 인간적으로 궁금했던 질문이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한 자식이 있긴 할까.
“그나마 데테로아가 귀여웠지. 위협적이지 않은 짐승이야말로 인간이 길들이는 가축이 아니던가. 개처럼 말이야.”
괜히 물었다. 귀가 썩는 기분이었다.
자식을 제 물건을 훔쳐 가는 도둑놈으로 보질 않나, 개로 보질 않나.
데테로아는 위협적이지 않아서 그나마 황태자 자리까지 앉혀 준 것 같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군. 그대는 무엇을 꾸미고 있나?”
“반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황제는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처단하기 위해 반란이라는 카드를 꺼낼 것이다. 나엘라의 의도가 무엇이든, 효과적으로 두 가문을 없애기 위해선 반란이라는 카드보다 유용한 것은 없었다.
황제가 원하던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대체할 가문들이 자리를 잡고 두 가문을 넘볼 수 있을 때 치려고 했을 터.
그래서 나엘라는 더 기다릴 필요 없이 시기를 앞당겼다. 저들이 준비할 시간이 더 필요한 지금, 밀어붙이는 게 좋으니까.
“지금 내 앞에서 반란이라고 말했는가?”
“예, 폐하.”
“당장이라도 즉결 처형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예.”
아마 황제는 머리가 아플 것이다. 나엘라가 아무 준비 없이 가만히 잡혀 줄 리가 없다는 걸 그도 잘 안다. 나엘라의 의도가 뭔지, 지금 나엘라를 당장 잡아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고자 머리를 굴리는 꼴이 훤히 보였다.
그러니 열심히 생각해라. 자신은 빈틈이 생기기를 기다릴 테니까.
물론 이 황궁에 붙들려 기다릴 생각은 없다.
“제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그 누구보다 사랑에 정열적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으니까요.”
당신이 체드란을 노린다면 자신은 기꺼이 당신을 죽이리라 당당히 답했다.
“하! 체드란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건가.”
나엘라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은 황제의 차례가 아니었다.
“제 차례입니다.”
“그대가 뭘 믿고 이러는지 알 수가 없군. 그대의 오라버니인가? 단제 경이 그대를 황궁에서 빼내 줄 것 같은가?”
“음, 그건 제가 한 번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저와 오라버니를 만나게 해 주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감옥에 갇히길 기다리는 건가? 그대가 갇히면 무엇이 이득이지?”
“폐하, 제 차례입니다.”
홧김에 대화를 멈출 수도,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보이는데 막상 잡아넣자니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고, 무엇을 감춘 건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계속 대화를 하자니 나엘라의 태도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죽인 자들과 꿈에서 만나신 적 없으십니까? 신하든, 자식이든, 형제든.”
이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것은 몰라도 형제를 건드리는 것만은 참지 못했다.
애초에 나엘라도 그게 황제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걸 알기에 건드렸다.
전대 황제의 자식 중 가장 별 볼 일 없던 황자, 온갖 굴욕과 모멸 속에서 끝내 제 형제들을 모두 도륙하고 황좌를 차지한 자.
그게 바로 지금의 황제였다.
황제의 형제들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큰 산이자 최악의 기억들을 선사했던 자들이었다. 사피오가 꽤 자세하게 알아 온 덕에 알 수 있었다.
“근위대! 당장 나엘라 노헤스카를 감옥에 가두거라!”
미로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기사들이 나엘라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을 보자마자 나엘라는 당장 몸을 엎드려 죄를 빌었다.
“폐하! 저는 그저 폐하를 걱정하였을 뿐입니다! 요반나 사신단 때도, 파르로시 황녀 재판을 조작할 때도 가장 많이 도움을 드렸던 저를 어떻게 이리 내치십니까!”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에게 빌었다. 달려오던 기사들은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붙들었고, 단제 역시 발을 멈추었다.
“하! 드디어 네가 미쳤구나. 이런다고 밖에 있는 귀족들에게 전해질 것 같으냐? 내가 그대를 억지로 잡아들였다고 소문이라도 내려고?”
안타깝게도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나엘라가 억울하다 외쳐도, 황제가 말 한마디조차 못 새어 나가게 차단한다면 귀족들은 전말을 알 수 없었다.
황제가 반란이라고 말하면 정말 반란이 되어 나엘라의 투옥이 전해질 것이다.
“당장 감옥에 가두고 노헤스카 저택의 모든 이들이 잡아 와라!”
“폐하! 제가 폐하께 얼마나 충성했는데 이러실 수는 없는 법입니다!”
나엘라가 겨우 밖의 소문이나 조작하려고 황제의 앞에서 이런 연기했겠는가. 만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면 황제는 사람의 심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나엘라의 연기는 지금 이곳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근위대를 위한 거였다. 근위대의 상관은 단제였다. 어쨌든 그의 가족을 끌고 나가는 데 그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잘못도 없어 보인다면?
나엘라는 나중에 단제가 황제를 배신하는 선택을 하더라도 정당성을 주고 싶었다. 단제의 가족은 마호세르디지만, 그가 가장 오래 지내왔던 이들은 근위대다.
특히 오랫동안 그를 따랐던 부하들에게 그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다. 가족이 억울하게 황제에게 죽을 판이라면 어떤 사람이든 흔들리고 말 테니까.
오로지 단제를 위하여 이렇게 연기하는 거였다. 가족이나 다름없을 근위대를 배신하더라도 너무 손가락질당하지 말라고.
“폐하!”
기사 둘이 나엘라를 붙잡고 끌어내고 있었으나 손속이 거칠지는 않았다. 역시 단장의 가족이라는 점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묵묵히 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근위대가 얼마나 흔들림 없이 제 일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자들을 상대해야 하다니,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또 한편으로는 제 오라비가 얼마나 잘 훈련시켰는지도 알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대공비 전하, 가셔야 합니다.”
감옥으로 이끌기 위해 기사들이 미로 정원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코앞에는 잔뜩 노기 어린 눈으로 마호세르디 공작을 불러오라며 소리치는 황제도 보였고.
하려면 지금 해야 했다. 괜히 황제의 눈에서 멀어졌을 때 도망쳤다간 죄 없는 기사들이 문책당할 것이다. 전부 단제의 부하들이니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미안하게 되었네.”
갑작스러운 사과에 기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찰나, 나엘라는 제 몸을 붙잡은 팔을 꺾고 단숨에 검을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