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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대공비가 치는 꽃 같지 못한 사고들 (185)화 (185/220)

184화

단제가 차마 나엘라를 붙잡지도 보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벌게진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잡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불똥이 덜 튈 텐데 참 바보 같은 오라버니였다.

“오른쪽이다!”

검으로 기사 한 명의 허벅지를 얇게 베고 다시 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오라버니의 모습은 애써 털어 내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체드란을 만나기 전까지 단제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쪽! 이쪽에 있습니다.”

드레스를 허벅지까지 쫙 찢어 검으로 잘라 버렸다. 밑이 휑하니 어색했지만 적어도 걸리적거리진 않았다. 이때를 대비해 일부러 긴 드레스를 입고 편한 신발을 감췄다는 건 아무도 몰랐으리라.

“멈춰라!”

기사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나엘라는 그대로 뛰어 기사의 가슴을 후려 찼다. 미로라는 건 나엘라를 잘 못 찾는다는 이점도 있지만, 통로가 좁아 한 명씩 상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뿌우─ 황실 근위대의 나팔이 사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위험을 알리는 나팔이라곤 해도 저렇게 울려 대면 궁에 있는 사람이 다 기겁하지 않을까.

“어디냐! 당장 찾아라!”

기사들이 목이 쉬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엘라는 점점 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는 미로의 가장자리를 향해 달렸다.

애초에 출구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미로를 빠져나가 봤자 출구와 입구에 전부 근위대가 지키고 있을 테니 가 봐야 답이 없다.

“여긴가?”

미로 정원의 북쪽, 본궁과 가장 먼 곳이자 뒤편에는 산이 있는 곳.

그 옛날 프리야가 황궁까지 잡혀 왔다가 도망쳤던 길이다. 그래서 정확한 길을 알기 위해 시녀장을 꼭 만나야 했고.

“아…… 프리야는 그때 어렸으니까…….”

그런데 하필 미로 정원의 개구멍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 당시 프리야의 체구 정도는 되어야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려면 나가야지.

나엘라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 조심스럽게 구멍으로 기었다. 나뭇가지와 흙바닥에 몸이 긁히고, 그나마 멀쩡하던 드레스의 윗부분도 찢어지는 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다. 가지 중 하나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프리야…… 그때 많이 작았구나…….”

겨우 상체는 통과시켰지만 남은 하체가 또 문제였다. 미로를 수색하던 기사들이 바닥을 기는 내 모습을 보면 얼마나 놀랄까 싶다. 이건 다른 의미로 절대 들킬 수 없었다. 차라리 반란이 낫겠다.

간신히 몸을 빼낸 나엘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숲을 올라야 하는데 도망치기 전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사 몇 명에게 살짝 들켜주는 것.

마침 근처에 미로 정원을 둘러싸기 시작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일부러 주춤주춤 도망갈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하며 시간을 끌자, 역시나 착실히 자신을 발견한 기사가 있었다.

“여기 있다! 죄인이 미로 정원을 이미 빠져나왔다!”

벌써 죄인 취급이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건 맞지만 그래도 듣는 죄인 상처받게.

나엘라는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무리 자신이 훈련도 받았고 기사로서 모자람이 없다고 한들 남자와의 체력 차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방심하지 말고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죄인이 산을 통해 도주한다! 당장 단장님께, 아 아니, 다른 이들에게 알려라!”

단제에게 당신 동생이 산으로 도주하고 있다고 알리기는 좀 그렇지.

나엘라는 일부러 생각을 다른 곳에 집중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부터는 발목에도 힘을 주어 넘어지더라도 삐지 않도록 해야 하며 가파른 경사를 뛰어올라도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아무런 충격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수도를 빠져나가려면 조금이라도 멀쩡한 편이 나을 테니까.

숲을 헤치며 정신없이 달리자 조금씩 습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원래 목적지에 다가오고 있다.

“여기다! 여기에 있다!”

그러는 중에도 기사들은 나엘라를 따라잡고 있었다.

역시 근력의 한계는 어쩔 수 없나. 그래도 속도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요즘 훈련을 안 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산길 중간중간 놓인 바위를 가뿐히 뛰어넘으며 마지막 속도를 내었다.

그러자 곧 사방이 트이며 커다란 절벽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주변을 울리는 물소리와 함께 폭포가 흐르고 있었다.

수도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 지금은 폭포가 황궁의 북쪽을 가로막으며 지키고 있지만 나엘라에겐 그 무엇보다 반가운 곳이었다.

“더는 죄인이 도망칠 곳이 없다! 포위하라!”

나엘라가 절벽에 다다라 멈춰 서자 기사들이 금세 그녀를 포위해 왔다.

뛰어내려 강에 빠진다고 해도 이 정도 높이면 즉사였다. 나엘라가 더 도망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기사들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투항하여 얌전히 굴어라!”

소리친 이는 단제의 부관이라고 알려진 자였다. 나엘라는 쓴웃음을 머금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연기의 마무리를 할 때였다.

“경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죄인의 마지막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는 걸까. 그들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단제 오라버니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엘라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망설임 없이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마지막으로 본 부관의 표정은 당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

나엘라 노헤스카 대공비가 반란을 저지르려다 절벽에 투신하였다는 소문이 수도를 휩쓸었다.

대공비가 대체 반란을 왜 저지른단 말인가? 심지어 남편인 체드란 대공은 두칸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아비는 황제에게 평생을 충성하던 마호세르디 공작이었다.

사람들은 부족한 명분에 믿지 못하는 것이 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잠자코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반이었다.

그녀를 찾으려는 근위대가 사방을 휩쓸고 다녔고, 그녀의 가족인 단제 경과 마호세르디 공작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나엘라 대공비 본인은 사라진 데다 죽었다는 여론이 강했다. 자세한 조사를 해야 한다지만, 그렇다고 전쟁 중인 체드란을 수도로 불러올 수도 없으니 문제였다.

당장 체드란을 수도로 불러오면 전쟁은 누가 한단 말인가? 두칸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단제와 공작은 풀려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도 황제의 주장일 뿐이니 믿는 듯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다음에 은밀하게 도는 소문은 마호세르디가 황제에게 밉보여 나엘라를 본보기로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얘기들을 떠들었다.

“노헤스카 저택에서 증거가 나왔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면서요?”

“황제 폐하께서 조작한 증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확실한 증거도 아니라면서요?”

“그러니까 재판이 안 열리고 있죠. 확실한 증거라면 마호세르디와 노헤스카를 상대로 재판이 열렸을 테니까요.”

“두 가문을 재판으로 불러들이면 지금 전쟁 중인 제스라 왕국과 두칸은 어떡해요?”

그러니 문제였다. 두 가문을 대체할 만큼 군사력을 가진 가문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더 끈 건 마호세르디 공작과 체드란의 행동이었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미쳐 간다면서요?”

“하루아침에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죽었는데 제정신일 리가요. 체드란 대공은 어떻고요?”

“세기의 로맨스라고 할 정도로 사랑하던 부인이 죽었는데, 대공이 전쟁을 중단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당장 노헤스카 주변 영지에서 기사단을 보내라 한다면서요? 노헤스카는 두칸과 전쟁을 멈추겠다고.”

마호세르디의 막내딸이자 노헤스카의 대공비가 죽은 것이다. 공작과 대공이 제정신일 리가 없다. 당장 그녀의 죽음에 얽힌 것들을 파헤치고 싶어도 반란이라는 죄목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둘의 이상 행동이 이해된다는 여론이 거셌다.

그때 누군가 뛰어 들어와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마호세르디 공작이 결국 영지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광증이 심해져서 가신들이 거의 끌고 가는 거나 다름이 없대요!”

“세상에……. 그럴 만도 하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뭔데요? 더 놀랄 일이 있나요?”

“단제 경이 단장직을 사퇴하고 스스로 저택 구금을 택했다고 합니다. 반란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 본인의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겠다고요.”

호사가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 사실을 주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서 난리가 났다.

황제파의 수장인 마호세르디 공작은 미쳤고, 근위대의 자랑이자 무력의 상징인 단제 경은 저택 구금이라니.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마호세르디의 몰락은 다른 이들에게 과히 흥미로운 주제나 다름없었다.

“노헤스카 대공 전하는 어떻게 할까요?”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대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전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말도 안 된다고 다들 고개를 저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라 모여 있던 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으어, 죽겠다.”

며칠을 동굴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절벽의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으나 아래에서는 절벽 사이사이에 난 나무들 때문에 보이지 않는 동굴.

옛날 프리야가 목숨을 걸고 도주로로 삼았던 동굴이었다.

“너희는 노헤스카로 가 있으라니까 왜 따라와서 고생이야.”

나엘라가 그녀들이 구해 준 바지를 입고 늘어져 있으니, 옆에 앉아 있던 지안이 샐쭉한 얼굴을 했다.

“저희가 어떻게 나엘라 님을 두고 가요.”

“나 혼자서도 잘 빠져나갈 수 있어. 이제 슬슬 수색이 풀어질 테니 괜찮아.”

“그런 말 마세요. 클로에가 샌드위치를 갖다 줬으니 이거라도 드세요.”

사전에 미리 음식을 쌓아 두긴 했지만 전부 전투 식량이거나 썩지 않는 음식 위주였다. 그 때문에 육포나 질긴 빵이 대부분이라 이거 먹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누군가가 음식을 내려 주었다.

줄에 매달려 대롱대롱 내려오는 음식에 기겁한 것도 잠시, 그 상대가 클로에라 더 기겁했다.

“클로에, 언제 본궁 하녀가 됐대?”

“감시가 심해서 연락을 못 하다가, 이번에 보안이 강화되면서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사람들을 전부 다른 궁으로 내쫓았대요.”

우연에 우연이 겹쳐 클로에는 감시가 덜한 궁으로 쫓겨났고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엘라와 시녀장 사이의 거래를 듣고는 바로 시녀장에게 달려갔다고 들었다.

“하필 클로에를 본궁 하녀로 넣어 준 사람이 시녀장이라니.”

“세상 참 좁네요.”

시녀장과의 친분으로 동굴에 관해 들었고, 감시가 덜한 궁으로 쫓겨난 덕에 이렇게 몰래 음식도 전해 주고.

샌드위치를 모두 먹어 치운 나엘라는 가볍게 기지개를 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동굴은 지겨워 죽겠다.”

이제는 수도를 벗어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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